58화 허락
-지섭아, 너 혹시.
“보고 있어.”
딱딱한 지섭의 말에 매니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섭 역시 촬영을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생방송 G라인 뉴스’을 보고, 안온한 휴식은 그대로 깨져 버렸지만.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도희 걔가 좀 독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리까지 간 거고. 걔는 내가 집에 가는 걸 싫어해서 제집 주소도 안 알려 줬어요. 소속사 찾아갔더니 경호원까지 붙여서 쫓아내고…….]
안 알려 줄 만하니까 안 했겠지. 지섭은 남은 맥주를 모두 원샷한 뒤에 빈 캔을 한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행여나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동료 배우로서 신경 써 주고 하는 건 할 수 있어. 근데 딱 거기까지야.
“무슨 소리야?”
매니저의 경고에 지섭이 시치미를 뗐다. 지섭은 매니저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구급차로 실려 가던 그때부터, 아니 정확히 말리던 건 예능 프로그램을 시작한 순간부터였다. 매니저는 자신 외의 사람에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지섭의 낯선 모습에 시종 경고를 보내왔다. 최근 들어 구설에 휘말리는 도희와 더욱 친해지는 것 같아, 따로 만나는 것도 안 된다고 주의를 주던 차였다. 매니저는 가끔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지섭의 추후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알잖아, 무슨 말인지.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마. 아니, 해도 좋은데 나서지 마. 알았지.
“안 해. 앞서 나가지 마, 형.”
-그래, 보통 때 같으면 이런 걱정도 안 한다. 오죽하면 그러냐!
한탄에 가깝게 말하는 매니저의 말에 지섭이 낮게 웃었다. 지섭은 한 번 더 매니저를 안심시키는 말을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잠시 거실을 배회하듯 서성거렸다.
“직접 나서지만 않으면 되지.”
검지로 턱을 툭툭 건드리던 지섭은 이내 별안간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누나. 오랜만이야.”
* * *
도희는 무슨 정신으로 병원까지 운전했는지 몰랐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입술을 달싹이며 정신없이 액셀을 밟았다. 신호등 앞에선 잠시 멈춰서 감사하다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쏟았고, 시종 떨리는 손 때문에 하마터면 코너를 돌다가 모서리에 부딪칠 뻔하면서 가까스로 병원에 도착했다. 도희는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 놓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곤 매일 같이 들르던 병실을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어? 백도희 아니야?”
사람이 많은 대학 병원에서 철저하게 마스크를 쓰던 것도 잊어버렸다. 도희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있는 주완을 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헤치고 도희는 주완의 병실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도희는 망설임 없이 병실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는 주완이었다. 그 옆엔 부현과 윤선이 서 있었는데, 도희 눈동자엔 오로지 주완만 비쳤다.
힘없이 풀린 눈을 하고 있던 주완은 도희를 보자마자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마치 이곳에 도희가 나타날 줄 몰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주완은 미처 면도하지 못한 삐죽삐죽한 수염을 그대로 둔 채 얼이 빠진 채로 도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네가 어떻게…….”
아직 덜 깬 듯한 쇳소리가 섞인 중저음이 날아왔다. 거친 목소리였지만, 도희에겐 그 목소리가 벨벳 카펫처럼 부드러웠다. 그가 깨어나길 바라는 동안 상상했던 목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주완 씨…….”
도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발을 뗐다. 분명 제 눈앞에 또렷하게 앉아 있는데, 주완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도희는 뿌옇게 번지는 주완의 모습에 얼른 눈물을 닦아 내고 주완의 앞까지 비틀비틀 걸어갔다.
“어머니, 도희가 왜 여기…….”
주완은 자못 당황하며 부현을 추궁했다. 그러자 부현이 덤덤히 말했다.
“내가 다 말했다.”
“어머니!”
주완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부현을 탓하려고 했지만, 곧 그 앞을 도희가 가로막았다. 도희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주완을 원망하듯 노려봤다.
“미안하…….”
주완이 사과를 다 마치기도 전에 도희가 그의 목을 덥석 끌어안았다. 갑자기 달려든 탓에 주완은 항복하듯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고마워요. 깨워나 줘서…… 너무, 고마워.”
“……도희야.”
“죽지 마요……. 나 두고 죽지 마.”
바들바들 떨리는 물기 어린 목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도희는 그를 끌어안은 목을 더 꽉 죄었다. 놀란 주완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큼직한 손을 그녀의 등 뒤에 조심스레 얹었다.
“걱정 마. 너보다 오래 살 테니까.”
주완은 도희의 등을 느릿하게 토닥였다. 그제야 도희는 안도의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그녀의 모습에 윤선과 부현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흐으윽…… 왜, 왜 숨겼어요! 나한테 말했어야죠! 왜 혼자 힘들어요!”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주완의 나직한 사과에도 도희는 도통 진정이 되질 않는 듯 그간 쌓아온 원망의 말을 줄줄이 풀어냈다.
“그렇게 죽기라도 했어 봐! 나중에 고마워라도 할 줄 알았어요? 어쩜 사람이……!”
“그편이 널 덜 힘들게 할 것 같…….”
주완이 울먹이는 도희에게 변명을 하려고 하자 도희가 주완의 가슴팍을 홱 밀어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주완을 노려보는 도희의 매서운 눈초리에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쓴 미소를 지었다.
“다신 안 그럴게.”
