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얽힌 마음 (1)
[좀 괜찮아? 컨디션 어때.]
그렇게 문자를 보낸 주완은 다이아몬드 반지가 진열된 장식장 앞에 멈춰 서서 눈으로 반지를 꼼꼼히 훑었다. 레스토랑은 이미 도희의 스케줄이 없는 날을 피해 예약을 한 상태였고, 반지만 준비하면 프러포즈 준비는 모두 끝이었다.
여전히 도희에게 답장은 없었지만, 그녀를 지극히 간호한 이후로 둘 사이에 변화가 있는 건 분명했다. 주완은 더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던 만큼 주완은 하루빨리 도희 곁에 당당히 있고 싶었다.
주완은 내레이션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클래식을 딱딱 맞추는 도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모과차를 즐겨 마시던 도희가 커피를 마시고, 아이돌 노래만 듣던 도희가 이젠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 자신이 알고 있던 도희는 많이 변했지만, 주완에겐 그녀의 변한 취향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주완의 들뜬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정 비서는 뒤에서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태블릿 PC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방적으로 파혼 기사를 내면 J그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효주한텐 직접 얘기해야겠지.”
착잡하게 그렇게 대답한 주완은 또다시 관자놀이에 통증을 느꼈다. 도희의 유산 일을 알고부터 잦아진 통증이었다. 주완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는 터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주완은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가장 심플한 1캐럿 반지를 직원에게 보여 달라고 했다. 처음 프러포즈를 했을 땐 이보다 화려한 걸 했지만, 두 번째니만큼 주완은 단출한 디자인을 원했다. 그런데 직원은 주완이 가리킨 반지를 꺼내면서 자신만만하게 그 옆에 화려한 반지들을 함께 꺼냈다.
“장효주 고객님은 심플한 것보다 화려한 쪽을 더 선호하시던데, 이 디자인은 어떠세요?”
직원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물었다.
CHK백화점에서 주완이 누군지 빤히 아는 직원들은 당연히 그가 효주에게 줄 반지를 고른다고 생각했다. 주완이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동안 직원들은 이미 부현과 함께 다니는 효주의 얼굴을 익히 봐 왔던 터였다. 게다가 늘 화려한 치장을 즐겨 하는 효주의 취향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게 이번에 출시된 신제품인데요, 장효주 고객님은…….”
“아니요. 이걸로 주시죠.”
주완은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직원의 말을 잘라 버렸다. 자신만만하게 반지를 권하던 직원의 얼굴이 사색이 되고, 직원은 허둥지둥 자신이 꺼내 왔던 반지들을 치웠다. 직원이 주완이 고른 반지를 포장하러 간 사이, 주완은 진열대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괜찮으십니까.”
정 비서의 우려에도 주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 *
“정말?”
효주는 비서에게 주완의 소식을 듣고 기뻐서 팔짝 뛰었다. 효주는 도망치듯 펜트하우스를 빠져나온 이후로 일부러 주완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도망 다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지만, 이대로라면 주완이 자신에게 꼭 이별을 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믿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완이 도희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지만, 도희는 주완이 제발 떨어져 주길 바라는 사람이라고 했다. 펜트하우스에서 마주쳤을 땐 결혼 잘하라는 덕담도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본드 사건’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효주가 어물쩍거리는 사이 연예계에선 은지섭과의 새로운 열애설이 제기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효주만 가만히 있는다면, 어쩌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주완이 정신을 차린 걸까. 반지를 사다니!
“직원이 ‘장효주 고객님’ 취향에 대해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답니다.”
비서의 그 말에 효주의 광대가 하늘 높게 승천했다. 효주가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때마침 진동이 울렸다. 주완이었다.
“응, 오빠!”
활기찬 효주의 목소리에 당황한 주완이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펜트하우스에서 본 이후로 처음 하는 연락임에도 불구하고 밝은 목소리를 내는 효주가 의아하게 여겨졌지만, 주완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어, 효주야. 혹시 주말에 시간 낼 수 있어?
그 말을 듣자마자 효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비서더러 나가라고 손짓했다. 효주는 몸을 배배 꼬며 수줍게 말했다.
“왜에?”
-할 얘기가 있어서.
주완의 목소리는 딱딱했지만, 효주에겐 그마저도 프러포즈를 위한 연기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좋아!”
-그래, 그럼 주말에 보자.
전화를 끊고, 효주는 날아갈 듯 기뻤다. 효주는 얼른 사무실 문을 열고 그 앞에 서 있던 비서를 발랄하게 불러세웠다.
“프러포즈 장소는? 그것도 알아?”
“CH호텔 레스토랑, 전체 대관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응, 고마워!”
효주는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 * *
효주에게 받은 돈을 다 탕진한 순자는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순자는 밀려 있는 우편을 한 움큼 쥐고 무성의하게 넘기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 고소장?!”
고소장은 한 명한테만 날아온 게 아니었다. 여섯 명이 단체로 고소한 거로 보이는 고소장엔 순자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순자는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잊고 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처음엔 도통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는데 죄명을 보곤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특경법…… 사기, 도박?”
순자는 5년 전, 이자 받는 일을 하는 척 지인들에게 5억가량 되는 돈을 빌린 적이 있었다. 당시엔 도희가 주완과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부현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특별히 조심하며 도희에게조차 돈을 요구하지 않았던 유일한 시절이었다.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았지?”
