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53화 (53/71)

53화 두 번째 프러포즈

CH레스토랑은 CH호텔 53층에 있었다. 레스토랑은 아래 전망이 한 눈에 보이도록 한쪽 벽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멀리서 보기에도 야경이 일품이었다. 레스토랑 안엔 손님이 전혀 없었다. 그저 최소 인원의 직원만 몇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도희는 직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잠자코 따라갔다.

직원이 부드럽게 미닫이문을 열고, 룸 안을 확인한 도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나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룸은 꽤 컸는데, 주변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고, 그 속에 단 하나의 테이블까지 촛불로 길이 나 있었다. 길을 따라 장미 꽃잎들이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고, 테이블은 그 끝에 있었다.

도희는 갑자기 부딪친 광경에 떨리는 손을 말아 쥐고 천천히 그 길을 밟으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도희가 테이블 앞에 앉자 직원은 능숙한 솜씨로 의자를 빼 주었다.

도희는 얼떨결에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들을 찬찬히 살폈다. 테이블 한쪽 구석엔 도희와 주완이 연애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그 옆으로 몇 송이의 장미가 날렵하고 기다란 꽃병에 꽂혀 있었다. 도희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때, 불이 꺼지고 벽면에 영상이 커다랗게 재생됐다.

[도희야.]

그곳에서 도희의 화보 사진 한 장과 함께 자막이 흘러나왔다.

[지금 이런 거, 아직 한참 이르다는 걸 알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마음을 보여야 할 것 같아서.]

그다음 보인 건 도희의 뒷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주완의 사진이었다. 포토그래퍼가 찍었던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사진 속의 주완은 도희를 사랑하는 게 명백히 드러나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도희는 사랑에 빠진 주완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글자를 보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난 한 번도 너에 대한 마음이 떠난 적 없었어. 그 이유는…… 네 상처를 보듬은 뒤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얘기하고 싶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네가 믿어 줬으면 해.]

영상과 함께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에 도희의 마음이 울렁였다. 도희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 없어서, 바보같이 널 놓아 버린 걸 후회하는데…… 다시 되돌리는 방법을 아직도 잘 몰라.]

두 사람이 계약 연애를 시작하고 일부러 찍었던 벚꽃을 배경으로 한 커플 사진, 잦은 데이트로 점차 감정이 짙어지던 두 사람의 일상 사진, 연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찍던 사진들이 어느새 하나의 코스처럼 굳어져 버린 수많은 사진들이 시간의 순서대로 영상에 띄워졌다.

[지금은 그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 마음을 얻고 싶을 뿐이야.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유치한 이벤트를 해서라도.]

바다에서 즐겁게 노는 사진, 노을 뒤로 보이는 두 사람의 다정한 실루엣, 함께 이를 닦다가 찍은 사진, 침대 위에서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찍은 사진까지. 도희가 잊고 지냈던 두 사람의 행복했던 추억이 하나둘 영상으로 떠올랐다.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동안 헤맸고, 앞으로도 헤매겠지만…… 기회만 준다면 정말 잘해 주고 싶어. 네 곁에 있고 싶고,]

긴 자막이 한 줄씩 떠오르고, 마지막에 도희가 혼자서 환하게 웃는 사진이 영상 전체에 크게 떠올랐다.

[다시 웃게 해 주고 싶어.]

마지막을 장식한 건 다름 아닌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웃고 있는 웨딩 사진이었다. 예전 신혼집 거실에 걸려 있던, 어느샌가 두 사람을 비웃는다고 여겼던 그 사진이었다.

[네가 아팠던 만큼 잘해 줄게. 못되게 군 만큼 더 노력할게. 더 잘할게. 죽을힘을 다할게.]

“흑…… 으흡……!”

주완에게 직접 듣는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막 한 줄 한 줄에 그의 낮은 목소리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도희는 입을 틀어막고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염치없지만, 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그 자막을 마지막으로 노래가 멈추고 영상이 꺼졌다. 영상이 끝나자마자 느껴지는 인기척에 도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개를 돌린 곳엔 주완이 자신의 넓은 가슴을 다 채울 만큼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 보이는 그의 이목구비는 무척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도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이게…… 무슨…….”

