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위로
차 안에는 어색한 기류만 흘렀다. 녹음이 끝나고 데려다주겠다는 주완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은 탓에 두 사람은 단둘이 차 안에 있었다. 주완이 운전하는 차에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차 안에서는 마치 주완의 품에 있는 것처럼 포근했다.
두 사람은 차로 출발하고 몇 분간이나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에 도희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이리저리 고민하던 중이었다.
“음악 들을래?”
주완이 먼저 말을 꺼내자마자 도희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아, 미안.”
주완은 도희가 그렇게 놀랄 줄 몰랐다는 듯 머쓱해하며 말했다.
“아, 아니에요. 들어요, 음악.”
또다시 침묵이 흐르기 전에 주완이 조심스레 음악을 틀었다. 블루투스가 연결되기 무섭게 차 안에선 드뷔시의 ‘달빛’이 흘러나왔다. 돌아가는 길, 늦은 시간이라 도로엔 차들이 거의 없었고, 드넓은 차도 위로 보름달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드뷔시의 ‘달빛’은 어색한 적막은 깼지만, 잔잔한 선율이 어색한 공기를 차마 다 메워 주진 못했다. ‘달빛’이 흘러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완이 손을 도로 뻗어 블루투스를 라디오로 돌렸다.
“아, 넌 클래식 싫어하지.”
하지만 라디오로 돌리자마자 쇼팽의 ‘발라드(Ballade) 1번’이 나왔다. 클래식을 즐겨 듣는 주완이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아, 이게…….”
“괜찮아요. 이젠 좋아해요, 클래식.”
주완이 허둥지둥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을 찾으려고 하자 도희가 그의 손을 막았다. 도희의 말에 주완이 놀란 듯 그녀를 흘긋 돌아봤다. 도희는 연애 내내 아이돌 노래만 듣자고 고집을 피웠고, 주완의 클래식 취향을 고지식하다며 놀려대곤 했었다. 주완은 예전의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완의 그 생각을 읽은 도희가 설명을 덧붙였다.
“진짠데. 처음 튼 건 드뷔시 곡이고, 이건 쇼팽 곡이잖아요.”
“어?”
주완이 다시금 놀라며 도희를 봤다.
“운전 조심.”
“어, 어.”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도희가 경고하자 주완이 정면을 응시했다. 라디오에선 여전히 쇼팽의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즐겨 듣는다니까요. 왜 사람 말을 안 믿지.”
그러자 이번엔 주완이 다시 블루투스를 켜곤 노래를 골랐다. 그가 음악을 바꿔 틀자, 이번엔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왔다.
“이것도 알아?”
“응. 쇼팽의 녹턴.”
이번엔 작곡가와 제목까지 맞추자 주완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그는 새로운 취향을 공유한 게 즐거운 듯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다른 노래를 틀었다.
“이건?”
이번엔 느낌이 산뜻하고 밝았는데 작곡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 뭐였지? 이거 유명한 곡인데…….”
도희가 턱을 괴고 고민에 잠기자 주완이 다정한 투로 말했다.
“베토벤 비창.”
“아! 맞아! 그거요.”
몰입하는 도희를 보며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는 주완이었다. 두 사람은 조금 전의 어색함은 잊고 차로 가는 내내 클래식 이름 맞추기 퀴즈에 열중했다. 마치 그리운 친구처럼, 가족처럼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은 오랜만에 서로가 가장 가까운 사람처럼 여겨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완이 시동을 끄고 도희를 따라 내렸다.
“뭐예요?”
“재워 줄게.”
그렇게 말한 주완이 도희의 등 뒤에 섰다. 도희는 황급히 자신의 대문을 당장이라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그를 바깥으로 밀었다.
“어딜 들어와요?”
“처음도 아니잖아.”
주완이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도희가 황당해하며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었다.
“그때는 무단 침입이었고!”
“지금은 허락받고 있는데.”
