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파혼
[내일 CH레스토랑에서 9시. 스케줄 끝나고 보자. 올 때까지 기다릴게.]
어젯밤 받은 주완의 문자. 도희는 아직까지도 그 문자에 답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심장이 철렁했다. 마음 같아선 약속 장소에 나가고 싶었지만, 나영의 만류에 혼란이 더해졌다.
‘한 번 그랬던 놈이 또 안 그럴 거란 보장 있어? 무슨 사정이든 남편이면 그러면 안 됐던 거야. 그런 식으로 널 떠나면 안 됐어.’
나영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음과는 별개로 도희는 또다시 두려워졌다. 이러지도 저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희는 밤새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만나자고 한 오늘까지도 도희는 그가 말한 약속 장소에 나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섭의 고백은 무거웠으나, 도희에겐 전혀 다른 무게였다. 지섭의 진지한 고백에도 도희는 지섭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미안해요.”
도희가 대답하길 머뭇거리자, 지섭이 말을 잘랐다.
“안 그래도 나 때문에 별의별 일을 다 겪었는데. 괜히 더 복잡하게 한 것 같아서.”
고민스러운 도희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도희가 미안한 마음에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을 고심하고 있는데, 지섭이 마저 말을 이었다.
“조급해서 그랬어요. 자꾸 흔들리는 것 같길래. 혼란스럽게 했다면 정말 미안.”
착잡한 얼굴로 말하는 지섭의 낯빛에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면목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지섭은 별안간 뒷머리를 헝클었다.
지섭의 풀 죽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도희는 죄책감이 일었다. 자신에게 이토록 마음 써 주는 지섭을 괴롭히고 싶진 않지만, 주완의 문자 하나에 온 신경을 빼앗긴 도희는 지섭에게 희망을 안겨 줄 수 없었다. 도희는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라, 아주 간단한 대답을 했다.
“나도 미안해.”
“……!”
도희의 사과에 지섭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도희는 흔들리는 지섭의 눈동자를 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혼란스럽지 않아. 난…… 괜찮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좀 더 명확한 도희의 거절에 지섭이 마른세수를 했다. 도희는 그런 지섭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신경 안 쓰는 거…… 그게 안 되니까 이용이라도 하라고 했던 거에요.”
지섭이 미간을 찌푸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나한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회가 오질 않으니까.”
“……지섭아.”
“지금 좀 힘든데. 이게 결국 당신이 나한테 오는 과정이라면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
지섭은 윤활유처럼 부드럽고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동안은 내 자리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걸 해 줄게요.”
생각보다 지섭의 고백은 농도 짙고, 깊숙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도희는 여러 대의 카메라 가운데 앉아 욕조 한가운데 몸을 담그고 있었다. 도희는 저 멀리서 다음 신을 준비하고 있는 지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섭은 도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었다. 도희는 황급히 그의 눈을 피했다.
오늘 촬영은 수향이 욕조에서 넘어지고, 놀란 지환이 그런 수향을 번쩍 안아 들고 거실로 나와 치료해 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장면이 있을 땐 늘 질투하곤 했는데.’
도희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생각의 끝이 자연스레 주완 쪽으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베드 신이라고?’
‘그냥 말 그대로 침대에 실크 잠옷 입고 함께 누워 있는 게 다예요.’
‘그래도 싫어. 내가 당장 그 제작사를 사서…….’
‘주완 씨! 내가 하는 일은 터치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랬지. 하, 연예인 남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그럼요. 재벌 아내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잖아요?’
‘풋, 그건 그래. 그래서 천생연분인가?’
주완은 살이 다 비치는 옷차림도 싫어했고, 남자와의 작은 스킨십이 들어간 촬영도 모두 싫어했다.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었는데…….
“컷! 오케이!”
도희는 주완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다 말고 감독이 컷을 외치는 소리에 번뜩 깨어났다.