순자는 나름대로 치밀하게 돈을 빌렸다. 가명을 쓰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에 한 명씩 공략했다. 처음 몇 달은 불법 스포츠로 벌어들인 돈을 이자로 나눠줬지만 매달 오천만 원 정도 되는 돈을 언제까지고 감당할 순 없었다. 결국 순자는 잠수를 탔고, 집 주소도 번호도 바꾼 순자를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완벽 범죄가 따로 없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단체로 고소를?
순자는 효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효주의 전화벨은 금세 끊겼다. 순자는 곧장 도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안 받기는 도희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순자는 우악스럽게 짐가방 하나를 장롱에서 꺼냈다. 그리곤 닥치는 대로 옷가지와 현금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검찰에서 날아온 고소장에는 당장 내일 검찰 조사를 받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순자의 머릿속엔 오로지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마침내 짐을 다 싼 순자는 어질러진 집 안을 한 번 홱 둘러보고는 거침없이 집을 빠져나왔다.
* * *
며칠이 흘러 주말이 다가왔다. 며칠간 도희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안 받아?”
운전하고 있던 나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순자는 며칠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뒤늦게 부재중을 발견한 도희가 순자에게 전화했을 때, 순자의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도희는 그날 이후 매일같이 순자에게 전화를 걸고 있지만 순자의 핸드폰은 도통 켜지질 않았다. 도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었으나, 바쁜 촬영 스케줄과 복잡한 마음 때문에 순자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지섭이 던진 폭탄 발언과 주완에게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 한데 뒤섞여 도희를 혼란에 빠트렸다. 입원했을 때까지만 해도 주완의 말이 다 믿을만한 이야기 같고, 그에게 받은 위로로 우울한 과오들을 다 지워 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었는데. 막상 하루가 지나자 어제의 일이 꿈처럼 멀게 느껴지고, 하루아침에 그에 대한 마음이 이토록 변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주완의 문자는 기다려졌지만, 막상 답장을 할 때면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도 불구하고 도희는 자신이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때마침 나영이 맥주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머리가 복잡한 도희는 혼자서 예능 프로그램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는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전에 지섭이 했던 얘기도 있고. 피하고 싶은 예능이었지만, 도희는 그 예능을 안 볼 수 없었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고 고백하던 날, 지섭은 담아 뒀던 다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모두 했었다.
“방금 문자, 그 사람이죠?”
도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지섭의 눈빛에 적잖게 동요했다.
“먼저 변한 사람,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자꾸 생각하는 사람.”
도희는 지섭의 말을 듣자마자 예전에 친구 얘기랍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일을 단숨에 떠올렸다.
‘이해가 안 가요. 먼저 변한 사람이고,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친구는 왜 자꾸 그 사람을 생각할까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도희의 벙찐 표정을 보며 지섭이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휘둘리나?”
“뭐?”
“다신 안 나타나겠다고 하곤 계속 얼쩡거려요?”
지섭은 거의 확신에 찬 듯한 말투로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도희는 생각보다 정확한 추측에 놀라며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하곤 그의 얼굴만 멀뚱히 들여다볼 뿐이었다. 곧 도희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그가 화를 참는 듯 농도 짙은 숨을 뱉어 내곤 말했다.
“그 사람 떼어 내기 정 힘들면 나랑 만난다고 하던가.”
“……뭐?”
“나 이용해도 된다구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도희는 설마 했던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는 지섭에게 장난치지 말라는 듯 일부러 웃음기를 섞어 가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그러나 지섭은 장난으로 어물쩍 넘길 마음이 없다는 듯 진지한 기색을 완전히 드러내며 도희를 뜨겁게 응시했다.
“난 선배한테 진심이니까 그래도 돼요.”
“은지섭…….”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지섭의 눈동자만 봐도 그 말이 떠보는 수준의 장난이 아니란 것쯤은 도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불편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은 도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이성적인 매력이라곤 전혀 없는 손짓으로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동경이라고 했잖아, 왜 그래. 내가 물러 보여서 그런 거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못 믿겠으면 오늘 방송 봐요. 내가 어떤 표정인지.”
“…….”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보고.”
..도희는 나영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영은 도희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봐야 할 것 아냐.”
보나 마나 소문은 사실일 거다. 어떤 표정인지 보라던 지섭의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도희는 새삼 진실 앞에 서는 게 두렵긴 했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어차피 인터넷에 온갖 편집본들이 돌아다닐 게 뻔했다. 도희는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하는 수 없이 육포와 아몬드, 그리고 캔맥주를 들고 와 자포자기한 듯 거실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를 알 리 없는 나영은 신이 나서 캔맥주를 단숨에 땄다.
“걱정 말고! 우리 도희를 위하여!”
나영은 도희에게 건배를 제안하며 손을 머리보다 높게 들었다. 도희는 잇새로 피식 웃음을 흘리곤 나영의 장단에 맞춰,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캔맥주를 부딪쳤다. 나영은 물처럼 꿀꺽꿀꺽 술을 넘겼다. 도희도 나영을 따라 톡 쏘는 탄산을 참아 내며 얼음장같이 차가운 맥주를 넘겼다. TV에서는 ‘달리자, 달리자’의 오프닝 멘트가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