그렇게 말한 주완은 별안간 반짝이는 눈동자로 도희를 내려다봤다. 마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않으면 이대로 바깥에서 쭉 기다리기라도 할 모양새였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지만,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도 주완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 돼요. 조심히 가요.”
탁! 주완을 운전석에 밀어 넣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도희의 입꼬리가 실룩실룩 올라갔다.
집에 도착한 도희는 한참 동안 잠을 못 이뤘다. 몸은 무척 피로했으나 하루 종일 주완이 했던 말을 되감기 바빴다.
‘혼자 둬서 미안해. 내가…… 내가 책임질게.’
‘곁에서 갚을 수 있게 해 줘. 내가 잘할게.’
힘들게 띄엄띄엄 말을 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그가 무작정 다가왔을 땐 결코 그가 달갑지 않았다. 자신의 아픔을 알 리 없는 주완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물론 그가 알게 된 것만으로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었으나, 우습게도 같은 아픔을 갖게 되었다는 게 도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특히 잘못이 없다는 그의 말은 구덩이에 갇혀 있던 도희를 끌어올려 주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이불 속에 누운 도희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안온했다. 하루 종일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달콤한 단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 *
“세상에. 어떻게 그걸 잊지.”
“괜찮아, 정신없었잖아 어제.”
다음 날, 도희는 나영의 다독임으로 자신이 ‘스위트 셰어 하우스’드라마 첫 방영을 놓쳤단 사실을 깨달았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 첫 방송은 드라마 스폐셜로 방영됐다. 몇몇 배우와 스태프들은 한자리에 모여 첫 방송을 함께 시청했다는데, 경찰서에 간 도희에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음료수 사건’ 범인이 잡힌 일로 도희는 촬영장에서 그야말로 주목 대상이었다. 안 그래도 곧 방영할 ‘드라마 스페셜 방송’ 때문에 도희의 행보를 언론이 주목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료에 본드 넣은 범인을 용서했다는 기사는 도희의 관대한 마음을 널리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이해해 준 도희를 칭찬하기도 하고, 미련스럽다고 욕하기도 했지만 도희는 자신의 선택에 있어 후회하지 않았다.
촬영장에 라일은 나오지 못했다. 경찰서에서 추가로 증언 받을 게 몇 가지 있어서였다. 도희는 조사에서 무언가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라일이 준비한 음료도 아니었고, 그녀와 학생이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라일이 일말의 고의성이 있었다고 한들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심증만 있을 뿐. 이번 일로 도희는 그저 라일을 한층 더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첫 방송 시청률 떴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드라마 스페셜 방송은 반응이 꽤 뜨거웠다. 안 그래도 스캔들 때문에 만나게 된 은지섭과 백도희였다.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기대한 사람들은 본방송보다 메이킹 필름을 더 궁금해한다는 분위기였다.
김 감독도 그를 감안했기 때문인지 명성답게 스페셜 방송을 감성적으로 아주 잘 풀어냈다. 대본 리딩 때 만나 무척 어색한 두 사람의 분위기, 첫 촬영에서도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던 모습을 처음에 보여 주고, 방송 사고를 겪고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 두 사람이 친밀해지는 과정까지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담아냈다. 사람들은 이제 일전의 스캔들이 오보였다는 걸 완전히 믿는 눈치였고, 이 기회에 사귀게 될 수도 있다고도 짐작하는 듯했다.
[은지섭 매력에 또 치이고 갑니다ㅠ]
[두 분 친해지는 과정 잘 봤어요! 내가 다 설레네.]
[스캔들 났을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잘 어울리네? 드라마 기대합니다.]
[지섭♡도희! 이 커플 사귀면 좋겠다ㅜㅜㅜㅜ]
김 감독이 워낙 편집을 잘한 덕에 호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그 안에서도 도희를 깔아뭉개려는 듯한 악플은 간간이 보였다.
[이혼녀 주제에 이번엔 연하남?ㄷㄷ 적당히 해라.]
