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57화 (57/71)

57화 반격

소속사를 고소한 것도 모자라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스타의 엄마. 촬영을 하는 내내 도희는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친하지 않은 스태프들은 멀리에서 기사와 도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호기심을 빛냈고, 친한 배우들은 다가와 조심스레 괜찮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괜찮냐는 질문 속에서도 사람들은 도희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했다. 알고 있었다면 도희도 사회적 책임을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도희 씨! 그게 아니지!!”

몇 주째 도희에게 친절하던 김 감독의 태도도 식은 냄비처럼 차갑게 돌변했다. 일각에선 도희의 사생활이니 관여할 게 아니라고 했지만, 드라마 총 책임자인 김 감독의 입장은 달랐다. 이대로라면 드라마는 문제없이 탄탄대로를 걸을 게 뻔했는데, 행여 구설수가 시청률에 영향을 줄까 전전긍긍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몰랐다는 도희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답답한 김 감독은 처음 보였던 그 모습처럼 도희의 연기에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만큼 했으면 알아서 척척 할 때도 됐는데 말이야. 어?”

“……죄송합니다.”

촬영은 거의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한동안 시청률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가 매일 같이 활기찼는데, 김 감독의 짜증스러운 고함이 퍼지고 몇 시간도 안 되어 촬영 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오죽하면 ‘컷’ 소리가 나고도 장비 돌아가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쉬었다 합시다! 에이씨, 촬영을 접어야 하나.”

대본을 집어 던진 김 감독은 그대로 촬영장을 박차고 나갔다. 사람들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는 듯 한숨을 푹 내뱉더니 개미만 한 소리로 꿍얼거리며 촬영장을 벗어났다.

도희는 모든 화살이 제게로 날아와 있는 것 같았다. 순자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고, 한동안 주완에게만 집중해 있어 순자를 떠올릴 틈 없이 바쁘게 지냈던 도희였다. 언젠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 타이밍에 이런 식이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희는 촬영 팀이 반 이상 빠져나간 촬영장 안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때, 도희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괜찮아요?”

딱딱한 목소리에 고개만 빼꼼 들자 그곳엔 말쑥한 얼굴의 지섭이 서 있었다. 지섭은 고된 촬영 때문인지 도희가 말라 가는 것만큼이나 해쓱해져 있었다. 속이 안 좋다며 거의 밥을 넘기지 못하는 지섭을 볼 때마다 도희는 가지고 있던 소화제를 건넸지만, 그는 소화제를 먹는 대신 대부분의 시간을 먹지 않고 버텼다.

“괜찮아. 너야말로 괜찮은 거지?”

도희가 의젓한 투로 묻자 지섭은 미간을 찌푸리며 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나 애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한 지섭은 겨우 고개만 들고 있던 도희의 뒷머리를 얄미운 듯 꾹 눌렀다. 지섭의 손길에 맥없이 고개가 수그러지자, 도희는 오뚝이처럼 상체까지 번쩍 일으켰다.

“까분다, 또.”

“소속사랑 얘긴 해 봤어요?”

지섭의 질문에 장난스러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가셨다. 도희는 조금 전 대표 재성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우선 사기 혐의는 부인하고 있다는데……. 소유권 주장은 어차피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넌 네 할 일만 해. 다른 얘기는 가족사 핑계 대고 적당히 자르마.

재성은 사기 혐의에 관해선 전혀 모르는 이야기이며, 소유권 주장 또한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부인할 생각이라고 했다. 필요하면 도희에게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고,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금전적 도움을 준 것까지도 밝혀야 할지도 모른다는 재성의 말에 도희는 알았다고 답했다. 어차피 순자와는 연을 끊으려고 했던 도희였다.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정을 생각해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다.

“다 잘될 거야. 시간이 걸리니까 문제지.”

도희는 싸늘하게 가라앉은 촬영장을 둘러보며 쓸쓸하게 말했다.

순자와 연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주완이 쓰러진 일이 아니었다면 도희에게 이 일 또한 큰 고비가 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든 주완의 일을 겪고, 도희는 놀라울 만큼 모든 일에 초연했다. 머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 들거나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렵진 않았다. 도희가 강해진 건 모두 주완 덕분이었다.

“힘들면 얘기해요. 내가 최대한 도울게요.”

지섭의 응원에 도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몇 주간 힘겨운 싸움이 계속됐다. 거리를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던 단풍은 스산한 바람에 맥없이 떨어지고, 코트 없이는 걸어 다닐 수 없는 찬 공기에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다.

부현은 볼이 움푹 팬 창백한 얼굴로 윤선의 진료실에 들어왔다. 윤선은 공손한 인사를 하면서도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해요, 어머니. 차도가 없어요.”

윤선의 단호한 진단에 부현은 눈물이 핑 돌았지만, 지친 얼굴로 입술을 짓이겼다. 슬픔을 정돈하려는 듯한 부현의 태도에 윤선은 잠시 그녀가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마음을 정리한 부현은 다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윤선에게 물었다.

“그 앤 아직도 매일 오니?”

“…… 네, 촬영이 끝나는 대로요.”

주완이 잠든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부현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희가 병실을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에어지는 슬픔이라도 시간은 그 고통을 무뎌지게 해 주니까, 빡빡한 촬영 스케줄로 힘든 도희 역시 조만간 소홀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부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도희는 오히려 이곳이 집인 양 들락였다. 옷 몇 가지를 챙겨와 이곳에서 출퇴근했고,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고 촬영을 나갔다. 가끔 병실 문을 들여다볼 때면 도희는 씻지 못한 주완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 주고, 주완이 깨어난 것처럼 손을 꼭 붙들고 하루 있던 일을 떠들거나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부현은 마음이 심란했다. 도희의 정성은 그녀를 다신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겠다는 부현의 견고한 다짐마저 흔들고 있었다. 게다가 최근 벌어진 순자 사건은 부현에게도 더 이상 도희의 약점이 아니라 아픈 사연처럼 느껴졌다.