주완은 도희의 뺨 위에 엉망으로 눌어붙은 눈물 자국을 지워 주며 말했다. 주완의 커다란 손이 도희의 뺨을 감싸자, 도희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돌연 정신을 차린 도희가 순식간에 울음을 그치고 씩씩하게 그에게서 뚝 떨어졌다. 도희는 제 뺨을 적신 눈물을 소매로 닦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주완, 부현, 그리고 윤선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도희는 주완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부현을 향해 섰다. 그녀의 표정이 하도 비장해서 병실에는 뜬금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흐읍, 흡, 이제 됐어요.”
도희는 울음이 아직 진정이 덜 됐는지 가슴을 들썩이면서 말했다. 그러자 부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돼?”
“주완 씨 깨어난 거 봤으니까…… 흐읍, 전 이제 가 볼게요.”
부현은 그제야 도희가 주완이 깨어날 때까지만 옆에 있겠단 약속을 떠올렸다. 분위기만으로 도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챈 윤선은 냉큼 부현의 눈치를 살폈다. 부현은 오묘한 얼굴로 도희의 흠뻑 젖은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지금 나 놀리니?”
부현이 앙탈을 부리듯 그렇게 말하곤 도희를 홱 지나쳤다. 그러더니 곧 주완의 어깨를 철썩 내리쳤다.
“하여튼 또 엄마 속 썩이기만 해 봐. 그땐 이 엄마 숨넘어가는 줄 알아!”
간단한 경고를 한 부현은 문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별안간 문을 연 채로 두 사람을 향해 체념한 듯 소리쳤다.
“니들 문제는 니들이 알아서 해!”
탕! 앙칼진 부현의 말에 어리둥절한 도희가 멀뚱히 서 있자 윤선이 참고 있던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도희가 상황을 묻듯 윤선에게 시선을 보내자 윤선이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허락하신 것 같은데요?”
“네?”
“주완이 넌 좀 씻고. 내일 바로 검사할 거니까 준비해.”
윤선마저 병실을 나가고, 두 사람만 남은 병실에서 도희는 넋을 놓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자 마침내 상황 파악을 먼저 한 주완이 실소를 터트리며 도희를 향해 말했다.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다정하고 장난스러운 주완의 말에 도희가 어리바리한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았다. 도희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본 주완이 따뜻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이리 와.”
그제야 도희는 주완의 너른 품에 몸을 던졌다. 주완의 따스한 체온이 도희의 온몸을 다시금 감싸자, 도희는 그제야 주완이 돌아왔음을 절절히 실감했다.
“아직도 안 믿겨요.”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
“……그건 진짜 미안해야 돼. 프러포즈하자마자 쓰러지는 사람이 어딨어요?”
도희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중얼거릴 때, 주완의 시선 끝이 도희의 손가락으로 향했다.
“반지는?”
주완의 물음에 도희가 그를 원망하듯 노려보며 침대 옆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자, 그곳에는 일전에 주완이 꽃다발 사이로 넣어 두었던 작은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희는 망설임 없이 상자를 손에 쥐고 주완에게 내밀었다.
“그날은 무효였잖아. 다시 해요.”
도희의 말에 주완은 그날의 머쓱함을 상기시키기라도 한 듯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희가 꿋꿋하게 상자를 내밀자 주완이 마지못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를 열자, 그 속엔 도희에게 가장 어울리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여전히 고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병실에는 그날과는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도희는 침을 꼴깍 삼키며 주완이 반지를 빼는 순간을 눈에 담듯 뚫어져라 바라봤다. 주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도희의 왼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곤 그녀의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 주었다.
마침내 반지가 제자리를 찾았을 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도희를 바라보는 주완의 눈동자는 파리해진 안색과 달리 생기가 넘쳤다.
“사랑해. 아주 많이.”
한 달여 만에 다시 듣는 그 말에 도희는 또다시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주완이 쓰러져 있는 동안 수십 번이고 되돌리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그가 눈앞에서 쓰러지고, 그의 힘겨운 투병 생활을 들었을 땐 도희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던 고백이 목구멍에 가시처럼 턱턱 걸리곤 했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면 이번에야말로 결코 망설이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도희는 가늘게 숨을 들이마시고, 헤어져 있던 지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바라본 적 없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봤다. 도희의 똘망똘망하고 총명한 눈빛에 주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도희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사랑해요. 아주 많이.”
도희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완이 도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은 입맞춤 하나에 생경한 느낌이 도희를 붕 뜨게 했다. 도희가 다시금 입매를 매혹적으로 끌어 올리자, 주완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다시금 제 입을 가져다 댔다.
쪽. 쪽. 쪽. 처음엔 입술이었던 곳이 다음엔 콧등으로, 다음엔 눈두덩이 위로, 다음엔 이마로 향했다. 소중히 여기는 듯한 달콤한 입맞춤에 도희는 새삼 뭉클해졌다. 행복이 온몸을 지배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눈이 반달로 휘었다.
“돌아와 줘서, 견뎌 줘서 고마워요.”
도희의 낮은 속삭임에 주완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맑게 웃었다.
“나도 고마워. 이기적인 선택, 이해해 줘서.”
매일 깨어나지 않는 주완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던 도희에겐 마치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세상이 자신을 절망 속에 던져 놓고 나 몰라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만큼은 하늘에게, 신에게, 모든 것에 감사했다.
도희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꼭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