“프러포즈야. 두 번째라 미안하고, 와 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한 주완은 평소와 다름없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도희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느럭느럭 손을 뻗어 그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주완이 꽃다발 속에 있던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상자를 보자마자 도희는 그게 무엇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손 좀 줄래.”

애써 수줍음을 감추고 말한 주완이 도희의 왼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도희는 오른손으로 꽃다발을 안은 채 자연스레 주완에게 손을 내어 주었다. 땀에 젖은 손이 도희의 손을 꼭 쥐었다. 곧 도희의 왼손 약지에 무언가 끼워졌다.

손바닥 전체에 주완의 따스한 체온이 전해졌다. 반지를 끼우고도 떨어질 줄 모르는 주완의 온기에 도희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던 무언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 도희는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물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묵묵히 도희를 내려다보던 주완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뺨 위의 눈물을 다정하게 쓸어 담았다.

“자꾸 울리네.”

“왜…….”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주완은 도희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얹곤, 천천히 도희를 당겼다. 주완의 품에 꼭 들어온 도희는 끝내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 3년간 꾹꾹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오며 그간 품고 살았던 증오들이 그의 체온에 하나둘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거면 왜…… 왜 떠났어요, 왜……!”

도희는 힘없는 주먹으로 주완의 가슴을 툭툭 내리쳤다. 주완은 그런 도희를 놓칠세라 힘주어 끌어안은 채 묵직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주완은 도희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다 말고, 그녀를 제게서 조금 떼어 내더니 그녀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 주었다. 드디어 젖은 얼굴을 한 도희와 주완의 시선이 부딪치고, 주완이 도희의 뺨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쪽.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엔 잠깐 입술을 붙였다가 떨어트리더니 주완은 곧 감싸 쥔 도희의 뺨을 재차 끌어당겼다. 쪽. 다시 두 사람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여전히 눈을 멀뚱히 뜨고 있는 도희를 보며 주완이 나직이 말했다.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주완이 도희의 입술을 머금었다. 바로 제 앞에서 입술을 부딪치고 있는 주완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도희는 그제야 눈을 질끈 감았다.

주완은 조심스럽고 느릿하게 도희의 입술을 뭉갰다. 정열이라곤 거리가 먼 움직임으로 입을 살짝 벌려 도희의 입술을 할짝이다가 당기길 반복했다. 도희는 몇 초간 이어지는 다정한 키스에 저도 모르게 주완의 옷깃을 꼭 여며 쥐었다.

얼마 가지 않아 도희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그 틈 사이로 주완이 더운 숨을 뱉어 냈다. 그러더니 곧 그의 혀가 과감하게 도희의 입술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으흡……!”

열기가 고인 그의 혀가 달콤하게 도희의 입안을 배회했다. 도희는 꼼짝없이 그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그를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닿은 그의 입술에 도희는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잊었던 감각이 되살아나고, 그와 나누었던 수많은 밤이 떠오르며 전율이 흘렀다. 숨이 모자란 도희는 입술이 떨어지는 틈에 어수룩하게 숨을 뱉었는데, 주완은 전혀 서두르는 법 없이 여유롭게 입을 맞춰 왔다. 중간중간 고개를 틀고, 각도를 바꿔가면서도 주완의 입맞춤엔 조급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간의 빈 간극을 여실히 느끼는 도희의 몸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진 도희가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지만, 주완은 그녀의 뺨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다정한 키스를 계속 퍼부었다. 촉. 촉. 타액이 엉키는 소리가 룸 안에 차분히 번져 나갔다.

“음식 준비…… 헉, 죄송합니다!”

주완과 도희의 열기로 주변의 공기까지 데워질 때쯤, 룸으로 들어온 직원이 황급히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주완은 그제야 아쉬운 듯 도희에게서 떨어졌다.

“하아.”

