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기쁘지 않아
탈진할 정도로 울어댄 부현은 윤선의 권유를 받아 귀가했다. 덕분에 도희는 밤새 주완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고요한 새벽, 스탠드 하나 겨우 켜 둔 적요한 병실에 심전도 기계음만 띡, 띠익 울릴 뿐이었다. 도희는 자신의 앞에 곤히 잠든 얼굴로 누워 있는 주완의 손을 의식하듯 꽈악 잡았다.
“빨리 일어나요……. 나한테 할 말 많잖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희의 뺨 위로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도희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아 내곤 주완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도희는 내심 기적과도 같은 움직임을 기대했지만, 주완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도희는 기도하듯 두 손안에 주완의 손을 가두곤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미안해……. 미안해요.”
주완은 대답이 없었다.
“몰라줘서, 혼자 힘들게 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요.”
도희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기운을 차리려고 해 봐도 도희는 그간 주완과 엇갈리며 서로를 미워했던 시간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쓰러질 줄 알았더라면 살아 돌아왔을 때, 하루라도 더 같이 있을 걸, 모진 말은 좀 덜 할 걸,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주완이 깨어나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나 불행하게 하기 싫다며…… 그럼 일어나야지.”
도희는 끝내 침대에 무너지듯 엎드려 버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했다. 사경을 헤매는 그에게 고작 이런 뻔한 소리를 중얼거리는 것 외엔 도희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눈 주변이 따가울 정도로 울어댔지만, 현실이 변하진 않았다. 도희는 겨우 온기만 가진 송장 같은 그의 곁에서 밤새 울다 넋을 놓기를 반복하며 절망적인 밤을 지새웠다.
* * *
다음 날, ‘스위트 셰어 하우스’ 1화가 방영됐다. 일주일 전의 드라마 스페셜, 주말의 예능 출연, 그리고 드디어 방영된 1화 시청률은 무려 18%이었다. 시작부터 높은 시청률 덕에 2화 시청률이 나오기도 전, 촬영을 준비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분위기가 무척 활기찼다.
“2화 시청률 20% 건다!”
“난 22%!”
신이 난 조감독과 촬영 감독이 일부러 사기를 돋우듯 소리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 감독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SBC에서는 한동안 가져 본 적 없다는 독보적인 시청률에 김 감독을 더욱 칭송하는 분위기였다. 김 감독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시청률에 적잖게 기여한 지섭과 도희에게 오늘따라 유난히 친절했다.
“도희 씨, 안색이 안 좋은데 쉬었다 할래요?”
김 감독은 초반에 도희와 신경전을 벌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현장에서 도희를 존중했다. 김 감독의 그런 태도는 배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함께 촬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도희를 대하는 게 달라진 배우들이었지만, 김 감독이 도희를 존중하기 시작하자 도희의 주변으로 3년 전 그때처럼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도희는 파리한 안색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어제 하루 종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던 도희의 컨디션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 오고, 촬영 중간중간 끼어드는 주완의 생각에 울음을 삼키느라 입술을 말아 물기도 했다.
도희의 대답에 김 감독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촬영 감독에게 조명 각도에 대해 상의했다. 잠깐의 틈을 이용해, 도희를 지켜보던 지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요?”
지섭은 촬영장에 나름의 각오를 하고 나왔다. 봄꽃처럼 얼굴이 활짝 핀 도희를 봐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리라 다짐했는데. 주완에게 달려간 것처럼 나갔던 도희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수척한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지섭은 일전에 있던 ‘본드 사건’이 떠올라 그녀의 창백한 낯빛이 무척 신경 쓰였다.
“걱정돼요.”
이전 같았으면 괜찮다고 자신을 안심시켰을 도희는 웬일인지 아무 말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그녀의 눈동자에 빠르게 눈물이 고였다.
“대체 무슨 일…….”
“도희야! 이것 봐!”
지섭이 꼭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로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저 멀리서 나영이 달려와 도희 앞에 불쑥 핸드폰을 들이밀며 끼어들었다.
“읽어 봐! 네 연기력은 언제고 인정받는다니까!”
나영이 보여 준 건 어제 드라마 첫 화가 끝나고 올라온 네티즌들의 반응이었다.
[백도희 연기력 하나는 인정. 빠져든다.]
[언니 때문에 제가 다 설레요ㅜㅜ]
[둘이 케미가 너무 좋은 거 아님? 그냥 사겨라.]
이미 지나간 거추장스러운 사생활은 이젠 아무런 상관없는 듯 사람들은 도희의 연기력만을 칭찬했다. 도희가 평소 보여 줬던 도도한 이미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추 부서졌고, 거기에 친근한 이미지까지 더해져 도희의 드라마 복귀는 그야말로 성공적이었다. 말괄량이 같은 수향의 캐릭터를 처음 도희가 맡았을 때 무리수가 아니냐고 했던 의견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되레 예능에서 보여 줬던 도희 모습과 수향이 닮지 않았냐는 댓글도 간혹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우리 도희 다시 빛 볼 날 있을 줄 알았지!”
나영은 도희 옆에서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 주듯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도희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도희는 되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심장이 서서히 옥죄어 오는 걸 느꼈다.
‘깨어 있었다면…… 연락했을 텐데.’
“너…… 표정이 왜 그래?”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나영이 물었다. 그 모습을 지섭도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기뻐, 기쁜데…….”
기쁘지 않아.
매일 같이 문자를 보내오던 주완에게 이 소식을 알릴 수 없다는 게, 들려줘 봤자 그가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도희를 또 목메게 했다. 생각을 떨치려고 했지만, 떨쳐지지 않았다. 어제 몇 번이고 무너졌던 가슴이 또다시 무너져 내렸다.
