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좀 설렜나? (2)
효주는 울며불며 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효주에게 전화를 받자마자 부현은 노발대발하며 주완을 찾았다. 그가 아직 회사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부현은 망설임 없이 본부장실을 찾아갔다.
J그룹과의 약혼이 깨지면 주가가 폭락하는 건 물론 회사 내 분위기가 무척 소란스러워질 게 뻔했다. 부현은 평소와 달리 고상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종종걸음으로 본부장실까지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정 비서는 부현을 보았지만 그녀를 말리지도 못했다.
“차주완!”
부현의 우렁찬 목소리가 본부장실을 가득 메웠다. 주완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현을 맞이했다.
“오셨어요?”
“너 지금 제정신이니? 내가 효주 전화 받고 얼마나……!!”
부현이 뒷목을 잡고 비틀거리다 말고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부현이 걱정됐는지 주완이 한풀 꺾인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일방적으로 기사 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이제 J그룹이랑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죄송합니다. 일에 지장 없도록 최대한 가서 부탁드려 보겠습니다.”
“상의도 없이 기사 내면 그쪽에서 네 얼굴이나 봐 줄 것 같니? 네 아버지는 또 어떻구! 이 일을 가만히 넘기실 것 같아? 주승이가 딴마음이라도 먹으면 넌 금세……!”
“저 형이랑 경쟁 안 합니다. 형도 그럴 생각 없어요.”
주완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부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지금 뭘 잘했다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점점 까랑까랑해지는 부현의 목소리에 주완이 고통스러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형도…… 어머니 자식이잖아요. 자식처럼 품어 주세요. 설사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한들 가족이잖아요.”
“너, 너, 이젠 엄마를 가르치려고 들어!”
부현은 복장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퉁퉁 내리쳤다. 부현은 배신감이 드는 얼굴로 주완을 쳐다봤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주완은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약해졌지만, 아직 다 못한 이야기를 마저 덤덤하게 뱉었다.
“그리고 저…… 도희랑 다시 시작할 겁니다. 제가 해결할게요. 효주랑 잘 얘기했어요.”
“그런 애가 울면서 나한테 전화를 해?!”
“도희가…….”
주완이 말꼬리를 흐렸다. 부현은 일을 할 땐 이성적인 것 같지만, 은근히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주완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에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 얘기만이 부현을 설득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도희가 제 아이를 유산했습니다.”
“……뭐?”
예상대로 부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주완은 가슴 아픈 기억을 꺼내듯 고통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때문이에요. 이혼하고, 기자들한테 쫓기다가 그렇게 된 거니 제 책임입니다.”
“어떻게……. 걔가 그래? 거짓말이겠지! 그 요망한 게 분명……!”
“어머니.”
부현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말했지만, 주완은 그런 부현을 단호하게 저지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 선택이 틀렸어요. 병을 숨기고 그렇게 떠나는 게 아니었어요. 3년 전 이혼은 실수였습니다.”
주완은 최대한 부현이 놀라지 않도록 착잡하게 말했다. 가끔 목이 메고, 가슴으로부터 울컥 무언가 치미는 것 같기도 했지만, 끝내 참아 냈다.
“도와주세요. 같은 실수 하지 않도록, 저…… 막지 마세요.”
주완은 울지 않았지만, 부현은 주완의 심정이 얼마나 지옥에 떨어져 있는지 느껴졌다. 부현은 그런 주완을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을 참아 내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목울대가 묵직하게 아려 왔다.
부현은 아들인 주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확신이 들면 밀고 나가는 아이, 틀려 본 적 없는 인생에서 실패와 좌절을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아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 실수가 생명을 잃은 거라니. 부현은 주완이 너무나도 가엾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짊어질 죄책감을 덜어 주고 싶었다.
“아니야. 그거 네 잘못 아니다. 죄책감 때문에 네가 그 애 옆에 있을 필요는 없어. 사고였잖니.”
부현은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완의 표정은 여전히 음울했다.
“죄책감 때문에 옆에 있으려는 건 아니에요. 저 도희 사랑합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요.”
주완이 도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부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현은 도희와 주완 사이에 그런 아픔이 있다면 더더욱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현은 주완이 괴로운 길을 가는 걸 원치 않았다.
“사람이라면 가끔 실수도 하고, 제 감정 모를 때도 있는 거야. 동정이랑 사랑이랑 착각하기도 하고. 네가 그 여자랑 다시 만나면, 서로를 보면서 죄책감 안고 살 거니? 이대로 갈라서서 서로 잊고 사는 게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좋지 않겠니.”
부현은 최대한 주완을 설득하려고 애쓰며 상냥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주완은 미동조차 없었다.
“3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저 도희 포기 못 해요. 다 해 봤는데…… 안 돼요.”
“주완아.”
“어머니 제발, 그냥……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시면 안 돼요?”
주완의 간절한 애원에 부현이 입을 닫았다. 부현은 아들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주완에게 서운하기만 했다. 부현의 말은 더 이상 주완에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네가 엄마한테 이렇게 대드는 거 다 그 애랑 관련될 때마다 그래! 엄마가 그럴 때마다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어머니.”
“다 널 위해서 그런 거잖니! 그 애가 너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니! 너 힘들 때 간호를 해 주길 했어, 아픈 걸 알아주길 했어!”
