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다시 안 만날게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부현이 앙칼지게 외쳤다. 도희는 굳은 결심을 한 결연한 얼굴로 돌진하듯 부현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부현은 그런 도희를 표독스럽게 노려봤지만, 도희는 이전처럼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당장 나가!”
“…….”
“이젠 내 말도 무시하니? 사람 불러서 쫓아내 줘?!”
부현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자, 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서 있던 도희가 이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 지금…… 뭐 하니?”
도희는 심호흡을 하며 양 주먹을 제 허벅지 위에 올리곤 완고한 얼굴로 부현을 올려다봤다.
“어머님. 용서해 주세요.”
“뭐?”
“주완 씨, 곁에 있게 해 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도희가 정수리가 보일 만큼 고개를 푹 숙였다. 도희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다시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부현을 응시했다.
“주완 씨 의심한 거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저 그냥…… 주완 씨 곁에 있고 싶어요.”
“넌 끝까지……!”
부현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하려던 말을 삼키곤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리곤 이내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유산했다며.”
“……!”
생각지 못한 부현의 말에 도희의 동공이 흔들렸다. 굳건했던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유약해지는 걸 느낀 부현은 냉엄하게 도희를 몰아붙였다.
“너나 주완이나 이미 서로한테 상처인데, 붙어 있는다고 그게 다 아물어질 것 같니? 우리 주완이를 위해서라도 너를 위해서라도 둘은 떨어지는 게 맞다.”
부현의 고상한 다그침에 도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부현은 도희가 자신의 말에 반박할 수 없어서 아무 말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혼이라는 게 그런 거다. 네가 주완일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 우리 주완이가 얼마나 우스워지겠니? 난 절대 그 꼴 못 본다. 끝냈으면 받아들이고…….”
“다시 안 만날게요.”
“다시 안 만난다고 될 일이 아닌……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니?”
부현은 잘못 들었다는 듯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무릎까지 꿇으면서 곁에 있게 해 달라더니, 앞뒤가 안 맞았다. 어리둥절한 부현의 표정에 도희가 한 번 더 또렷한 발음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주완 씨, 다시 안 만날게요.”
도희는 쓴 약을 삼키듯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주완 씨가 우스워지는 거면…… 저 주완 씨 안 만날게요. 깨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옆에 있게 해 주세요.”
도희는 가슴에서 무언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꾹 참으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도희의 모습에 부현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심이니? 그 말에 책임질 순 있고?”
“진심…… 이에요. 어머님 말씀대로 저, 그동안 주완 씨 아플 때 곁에 있어 주질 못했어요. 그게 너무…….”
도희는 끝내 목이 메어 말꼬리를 흐렸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도희를 바라보던 부현은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너그러움이라기보단 눈앞에서 전해져 오는 간절한 슬픔에 할 말을 잃은 탓이었다. 도희는 성대의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곁에 있고 싶어요. 이제라도, 이거라도 하고 싶어요. 제발 하게 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님…….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깨어날 때까지만이라도……으흑.”
도희의 흐느낌이 짙어지자 부현이 더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희가 애원하듯 부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부현은 자꾸만 제 아들의 간절한 부탁이 떠올랐다.
‘도와주세요. 같은 실수 하지 않도록, 저…… 막지 마세요.’
‘어머니, 제발요…….’
부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주완에게 해가 될 만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혼을 하고 나서 그 이유가 ‘도희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얘길 처음 들었을 땐 도희를 찾아가서 다 말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가뜩이나 마뜩잖은 며느리를 떼어 낼 수 있는 기회를 굳이 저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도희 생각 하나로 의지를 가지고 살아 내는 주완을 보면서도 부현은 다 낫고 나면 잠시 애끓는 마음도 너덜너덜한 헝겊처럼 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주완을 얼마든지 새 출발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흐으읍…… 흐윽…….”
제 앞에 울고 있는 도희와 누워 있는 주완을 보고 있자니 의구심이 일었다. 특히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길 들었을 땐, 여태까지의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형인 주승을 이기고 후계자 자릴 차지하고, 고아보다 못한 도희를 밀어내고 주완에게 도움이 될 만한 배경을 가진 아내를 안겨 주는 게, 과연 주완을 위한 일이 맞는 걸까? 엄마의 입장에서 모든 건 아들을 위함이 명백했지만, 지금 도희를 쫓아내는 게 과연 주완을 위한 일일까?
“……깨어날 때까지만이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부현은 마지못해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다. 부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부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희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상체를 숙이고, 이미 닫혀 버린 문을 향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 * *
집으로 가는 길, 뒷좌석에 있던 부현은 J그룹 장 회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한 부현은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죄송해요, 안 그래도 먼저 연락드린다는 게 그만…….”
-아뇨, 자식이 그렇게 됐는데 정신없으신 게 당연합니다.