넘어지는 장면은 세 번 만에 넘어갔다. 다음은 소리를 듣고 문을 벌컥 연 지환이 수향을 번쩍 안아 드는 장면이었다. 지환은 수향이 넘어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달 난 얼굴로 그녀의 안위를 살핀다. 그러더니 곧 수향의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컷! 좋아요, 들어 올린 장면부터 다시 갑니다!”
김 감독의 명령에 지섭은 도희를 다시 들어 올렸다. 도희 역시 지섭의 목에 자연스레 팔을 감았다. 지섭은 나체를 상상하게 하는 도희의 매혹적인 목선과 수건 아래 보이는 도희의 가슴골을 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자꾸 아래로 향해서 흘긋 도희 눈치를 봤는데, 도희는 지섭의 품에 안긴 채 애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섭은 그런 도희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봤다.
한편,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는 걸 모르는 스태프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도희와 지섭 사이에 풍기는 어색한 기류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 * *
촬영이 모두 끝나고 정리할 때, 갑자기 촬영장 분위기가 소란스러워졌다. 스태프들은 한두 명씩 핸드폰을 보며 저마다 핸드폰 화면과 도희를 번갈아 보며 눈치 보기 바빴다.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도희는 다수의 수상한 눈초리에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때마침 나영이 다가오더니 심각한 얼굴로 도희에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도희야.”
도희는 나영이 내민 핸드폰을 자연스레 손에 쥐었다. 그리곤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하마터면 핸드폰을 그대로 떨어트릴 뻔했다.
[CH그룹 차남 차주완, J그룹 외동딸과 파혼! 이유는?]
“이게…… 뭐야?”
“너…… 모르는 일이야?”
나영의 질문에도 도희는 아무런 대답하지 못한 채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클릭했다. 두 사람의 파혼 이유는 성격 차이였다. 파혼 기사를 단독으로 보고한 신문사에서는 주완이 직접 입을 열었고, 이에 대해 J그룹에선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겠다고 전했다.
도희는 주완의 기사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곤 어젯밤 주완에게 받았던 문자를 떠올렸다.
‘혹시 오늘 만나자는 게 이것 때문인가?’
파혼 기사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기사 내용을 다 읽었을 때 도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대감이 차오르는 걸 생생히 느꼈다. 누군가의 파혼으로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불안정했던 감정이 진정되고, 심장이 간질거렸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주완의 진심이 다시금 수면 위로 완전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때, 라일이 사근사근한 얼굴로 다가왔다.
“선배님, 좋으시겠어요!”
라일은 스태프들이 다 들을 수 있게끔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스태프들은 촬영 장비들을 정리하다 말고 두 사람을 주목했다.
“……뭐가?”
‘본드 사건’에는 라일이 깊게 관여한 증거가 일절 없기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파혼 기사요. 제가 본 게 있거든요.”
경찰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라일은 도희에게 더 독기를 품었다. 도희가 재기한 뒤로 제대로 풀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도희만 아니었다면 라일이 경찰서에서 자세한 조사를 받지 않아도 됐었다. 백도희가 이상한 추가 증언을 하는 바람에 라일은 형사의 부름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형사는 라일을 의심하는 눈빛으로 당시 상황을 취조하듯 물었고, 라일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할 때도 그 대답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연예계 생활 중 이런 굴욕은 없었다. 이게 다 백도희 때문이었다.
“뭘 봤는데?”
라일은 배알이 꼴려 견딜 수가 없었다. 제 돈을 받은 김 감독도 더는 도희에게 막 대하지 않았고, 처음엔 공백기가 길다며 도희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배우들까지 모두 도희의 연기 실력을 인정하며 친해지길 원했다. 게다가 촉망받는 라이징 스타는 물론이고 아직까지 이혼한 재벌의 보살핌을 받지 않던가.
“전에 길거리에서 재킷 덮어 주는 거 봤어요. 그거 차주완 씨 맞죠? 어쩐지 분위기가…….”
라일이 눈웃음을 치며 속삭이는 척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가까이에 있던 스태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를 느낀 도희가 얼른 라일의 말을 가로챘다.
“잘못 봤겠지.”
