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잘못 없어
도희를 그렇게 만든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해당 형사에게 따로 부탁해 놨던 주완은 누구보다 빨리 범인이 자수했단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주완은 그 얘길 듣자마자 경찰서에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도희가 도착할 거란 형사의 말에 우선 도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범인 잡혔다며. 내가 갈까?]
주완은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에서 그렇게 보냈다. 하지만 도희는 답이 없었다. 도희의 허락이 떨어지길 한 시간가량 기다리던 주완이 회사를 나서려던 차였다. 그때, 정 비서가 뻣뻣하게 굳은 표정으로 본부장실에 들어왔다.
“범인 얘긴 들었어. 지금 가 보려고.”
정 비서가 들어온 이유가 도희가 낸 기사 때문이라고 생각한 주완이 나갈 채비를 하며 말했다.
“저…… 본부장님.”
정 비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렸다. 평소 정 비서에게선 보지 못한 태도였다. 주완은 정 비서가 숨기고 있는 일이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짐작했다.
“왜 그래?”
주완은 시간이 없다는 듯 재킷을 챙겨입으며 말했다.
“그게…… 백도희 씨 다큐멘터리 미팅 건 말입니다.”
주완은 일전에 정 비서에게 다큐멘터리 미팅 후 울던 도희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이라면 다큐멘터리 PD가 대본을 받고 표정이 어두워진 것 말곤 별다른 일을 알 수 없었다고 이미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그게…….”
“얘기해.”
재킷을 다 입은 주완이 정 비서 바로 앞에 섰다. 그러자 정 비서는 꾸물거리다 결국 힘겹게 얘길 꺼냈다.
“3년 전, 백도희 씨가…… 유산을 했답니다.”
“뭐?”
나가려고 서 있던 주완이 비틀거렸다. 눈앞이 흐려지면서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정 비서가 빠르게 달려와 주완을 부축했지만, 주완은 한동안 관자놀이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제야 주완은 윤선이 ‘급성 스트레스’를 조심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숨을 찬찬히 가다듬었다. 그리곤 정 비서에게 몸을 기대며 차분히 도희의 상태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자신을 처음 봤을 때 인사도 없이 지나치던 도희, 어린아이를 보며 길 한가운데서 눈물을 쏟았던 도희, 다이어리에 어렴풋이 적어 놓았던 그녀의 절망, 자신을 원망하고 혐오하던 그 눈빛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살아 있을 이유가 있나? 배우 백도희도, 아내 백도희도, 엄마 백도희로도 서 있을 자리가 없는데…….]
엄마 백도희. 3년 전, 도희가 놓아야 했던 건 ‘아내 백도희’ 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어쩌다가.”
“기자들을 피하다가 계단에서…….”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도희는 주완 때문에 배우 일을 그만둔 게 아니었다. 공황 장애가 생겼다는 것도, 카메라 울렁증이 생긴 것도, 단순히 이혼녀라서가 아니었다. 도희는 주완이 모르는 새에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그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끊임없이 늪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자신도 물론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그 못지않게 도희도 아픈 시간을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내레이션 미팅 때 백도희 씨가 힘들어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대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 주제가 ‘생명’이라고 합니다.”
왜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왜 유산 사실 또한 말하지 않은 걸까. 미국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었는지 몰라도 주완이 되돌아왔을 땐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주완을 원망하며 폭언을 퍼부을 수도 있었을 텐데. 도희는 그러지 않았다. 죄책감을 함께 짊어지지 않으려는 것이든, 이혼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어졌든 주완은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런 도희에게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제 병을 고백할 생각을 하다니. 주완은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병을 비밀로 하기만 하면 모두가 행복할 거라고 판단했던 자신의 오만이 한 생명을 잃게 하고, 사랑하는 이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보, 본부장님.”
주완을 지켜보던 정 비서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휴지를 건넸다.
“으흑……!”
주완은 자신이 흘리는 눈물조차 위선처럼 느껴져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미어지는 가슴을 어찌할 줄 몰라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과오를 절실히 되돌리고 싶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이 주완을 휘감았다.
“……나가 봐.”
“본부장님…….”
“어서.”
정 비서가 나가고, 넋이 나간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던 주완의 얼굴이 다시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머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주완은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다.
“흐윽…… 흑…… 끄윽.”
어렸을 때부터 뭐든 잘 해냈던 주완은 어딜 가나 주목받았고, 사람들을 진두지휘했고, 판단력에 있어서 실책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한다고 자부했고, 그래서 늘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3년 전, 도희를 떼어 내는 판단조차도 그랬다. 지난 3년간 제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확률이 5%가 겨우 되는 수술을 앞에 두고 도희를 불행하게 살게 하는 것보다 도희가 저를 놓고 살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게 맞다고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아이라니. 주완의 경솔함이 두 사람의 첫 아이를 잃게 했고, 도희에게 그 짐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 주완의 심장이 고통스럽게 옥죄여 왔다.
“으흐윽…… 우웁.”
