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50화 (50/71)

50화 얽힌 마음 (2)

오프닝은 이렇다 할 만한 내용이 없었다. 출연진이 모두 옹기종기 모여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지섭의 시선은 도희를 쫓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그다음, 게임이 시작되고 나서부터였다.

[안 봐줄 거예요, 선배님.]

[누가 봐 달래?]

도희 딴엔 욱해서 한 말이었는데, 도희의 말소리 자막엔 무려 하트가 두 개나 붙어 있었다. 게다가 장난을 치듯 짓궂게 눈꼬리가 휘어진 도희의 눈빛은 애교 어린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다. 도희는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비치지 않길 바라며 숨죽여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옆에 있던 나영도 무언가 걱정이 되는지 수다는커녕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한테 거짓말 안 통하지. 저 선배님 팬이라니까요.]

능글스럽게 웃으며 도희를 놀리는 지섭,

[씨이. 나 분량 안 나오면 책임져.]

지섭을 분한 듯 노려보다가 삐진 듯 홱 돌아서 갈 길 가는 도희. 그런 도희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지섭의 모습은 마치 썸을 타는 사람들처럼 풋풋하게 보였다. 게다가 둘이 그런 얘기를 주고받을 때마다 [꽁냥꽁냥♥] [티격태격♥]이란 사랑스러운 자막들이 둥둥 떠다녀, 두 사람의 분위기를 영락없는 커플로 만들어 버렸다.

자막의 모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찬원의 이름표를 떼려고 도희가 그에게 바짝 붙어 있을 때, 뒤에 서 있던 지섭의 일그러진 표정 아래엔 ‘질투 폭발!’이란 자막이 대놓고 강조됐다. 지섭은 표정이 어두워진 즉시 찬원에게 달려가 두 사람을 떼어 놓고,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로 [엄청 필사적이네요.]라며 토라진 듯 말한다.

‘설마 저거…… 질투야?’

촬영 당시엔 그가 질투한다고 전혀 느끼지 못했던 도희는 자못 당황스러웠다. 제삼자로서 영상을 봤을 때 달리 느껴지는 지섭의 모습은 상당히 이질감 있게 느껴졌다.

[뭐야, 봐준 거야?]

[아니에요.]

지섭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투하는 한 소년 같았다.

[아, 이게 아닌데.]

탈락자 대기실로 향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지섭의 아래엔 ‘복수당해서 분한’이라는 자막이 덧붙여졌지만, 그 누구도 지섭의 마음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붉어진 귓불과 발그레해진 뺨, 얼굴색과 어울리는 수줍고 서툰 지섭의 표정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한 남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게다가 까나리 액젓을 대신 마셔 주는 장면은 그야말로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웬만한 드라마보다 더 잘 만들었네.”

나영이 맥주를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예능PD는 최대한 도희가 욕먹지 않을 수 있도록 자극적인 기사를 무더기로 배출하며 [얼마 전 본드 사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촬영에 임한 백도희]라는 훈훈한 자막까지 넣어 주었다. 그렇게 프로그램이 다 끝났을 때, 나영은 힐긋 도희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자, 잘 나왔네! 분량도 많이 뺐고! 우리 도희 편집 하나도 안 당했다!”

“…….”

이전이라면 소문부터 걱정했을 도희지만, 도희의 표정이 어두운 건 소문 때문이 아니었다. 우습게도 예능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도희 마음에 걸린 건 다름 아닌 차주완이었다.

‘주완 씨가 이걸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오해받고 싶지 않다. 그게 현재 도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우습게도 현재 아무런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희는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에 놀라며 핸드폰을 들었다. 혹시 또 주완에게 연락이 와 있나 확인하려던 찰나, 나영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실시간 반응 보게? 어디 봐.”

나영은 당연히 도희가 실시간 반응을 보려고 하는 줄 아는 듯했다. 도희는 하는 수 없이 나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완의 문자를 숨기고 인터넷 창을 켰다.

[저 정도면 찐 아니냐?]

[백도희 언니 사랑스럽다ㅠㅠ]

[모르긴 몰라도 은지섭 마음은 확실한 듯.]

[ㄴㄴ. 예능에서 러브 라인 만들어서 엮는 건 늘 있는 패턴임.]