그렇게 말하는 도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도희는 내레이션 미팅이 끝나고 자신을 쫓아온 주완의 모습을 단숨에 떠올렸다. 라일은 그런 도희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요? 그때 선배님 주변에 사람 몰려서…….”
“재밌는 얘기 해요?”
라일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지섭이 어디선가 나타나 불쑥 끼어들었다. 지섭은 천진난만한 미소로 두 여자 사이의 긴장감을 단숨에 깨 버렸다. 그리곤 주위로 몰려든 스태프들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얘기 들었어요?”
지섭의 해맑은 질문에 몰래 두 사람 얘기를 엿듣던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라일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지섭 씬 다 아는구나?”
“선배,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지섭은 마치 라일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라일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얼굴을 들이밀며 라일의 안색을 살피는 탓에 라일은 당황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뭐, 뭐가요.”
“아, 잘못 봤다. 화장 잘 먹었네요.”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는 지섭을 보며 라일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참 나.”
라일은 지섭의 아부가 도희를 위한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섭이 나타난 이상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에게서 성큼성큼 멀어졌다.
라일이 사라지자 지섭의 표정이 다시 엄숙해졌다. 마치 조금 전 촬영이 끝난 배우처럼 지섭은 조금 전 활기찬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지섭은 어느새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도희를 보며 물었다. 나영은 도희에게 얼른 들어가자고 했지만 도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묵묵부답이었다.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지섭의 그 말에 도희가 눈을 번뜩였다. 넋을 놓고 있던 도희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도희는 지섭을 바라봤다. 마치 바라 왔던 말을 들었다는 듯 도희의 눈이 반짝거렸다. 투명한 물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는 도희의 눈동자에 지섭의 심장이 조여 왔지만, 그는 최대한 덤덤하게 진심을 다해 말을 이었다.
“선배가 어떤 인생을 살든…… 어차피 사람들은 잊어요.”
“…….”
“아무리 관심이 많아도 결국 남이고, 다들 각자 인생이 가장 중요하니까.”
지섭의 말에 나영이 불안한 듯 지섭을 막으려고 그의 앞에 섰다. 하지만 지섭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영을 슬쩍 비켜서곤 말을 이었다.
“당신 못 잊잖아, 그 사람.”
“……!!”
“그냥 가.”
지섭의 말을 듣자마자 도희의 머리가 맑게 개었다. 그의 말은 도희에게 원동력을 불어넣어 준 듯 도희를 벌떡 일으켰다. 주완이 없는 동안 아팠던 지난 3년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고, 주완이 나타나고 혼란스러웠던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이 차곡차곡 떠올랐다.
그렇게 아프고, 그렇게 발버둥을 쳤는데. 도희의 마음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당신 못 잊잖아, 그 사람.’
지섭의 말이 도희의 귓가를 윙윙 울렸다. 도희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출구를 향해 섰다. 나영은 초조한 얼굴로 도희의 옷깃을 잡았지만, 곧 총명해진 도희의 눈빛을 보곤 이내 그마저도 손을 놓았다.
“나영아, 갔다 와서 얘기하자.”
시계를 보니 시각은 주완이 말했던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도희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지섭아, 고마워.”
착잡한 얼굴의 지섭과 또렷하게 눈을 맞춘 도희는 주완이 기다리고 있을 그곳으로 거침없이 달려갔다.
* * *
지섭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랍을 뒤졌다. 침대 곁 가장 첫 번째 서랍에 있던 파파라치 사진을 들여다본 지섭은 몇 초간 그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입술을 짓이기며 그 사진을 단숨에 찢어 버렸다. 사진은 갈기갈기 찢겨 바닥에 흩어졌다. 찢어진 조각들을 바라보며 지섭은 자신의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도희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좋냐.”
이혼해 버렸으면서. 한 번 헤어져 놓고도,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는데도.
지섭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눈동자로 침대에 머리를 뉘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어도, 온 신경이 다른 사람에게 쏠려 있는 걸 빤히 알면서도 변하지 않은 마음을 끌어안고 있는 건 지섭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누굴.”
지섭은 자조적인 실소를 터트리며 이마에 제 팔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