도희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도희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놀란 나영이 작게 물었지만,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도희에게 꽂히고 있었다.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참아 내고 있지만, 간혹 새어 나오는 그 울음이 하도 서글퍼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고 쉽사리 묻지도 못한 채 도희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활기찼던 촬영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지섭은 도희의 아픔을 함께 느끼기라도 하듯 미간을 찌푸린 채 애달픈 눈빛으로 도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조감독이 나영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나영 또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뻐서…… 너무 좋아서 그래요…….”
이목이 모이자 이를 느낀 도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도희는 젖은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주책맞죠?”
그제야 사람들은 안심하듯 허탈하게 웃으며 도희에게서 시선을 뗐다.
“난 또!”
“2화 시청률 더 잘 나오면 통곡하겠네!”
깔깔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도희가 숨을 정돈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자 도희는 그제야 억지로 짓고 있던 미소를 단숨에 거뒀다. 지섭은 굳어진 얼굴을 하고 도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영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희를 오랜 시간 곁에서 지켜본 나영이었다. 도희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모습을 처음 본 나영은 도희를 송두리째 흔들 만한 큰일이 있음을 짐작했다.
두 사람이 불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도희는 씩씩하게 눈물을 닦았다.
“……나중에.”
도희의 희미한 미소에 지섭과 나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더 물었다간 애써 괜찮은 척하는 도희가 그대로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
나영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섭은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을 하고 조용히 빈 주먹을 쥐었다.
* * *
며칠째 지방을 배회하던 순자는 후미진 골목에 있는 공중전화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곤 유일하게 외운 도희 번호를 눌렀다. 초조하게 신호를 기다리는데 마침내 도희의 맥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이제 전화를 받네!”
-……어디예요? 이 번호는 또 뭐구?
도희는 지방으로 추측되는 지역 번호가 찍힌 발신자를 보곤 물었다. 순자는 그를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듯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너 당장 계좌로 돈 좀 보내라! 한…… 3억 정도?”
-하,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가냘픈 도희의 목소리에도 순자는 기가 죽는 법 없이 되레 큰소리를 쳤다.
“그건 알 거 없고! 당장 돈 안 보내면 이 엄마 감방 가게 생겼어!”
순자가 그렇게 말했을 때, 도희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도희와 연락이 닿자마자 다급해진 순자는 도희를 무작정 채근했다.
“못 들었어? 네 엄마가 빵에 가게 생겼다니까!”
-……가세요.
“뭐, 뭐?”
도희의 오연한 말투에 순자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도희의 완고한 말이었다.
-가시라구요. 잘못한 게 있으면 벌 받으세요.
순자는 도희의 건방진 말에 기가 찼다. 잘못한 게 있으면 들어가라니!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건데!
“내 말이 장난인 줄 알아?! 이 년아, 내가 당장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야 된다니까!”
-……저 돈 없어요.
“돈이 없기는! 지금 드라마 회차 꽤 지났잖냐! 출연료가 여태 받은 것만 3억은 넘을 텐데 이 엄마한테 그 돈 주는 게 아까워?”
-네, 아까워요.
순자는 갑자기 달라진 도희의 태도에 울화가 치밀었다. 가뜩이나 상황이 급박한데 하필 이럴 때 고집을 부리는 도희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순자는 우선 자신의 상황을 해결하고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네가 그동안 서운한 게 있을 수 있는데, 우선 이 상황은 해결을 해야…….”
-엄마.
처음으로 나긋하게 설명을 하려는 순자의 말을 도희가 가로막았다.
-저 아무것도 못 해 드려요.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도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순자는 도희의 단호한 거절에 부아가 치밀었다.
“뭐라고? 너 다시 말해 봐!”
-다…… 그만두고 싶어요.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도희의 말에 순자는 도희를 설득하려고 했던 마음이 단숨에 접혔다. 순자는 맹렬하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 천륜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 알아?! 내가 이대로 그냥 넘어갈 줄 알고!”
-저 할 만큼 했어요. 엄마도…… 잘 사세요.
“그런다고 네가 내 딸인 게 변해? 내가 소속사에다가 정식으로 고소해서 그 돈 받아 낼…….”
뚝. 순자가 말하는 도중 무참히 전화가 끊겼다. 순자는 끊어진 전화기에 대고 몇 번이나 도희를 부르다가 마침내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만히 있을 줄 알고!”
도희의 갑작스러운 반항에 악에 받친 순자는 씩씩거리며 공중전화 부스를 나왔다. 그리곤 당장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무턱대고 택시를 잡았다.
한편, 병원 복도에서 순자의 전화를 끊은 도희는 쓰러지듯 몸을 벽에 기댔다. 주완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새로운 다짐 때문일까. 결코 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뱉은 기분이 생각보다 덤덤했다.
‘말 안 해! 효주 이거 언론에 뿌릴 거야! 아줌마가 그러라고 주는 거라고 했어!’
딸을 돈으로 보는 사람. 딸을 이용하려고만 드는 사람. 어쩌면 진작 놓았어야 했을 사람을 헛된 희망으로 붙들고 있었던 걸까. 어제부터 하루 종일 울기만 했던 도희는 눈물샘이 말라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더는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도희는 제 옷자락이 구겨지도록 주먹 사이로 옷깃을 말아 쥐고는 기우뚱한 몸을 바로 세웠다.
‘힘들겠지만, 중심 잘 잡아요.’
도희는 어제 윤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주완의 병실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드르륵. 도희가 VIP병실 문을 열었을 때, 주완의 손을 붙들고 있는 부현과 눈이 마주쳤다.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