[예능 프로 너무하네. 어그로 끌려고 별짓 다 하네. 애초에 자막이 선동ㅇㅇ]

[세상에. 이 커플 너무 응원한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도희와 지섭의 ‘진짜’ 관계, 도희의 ‘진짜’ 모습. 두 사람 관계에 관해선 반응이 둘로 갈렸다. 예능 프로그램도 대본 있는 거 모르냐며 저것도 다 계획된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눈빛만은 속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예능 프로그램엔 잘 나오지 않았던 도희라, 처음 보는 털털한 모습에 [사랑스럽다, 의외로 인간미 넘친다]는 등 호의적인 댓글이 있는 반면 지섭을 편하게 대하는 모습을 더러 ‘끼 부린다’는 하는 악플도 있었다.

“그래 봤자 예능이야! 무슨 소문 나면 컨셉이라고 우기면 돼.”

나영은 핸드폰을 보며 난처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는 도희를 위로했다. 그러나 여론은 그렇게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는 걸 몸소 느낀 도희는 나영의 말에 굳어진 얼굴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걱정되는 일도 있었고.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도희는 말이 없었다. 이미 도희와 나영 앞에 빈 맥주는 6캔이나 놓여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엔 도희와 지섭의 친밀함을 ‘케미’라고 잘 포장하며 마무리했다. 시청률을 올리되 다른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두 사람을 교묘하게 엮느라고 얼마나 고생했을지 예능PD의 고뇌가 절로 느껴지는 편집이었다.

“저 인간들 똑똑하네.”

나영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은지섭과 백도희가 검색어에 오르는 건 물론이거니와 ‘달리자, 달리자’ 예능 프로그램도 덩달아 순위를 차지했다. 시청률은 현재 집계 중이라고 떴지만, 실시간 올라오는 반응으로 보아 꽤 높은 시청률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도희는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것처럼 허둥거리며 문자를 확인했다.

[예능 잘 봤어. 사랑스럽더라.]

주완이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 봤을 것 같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연락을 주자 도희는 내심 기뻤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으며 안도의 한숨의 내뱉을 때, 또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사람들 반응은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다는 건…… 자기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가?

싱숭생숭해진 도희가 문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때, 나영이 불쑥 핸드폰 액정을 훔쳐봤다. 도희는 뒤늦게 핸드폰을 숨겨 봤지만, 이미 나영의 눈썹이 팽팽히 모아진 뒤였다.

“설마 그 인간이야?”

“…….”

“백도희! 세월 좀 지났다고 그새 잊었어? 그 인간이 어떻게 떠났는지 다 잊은 거야?”

“……나영아.”

“어쩌려고 그래! 설마 흔들리기라도 해?”

잘 모르겠어.

도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꾹 참았다. 이제는 잘 모르겠는 것도, 잘 모르는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매일같이 오는 주완의 문자를 기다리게 되고, 그가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 이전엔 느껴 본 적 없는 그의 간절함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보상 심리인가 싶으면서도 유산 사실을 알게 된 그의 넓은 품에 안길 땐, 사실은 바라 왔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정감이 들고 벅차오르기도 했다. 원망스러운 동시에 그의 위로가 그리웠다. 그의 따스한 말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과거는 바뀌지 않지만, 상처가 아물어지는 건 아니지만, 자꾸 그를 옆에 두고 싶었다. 도희는 그런 자신의 솔직한 마음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영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나영아.”

그런 생각을 하자, 겨우 꺼낸 말끝이 떨려 왔다. 나영은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도희를 보며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얼굴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안 돼.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잘 모르겠어, 나영아……. 다 모르겠어.”

내가 정말 모르는 걸까. 정해져 있는 답을 피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도희의 앞길은 뿌옇고 흐릿했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온다고 했다. 두려움과 막막함은 막연한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또르륵 눈물이 흘러내리자마자 나영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영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다해 도희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 쓸었다.

“난 너 다시 그놈 때문에 우는 꼴 못 봐. 절대로 안 돼. 한 번 그랬던 놈이 또 안 그럴 거란 보장 있어? 무슨 사정이든 남편이면 그러면 안 됐던 거야. 그런 식으로 널 떠나면 안 됐어. 절대 안 돼. 도희야. 도희야, 마음 단단히 먹어.”