주완은 울음인지 헛구역질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감히 돌아가도 되는 걸까. 정작 필요할 땐 옆에 있어 주지도 못했는데. 주완은 숨을 쉬기 버거워하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충격 때문인지 귓가에 잠시간 이명이 들렸다. 주완은 털썩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리곤 곧 흐느낌을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도희는 홀로 외롭게 죄책감과 싸우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주완은 도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고, 곧바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수신음이 들려왔다. 주완은 망설임 없이 눈물 자국을 지우고 힘겹게 일어났다.
주완은 나영에게 전화를 걸어 도희가 있는 곳을 물었다. 나영은 처음 주완의 전화를 받고는 노발대발했지만, 곧 유산 이야기를 이제 알게 됐다고 도희를 만나야겠단 말을 전하자 도희가 있는 곳을 순순히 알려주었다.
당장 가야 할 곳을 알게 된 주완의 발걸음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잃어버린 아이도, 네 죄책감도.”
“……!”
“내가 다 책임질게.”
그렇게 말하자 도희의 몸에 힘이 풀렸다. 도희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말 한마디에 도희는 오늘 하루 종일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일들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문제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도희를 쥐고 흔들었던 불행한 감정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그걸…… 어떻게…….”
“나한테 기회를 줘. 도희야, 이렇게 부탁할게.”
왜 이 사람은 내가 약해지는 순간마다 이렇게 나타나서 나를 흔드는 걸까.
“죄책감, 다 내가 가져야 할 짐이야. 내 선택이 너를 힘들게 한 것뿐이야. 도희 넌 잘못 없어.”
“…….”
“곁에서 갚을 수 있게 해 줘.”
뒤에서 도희를 끌어안고 있던 주완은 도희의 앞으로 자리를 옮겨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애원하듯 그녀를 올려다봤다.
“내가 잘할게.”
이미 벌어진 일을 그가 돌이킬 순 없었다. 주완이 한마디, 한마디 뱉을 때마다 도희의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가 돌아온다고 달라질 건 없는데. 홀로 짊어졌던 유산의 고통을 가장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주완이었다. 도희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유일한 사람, 주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희는 말문이 턱 막혔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망이었는데, 막상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그를 더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널 다치게 해서, 우리 첫 아이를…… 그렇게 잃게 해서.”
사과와 동시에 주완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가 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혼 선언을 했을 때도 미련 한 톨 없는 사람처럼 보였던 그가 울다니. 도희는 가슴이 둥둥 뛰면서 심장이 조여 오는 듯 아려왔다. 그간 주완의 불행을 바라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젖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도희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다 내 잘못이야.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러니까…… 괴로워하지 마.”
주완의 눈물, 그리고 직접적인 사과는 도희의 생각을 크게 변화시켰다. 칠흑같이 짙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단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왜 그간 주완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3년 전에 왜 도희를 떠났는지 이유를 듣지 않아도 이해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와 떠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납득이 갈 만큼 크고 분명하게 존재할 것 같았다.
“기회만 줘. 용서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노력할게.”
주완은 멍하니 넋을 잃은 도희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어 주완의 떨림이 도희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뜨거운 주완의 체온은 덜덜 떨고 있던 도희의 몸을 진정시켰다. 잠시간의 포옹으로 차분해진 도희가 이윽고 말라붙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 냈다.
“나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받아들여 줄 때까지 열심히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시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PD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희를 바라봤다. 십 분이면 된다고 했던 그녀가 무려 삼십 분을 밖에서 있다가 왔기 때문이었다. 도희는 경찰서 조사 때문에 통화가 길어졌다고 둘러댔다. 쉬는 시간 동안 도희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여학생을 용서했단 기사를 본 PD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할 수 있겠어요?”
“그럼요.”
도희의 활기찬 대답에 PD가 만족한 듯 웃었다. 바람을 쐬고 온 덕분인지 도희의 안색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지친 기색이 드러나긴 했으나, 분명히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도희는 두려웠던 1부 대본을 다시금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유산이라는 두려운 단어 앞에서 도희는 놀랍게도 더는 주눅 들지 않았다.
‘죄책감, 다 내가 가져야 할 짐이야. 내 선택이 너를 힘들게 한 것뿐이야. 도희 넌 잘못 없어.’
‘미안해. 널 다치게 해서, 우리 첫 아이를…… 그렇게 잃게 해서.’
잘못이 없다. 나영에게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지만, 도희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주완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땐 마치 참회라도 한 듯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더는 내레이션이 두렵지 않았다.
도희는 완전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대본을 읽었다. 겹쳐 보이던 과거의 기억을 지우고, 영상 속 부부들의 불행과 자신의 불행을 최대한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애썼다. 그러자 다행히도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지도 않았고, 목소리가 떨리지도 않았다. 대본의 글자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하자 도희는 점차 자신감이 붙었다. 도희는 2부에서 녹음했던 자신의 톤을 떠올리며 1부의 톤이 튀지 않도록 소리를 냈다. PD도 만족한 듯 더는 컷을 외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