[울 지섭 오빠가 띄워 주니까 진짜 자기가 같은 급인 줄 아나 봐? 제발 주제 파악하길.]
[재벌 만나고 안 되니까 이번엔 라이징 스타 노림. 백도희도 대단함ㅋㅋ]
스태프들이 화기애애하게 어젯밤 스페셜 방송에 대해 떠들자, 도희는 구석진 자리에서 조용히 [스위트 셰어 하우스]를 검색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대기하며 댓글을 읽는 도희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본드 사건’으로 동정을 샀기 때문인지 호의적인 댓글이 훨씬 더 많았으나, 도희는 자신에 관한 악플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도희는 나영이 제게 다가오자마자 핸드폰을 넣고, 아무 근심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였다.
“들었어? 시청률 13%래! 스페셜 방송인데!”
나영은 도희보다 늦게 촬영장에 도착했다. 라일과 관련된 추가 조사와 여학생과의 합의, 소속사 기사 문제까지 모두 처리해 온 나영이었다. 나영은 하루 사이에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장에 도착해서 시청률 이야길 듣자마자 나영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로 방방 뛰었다.
“나 때문에 고생했어, 나영아.”
“아니야. 하여튼 백도희 착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 같으면 그냥은 못 넘어갔을 텐데! 그나저나 스페셜 방송 너무 잘 됐다! 반응도 좋고!”
“은지섭이 대단하긴 한가 봐. 다들 이렇게 관심이 많을 줄 몰랐네.”
도희는 저도 모르게 시청률에 자신의 공이 일절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자 나영이 발끈하며 말했다.
“왜 은지섭이야? 너랑 은지섭 같이 주연 배우야! 너도 그 시청률에 한몫했다구!”
“아. 나는…….”
나는 다른 의미로 시청률을 끌었지. 그렇게 말하려던 도희는 나영의 타박이 두려워 말을 삼키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나영은 안심하며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피했다.
도희는 나영이 전화를 받으러 가자마자 도로 핸드폰을 들었다. 볼수록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판도라의 상자처럼 도희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좀 괜찮아? 컨디션 어때.]
핸드폰을 들자 1분 전에 도착한 주완의 문자가 떴다. 주완의 문자를 받자마자 어딘가 불안하던 도희 마음이 붕 떴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도희가 상념에 잠긴 착잡한 얼굴로 메시지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요?”
지섭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도희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물어본 지섭의 시선이 도희 핸드폰에 꽂혔다. 그는 잠시간 액정 속 글자를 읽는 것처럼 도희의 핸드폰을 주시했다. 지섭의 날카로운 시선에 도희는 메시지를 띄워 놓은 핸드폰을 황급히 주머니 속에 넣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 이후, 지섭과 도희의 소문이 퍼지고 처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지섭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어색한 모습으로 도희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끔뻑끔뻑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지섭은 주변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다 말고 그녀의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서 있는 게 좀 어색해서.”
그렇게 말한 지섭은 잠시 우물쭈물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었다.
“걱정돼요.”
“어?”
“선배 큰일도 있었고 무서울 텐데, 내 팬들이 악플을 좀 올리는 것 같아서……. 가뜩이나 본드 사건도 미안해 죽겠는데 다 내 탓인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지섭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 불만스러운지 뒷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지섭의 말을 들은 도희는 불편하다고 무작정 그를 피했던 게 미안해졌다. 도희는 조금은 경계심이 풀어진 듯 눈매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네 탓 아니잖아. 다 네 잘못은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도희의 의젓한 위로에도 지섭은 여간 풀어지지 않은 듯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지섭은 여전히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듯 입을 오물거렸다. 도희는 지섭이 무슨 말을 할지 차분히 기다리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지섭은 무언가 결심한 듯하더니 별안간 결연한 표정으로 도희를 향해 말했다.
“내 탓 맞아요.”
“어?”
어느 때보다 단호한 투에 도희가 되물었다.
“내가 숨기지 못해서 그래요.”
도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