“네가 보기엔 어떠니?”

“두 사람이요?”

복잡한 부현의 표정을 보곤 윤선이 되물었다. 윤선은 올 게 왔다는 듯 털털한 투로 대꾸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인가 싶죠. 저렇게 애틋한데. 어쩔 땐 부럽다니까요. 주완이만 미련한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도희 씨도 만만찮더라구요.”

윤선의 말을 들은 부현은 더 혼란스러워졌는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윤선이 부현을 달래듯 말했다.

“주완이 깨어나면…… 허락해 주세요. 두 사람, 힘들게 돌아왔잖아요.”

윤선의 말에 부현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지만, 윤선은 이미 부현의 표정만으로도 대답을 들은 듯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렸다.

* * *

늦은 밤, 도희는 옷가지 등을 챙기기 위해 집에 잠시 들렀다. 마침 내일은 촬영 휴일이라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목욕을 마친 도희는 TV를 틀어 놓은 채로 머리를 말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눈꺼풀이 감겨 왔지만, 도희는 하루라도 병원에 나가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주완이 언제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희를 가만두지 않았다. 도희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병원에 나갔다.

[생방송 G라인 뉴스에서 백도희 모친 단독 인터뷰!]

그때, TV에서 도희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깜짝 놀란 도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생방송 G라인 뉴스’는 방송 60초 전으로 악마의 카운트다운처럼 의미 없는 광고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하려는데, 때마침 도희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희야! 지금 JBC 틀어 봐!

“지금 보고 있어.”

-어떻게 된 거야! 너 알고 있었어?

“……아니, 전혀.”

-와, 이것들이 이젠 소속사에 언질 하나 안 주고! 일단 끊어 봐.

전화를 끊은 도희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희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생방송의 오프닝이 흘러나왔다. 사회자와 순자의 당당한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대체…… 어디까지 할 거예요?”

‘백도희 엄마 소송’ 사건은 한동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처음엔 어떻게 엄마의 사기 행각을 모를 수가 있냐며 도희를 비난하는 글이 거셌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도희의 동정론이 커졌다. 딸 수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터무니없는데, 사기 혐의로 피소된 사건까지 함께 터지니 순자의 말에는 전혀 신빙성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자 사지에 몰린 순자가 돌연 ‘생방송 G라인 뉴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회자와 순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인사치레는 할 필요 없다는 듯 사회자는 순자에게 이 자리에 나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순자는 딸과의 오해를 풀고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사기 혐의에 관해서도 도희 얼굴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극구 부인했다. 검찰 조사를 피한 건 급한 개인 사정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순자의 연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도희 걔가 좀 독한 구석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리까지 간 거고. 걔는 내가 집에 가는 걸 싫어해서 제집 주소도 안 알려 줬어요. 소속사 찾아갔더니 경호원까지 붙여서 쫓아내고……. 연락은 차단당했지, 집은 모르지, 소속사에서도 사람 취급도 안 해 주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도희가 이걸 보고 저랑 대화나 좀 해 줬으면 좋겠네요.]

“하! 저게 무슨……!”

순자의 연기는 배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웠고, 도희는 기가 막혔다. 비록 딸의 수입에 소유권을 주장하고, 소속사를 고소까지 했지만 그건 독한 딸을 둔 엄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였다.

‘내일 촬영이 쉬는 날이라 다행이네.’

안 그래도 눈칫밥 속에서 촬영을 이어 가고 있는데, 이 일이 터진 바로 다음 날 촬영장에서 사람들을 볼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순자 일이 터지고, 사람들은 되도록 도희에게 말을 걸지 않으려고 했다.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종선과 지섭 둘뿐이었다. 라일은 그런 도희의 소극적인 행동에 신이 난 듯 요즘 들어 밝은 에너지를 뿜어내며 촬영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또 어떤 시비를 걸어올지 눈에 훤했다.

인터뷰는 약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검색어는 순식간에 ‘백도희’와 ‘백도희 엄마’가 되었고, 도희는 인터뷰를 모두 보고 나서야 겨우 TV를 끌 수 있었다.

방송의 여파는 대단했다. 도희의 동정론으로 기우는 것 같던 여론은 단숨에 뒤집혔다. 저 정도까지 하면 나 같아도 고소하겠다, 천륜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냐, 백도희가 독하긴 독하다, 재벌이랑 결혼한 거 봐라 하는 악플들이 줄을 이었다.

도희는 마저 짐을 싸서 얼른 집을 나섰다. 기자들을 한시라도 빨리 피하기 위해서였다. 집을 나서는 도희의 표정은 덤덤했다. 이혼을 했을 당시, 기자들에게 쫓기던 지난날의 악몽이 도희를 덮쳤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른 게 있었다.

바로 주완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주완의 병을 알게 된 도희는 그날 이후 많은 게 변했다. 복잡했던 심정이 거짓말처럼 간단해졌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주완만 곁에 있다면 모든 걸 다 극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도희가 차에 타자마자 진동이 울렸다. 나영의 전화일 줄 알았던 도희는 액정에 뜬 발신자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졌다.

[어머님]

또 무슨 말을 하실까. 도희는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님.”

-도희야! 주완이가 깨어났다!

“네?”

생각지 못한 부현의 경쾌한 목소리에 도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