도희는 열꽃이 피어난 얼굴로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부드럽지만 빈틈없던 키스가 뚝 끊기자마자 두 사람은 각자 숨을 몰아쉬기에 바빴다.

“사랑해, 도희야.”

직원에게 민망한 광경을 들켜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도희와 달리 주완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주완과의 키스, 그리고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느껴지는 그의 고백에 도희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저릿할 만큼 기쁘고 황홀했다.

그때, 바깥이 무척 소란스러워졌다. 두 사람의 키스를 들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도희는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 일단 앉아요.”

“대답 안 해 줄 거야?”

그의 거침없고 직설적인 질문에 도희가 어쩔 줄 몰라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도희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난…….”

드르륵! 도희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던 찰나에 거칠게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상처받은 어린 양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효주의 모습이 보였다.

“이게…… 이게 다 뭐야?”

효주는 주변을 장식한 촛불과 장미꽃,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이내 경멸에 찬 눈빛으로 도희를 향해 들고 있던 핸드백을 집어 던졌다.

“장효주!”

효주가 던진 핸드백은 도희의 어깨를 맞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를 미처 말리지 못한 주완이 황급히 도희를 제 뒤로 숨겼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효주의 돌발 행동에 화가 난 주완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효주는 움찔했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난 효주는 몸을 파르르 떨면서 소리쳤다.

“효주가 불쌍해서 봐줬는데! 언니 아프다고 해서! 은지섭이랑 잘돼 간다길래 못된 아줌마랑 거래한 것도 덮으려고 했는데!”

도희는 효주의 말을 듣자마자 순자가 병실에서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정정당당한 대가야! 정보를 좀 팔았다!’

순자의 찜찜한 말이 떠오른 도희는 주완의 등 뒤에서 튀어나와 효주를 마주 봤다. 효주는 갑자기 제 앞에 단호한 얼굴로 선 도희를 보곤 멈칫했다.

“대체…… 무슨 거래를 한 거예요?”

두려움 없이 효주 앞에 선 도희가 날카롭게 묻자 효주가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이게 무슨 소리야. 장효주 너 어머님 만났어? 왜.”

“오빤 효주 건데…… 저긴 효주 자린데……!”

어느새 한 편이 된 두 사람이 효주를 다그치자 그녀는 배신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 효주는 도희의 손에 끼워져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했다. 저 반지는 분명 자신에게 와야 할 반지였다. 효주는 악에 받쳐 말했다.

“말 안 해! 효주 이거 언론에 뿌릴 거야! 아줌마가 그러라고 주는 거라고 했어!”

“……뭐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희의 머리가 새하얗게 질렸다. 정보가 무엇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도희는 효주의 뒷말이 귓가에 윙윙 울렸다.

언론에 뿌리라고, 그러라고 주는 거라고?

“효주 잘못 아니야! 약혼자 뺏은 이 언니가 더 나쁜 거잖아!”

연예인인 딸의 정보를 파는 것도 모자라 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데 방법까지 친히 알려 줬다니.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엄마가 맞긴 한 걸까? 도희는 더는 효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소리치는 효주의 말들은 물속에 잠겨 있을 때처럼 어눌하게 들려왔다.

“이 언니도 효주처럼 똑같이 괴로워야 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초점이 흐릿했다. 도희가 충격에 잠시 비틀거리자, 주완이 그녀를 빠르게 붙들었다.

“……도희야.”

그 순간 주완은 갑작스레 관자놀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곤 인상을 찡그렸다. 하마터면 도희를 놓칠 뻔했지만, 주완은 도희의 팔을 쥔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파혼도 오빠 멋대로 하더니…… 효주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효주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주완의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통증을 겨우 참아 내며 주완이 도희를 불렀지만, 도희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순간, 주완의 시야가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 주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창백한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휘저었지만, 시야가 빙글 돌았다.

“도희…….”

풀썩! 도희를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작아지나 싶더니 주완의 커다란 몸이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주완 씨?”

“오빠!!”

순식간에 식은땀을 흘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주완을 보며 도희는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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