“그건 제가 숨겨서…….”
주완은 말을 하다 말고 머리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지만 부현은 울분이 터졌는지 말을 계속 이었다.
“엄마는 그 애가 싫어! 이렇게 싫다는 데도 끝까지 너 그럴 거야?”
“어머니, 제발요…….”
주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이 없어진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부현은 울먹이며 소리쳤다. 부현의 고조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주완의 관자놀이 혈관이 터질 것처럼 아파 왔다. 주완은 이대로는 더는 부현과 얘기를 나누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네가 걜 안 만났을 때 모습이 그리워. 엄마한테 얼마나 잘하고 예뻤…… 주완아?”
부현은 돌연 벌떡 일어난 주완을 올려다봤다. 그는 어느 때보다 결연하고 냉랭한 얼굴로 부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 저 이제 못 말리세요. 그만 가세요.”
주완의 단호함에 부현이 또다시 울먹였지만, 이번엔 주완도 물러서지 않았다. 부현이 나가길 바란다는 듯 본부장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부현은 밖에 있던 정 비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어떻게…….”
그렇게 말한 부현은 끝내 주완을 흘겨보다 말고 본부장실을 나갔다. 부현이 나가자마자 주완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주완은 문 바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식은땀을 흘리며 그대로 머리에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 * *
주말에 방송된 ‘달리자, 달리자’는 다음 날이 되도록 검색어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이미 방송 직후에 만들어진 도희의 발끈하는 순간이나 지섭이 까나리 액젓을 대신 먹는 순간은 짤로 생성되어 널리 퍼지는 중이었다. 예능 프로그램 촬영 이후 소문이 퍼졌던 ‘스위트 셰어 하우스’ 촬영 팀 또한 지섭과 도희를 보는 시선이 새롭게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은지섭이 너 바라보는 눈빛이 솔직히 보통이 아니긴 했어. 잘 생각해 봐. 원래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거라니까?”
“그게 됐으면 벌써 시도했지.”
“무슨! 넌 시도도 안 했지! 괜찮은 사람이 대시해도 걷어차기 바빴잖아. 이전이야 배신당할까 봐 무서워서 그렇다고 치고! 지금 은지섭은 아니잖아? 고등학교 후배라며. 그럼 예전부터 너 좋아했네! 참사랑이고!”
“이 드라마 하기 전까지 만난 적도 없어.”
“은지섭은 있다며! 열애설도 사실은 은지섭이 원했던 거 아니야? 너랑 드라마 같이 하고 싶었는데 마침 네가 딱-.”
“나영아. 너 소설 써도 되겠다.”
나영은 도희에게 끊임없이 지섭에 대해 어필하는 중이었다. 일전에 소문도 있고, 차라리 지섭과 연애하라는 나영의 말 때문인지 도희는 주변 시선들이 더욱 의식되었다. 도희가 한숨을 쉬며 나영을 막아 봤지만, 나영은 도희의 생각이 바뀔 때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도희는 목욕 신을 위해 사방이 막힌 천막 아래서 메이크업을 받는 중이었다. 커다란 타월을 가슴께에 두르고, 그 위로는 윤기가 흐르도록 바디 메이크업 또한 받았다. 메이크업 팀장은 망설임 없는 손짓으로 도희의 쇄골과 목선을 반들거리도록 치장했다. 그때, 천막 뒤에서 지섭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랑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평소와 달리 딱딱하고 진지한 말투였다. 도희는 메이크업 팀을 둘러보고 곤란한 듯 턱을 매만졌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되어 있는데 또 다른 루머를 퍼트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럼요! 잠시만요!”
그때, 나선 건 나영이었다. 도희가 고민하는 걸 눈치챈 나영은 황급히 자리를 피해 주자며 메이크업 팀을 밖으로 떠밀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영의 행동에 그녀를 말리고 싶었으나, 워낙 요란스럽게 사람들을 끌고 나가는 터라 도희는 결국 한마디도 못 했다. 일 분만에 메이크업 팀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막을 나갔다. 도희는 하는 수 없이 훤히 드러낸 어깨 위에 재킷 하나를 걸치고 말했다.
“들어와.”
지섭은 천막 문을 열자마자 발을 멈칫했다. 젖은 머리를 말아 올린 채 수건을 뒤집어쓰고, 재킷을 덮긴 했지만 가슴 위를 아슬아슬하게 수건으로 가린 모습이 지섭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자극적이었다. 태연한 도희와 달리 순식간에 귓불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지섭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어제 예능 잘 봤어요?”
설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지섭은 생각보다 저돌적이었다. 천막 뒤에도 듣는 귀가 많을 것 같아 도희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지섭은 도희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는 듯싶더니, 이내 가까이 와서는 고개를 훅 돌렸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슴골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내 눈빛 어땠어요?”
지섭은 특유의 말간 미소를 지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그러더니 끝내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지섭이 도희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도희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는 지섭의 눈빛에 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레게 잘 나왔던데. 좀 설렜나?”
도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섭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난 후에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안함과 부담감뿐이었다. 정작 도희의 신경을 빼앗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일 CH레스토랑에서 9시. 스케줄 끝나고 보자.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건 바로 만나자는 주완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