울음은 전염이라도 된 듯 나영마저 목을 메이게 했다. 나영은 도희에게 세뇌를 시키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했던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도희를 끌어안고 있던 나영이 돌연 그녀를 놓으며 말했다.

“차라리 연애해. 연애해라, 도희야.”

나영은 도희의 가녀린 어깨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흔들었다. 도희는 흘린 눈물을 슬쩍 닦아내며 젖은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은지섭이랑.”

* * *

다음 날, 효주는 하늘하늘한 노란색 블라우스와 나풀거리는 스커트를 입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효주가 도착한 곳은 CH레스토랑이 아니라 미슐랭 스타를 받은 다른 레스토랑이었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던 레스토랑은 이곳도 대관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적했다.

‘맛있는 걸 먹고 가려나?’

주완이 CH레스토랑에서 이벤트를 준비한다는 걸 알고 있는 효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에게 물어보니 그쪽 대관을 취소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효주는 어쨌거나 주완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어제 검색어를 내내 차지하고 있던 백도희는 은지섭과 연인인 게 분명했다. 연예계의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으흥흥.”

효주는 거울을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중대한 날인 오늘을 위해 아침부터 숍에 들른 보람이 있었다. 평소보다 자연스럽고 청순한 메이크업을 한 효주는 오랜만에 한 단정한 차림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때, 인기척 없이 주완이 맞은 편에 앉았다.

“일찍 왔네.”

“오빠!”

효주는 거울을 집어넣으며 그를 맞이했다. 주완은 며칠 사이에 핼쑥해진 것 같았는데 날렵했던 턱선이 이전보다 두드러지자 그 모습조차 멋지게만 보였다. 효주는 정장 차림의 그를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해맑게 웃었다.

“너무 멋있어!”

“뭐라고?”

“응? 아니, 아니야!”

저도 모르게 주완을 칭찬한 효주는 곧장 손사래를 치며 얼굴을 붉혔다. 주완은 그런 효주를 보며 죄책감을 느꼈지만, 우선은 그녀에게 맛있는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코스 요리는 두 사람 앞에 쉴 새 없이 놓였다. 효주는 언제쯤 타이밍이 올까 주완의 눈치를 연신 살폈지만, 주완은 감추는 게 전혀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앞에 놓인 음식들을 먹었다. 아니, 오히려 고통을 초월한 파리한 얼굴로 마지못해 먹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오빠, 무슨 일 있어?”

하는 수 없이 효주가 먼저 주완에게 물었다. 코스 요리가 다 끝나 갈 무렵이라, 디저트만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효주의 질문에 주완이 비장하게 식기를 내려놓았다.

“효주야.”

마침내 그가 효주의 이름을 불렀을 때, 효주는 기대했던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혼 기사 낼 거야.”

“뭐?”

그 말을 들은 효주의 낯빛이 사색이 됐다. 반지도 맞추고, 프러포즈도 준비하더니 갑자기 왜?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효주 이해 못 하겠어!”

효주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자 주완이 죄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장 회장님께도 못 할 짓인 거 알아.”

“근데 왜! 효주한테 안 그러면 되잖아!”

“……그럴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주완의 표정에 효주가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벌린 채로 그를 쳐다봤다.

“미안하다.”

“…….”

“정말 미안해.”

“그 언니한테…… 가려고? 효주 버리고?”

마침내 효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 주완의 동공이 흔들렸다. 표정만으로도 대답이 됐다는 듯 효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효주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얼마나 좋았는데……!”

“미안해. 효주야,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는데…….”

“듣기 싫어!”

서러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주완은 예전처럼 효주를 달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편이었던 주완 오빠가 완전히 변했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언니가 오빠 싫다고 했잖아! 그 언니 남자도 있는데!”

효주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일부러 주완을 자극할만한 말을 골라 했다. 하지만 주완은 강하게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상관없어? 그래도 그 언니가 좋아?”

“……그래. 네가 그런 것처럼.”

효주에게 확실한 답을 내놓자마자 효주는 가슴을 들먹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빈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짓이기는데도 주완은 위로할 마음 없이 슬퍼하는 효주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오빠 싫어! 효주한테 상처 준 거, 다 갚아 줄 거야!”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친 효주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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