두 사람은 어제, 파혼 기사가 나오고 처음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당연히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낼 줄 알았던 장 회장은 의외로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부현은 장 회장의 여유를 의아해하며 파혼에 대한 이야길 꺼내려고 했다. 그때 장 회장이 먼저 부현의 말을 가로챘다.
-효주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효주가 무슨 얘길 어떻게 했을지 몰라, 부현이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일 때였다.
-우리 딸이 겁이 많아서 말입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라도 되면 어쩝니까. 사돈께서 서운하시겠지만, 그래도 함께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이해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네? 그게 무슨…….”
-사돈께서도 너무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희귀병이 있는 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그 말을 들은 부현은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장 회장의 말인즉슨 주완의 병을 알게 된 효주가 주완과의 결혼을 원하지 않고, 장 회장 역시 주완의 병이 내심 마음에 걸린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었다.
부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전 같았으면 이미 병은 다 나았고,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정신을 잃었어도 곧 기운을 차릴 거라고 설득했겠지만, 부현은 별안간 주완이 깨어날 때까지만이라도 곁에 있겠다고 말하는 도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희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없겠죠?”
이제 와 발을 빼려는 장 회장의 속셈이 괘씸하긴 했지만, 부현은 지금이 J그룹과의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부현의 사근사근한 말투에 장 회장이 반색하며 호탕한 투로 대꾸했다.
-그럼요! 역시 사모님께서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호칭을 ‘사모님’으로 바꾸는 장 회장의 교활한 태도에 부현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전화를 끊고, 허탈한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간 자신은 도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 노력했던 걸까. 이젠 정말로 뭐가 맞는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부현은 달리는 차도에서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 * *
이 주가 흘렀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는 6화까지 방영됐는데, 시청률은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특히 지섭과 도희의 키스 신은 최고 시청률 무려 33.3%를 기록하는 쾌거를 보여 주었다. 지섭의 외설적인 눈빛과 도희의 머리를 끌어당긴 지섭의 기습적인 박력,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른 미묘한 긴장감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몇 번의 키스 끝에 마무리된 신이었는데, 김 감독은 몇 개의 키스 신을 다양한 각도에 담아내면서 그 어떤 키스보다 화끈한 ‘취중 키스’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농도 짙은 키스 신에 이전의 열애설이 사실이길 바라는 시청자들도 꽤 있었다.
[너무 격렬함. ㄷㄷ 실제 취중 키스 같음]
[은지섭 박력ㅜㅜ쩔어 백도희 부럽다. 나도 저런 연하남 좀.]
[우리 오빠한테 떨어져라 백여시야.]
드라마가 인기 있는 만큼 두 사람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반복적인 기사가 생성됐다. 심지어 어떤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커플 아이템이 아니라고 밝혀졌던 이전 일까지 모두 들춰내, 두 사람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나열한 글을 소설처럼 정리해서 두 사람의 운명론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 드라마에서 도희가 입고 나온 옷은 죄다 품절이었고, 그녀가 쓴 화장품, 향수 등이 인터넷에서 끊임없이 회자됐다. 한 마디로 ‘스위트 셰어 하우스’ 붐과 함께, 도희는 생각지도 못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은 컨디션 어때?”
“괜찮아.”
나영은 매일 아침 도희의 컨디션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도희가 촬영 스케줄을 빠짐없이 소화하면서도 주완이 입원해 있는 병실을 매일같이 출근한다는 걸 알아차린 후부터였다.
처음 도희에게 주완의 상태에 대해 들었을 때 나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희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아 그저 도희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그 뒤로 나영은 도희가 조금이라도 덜 피곤하도록 묵묵히 병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길 반복했다. 도희가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병원에서 쪽잠을 자며 출퇴근하는 도희를 위해 옷가지나 비타민 등을 챙기며 그녀의 상태를 끊임없이 살폈다. 덕분에 도희는 무리한 일정에도 간신히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현은 그 뒤로 병실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점심쯤 부현이 왔다 갔다는 윤선의 말로 미루어 보아 부현은 도희가 병실을 들르는 저녁 시간대를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았다. 덕분에 도희는 눈치 보지 않고 주완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자는 게 어때. 하루라도 집에서 제대로 자야지.”
“괜찮아. 고마워, 나영아.”
가끔 주완이 깨어나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이 나긴 했지만, 도희는 이렇게나마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도희는 그가 깨어나면 해 줄 말이나 함께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두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씩씩하게 주완을 기다렸다. 이대로 활기차게 지낸다면 모든 게 다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점차 부풀어 오르던 중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도희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게…… 뭐야?”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영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도희가 그녀 뒤로 가서 함께 액정을 들여다봤다.
[백도희 엄마, 딸 돈 10억 원 소유권 주장!]
[백도희 모친, 소속사 상대로 고소. 소속사 측 묵묵부답.]
[백도희 모친, 알고 보니 사기 혐의로 고소?]
“……!!”
액정을 확인한 도희 역시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