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내가 책임질게
‘본드 사건’의 가해자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건 다큐멘터리 녹음 2시간 전이었다. 주변의 증인들 말에 따라 점차 수사망을 좁혀 가던 중, 불안에 떨던 가해자가 자수했단 소식이었다. 도희는 드라마 촬영을 황급히 마무리하고 나영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내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
나영은 경찰서로 향하는 내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도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도희의 마음은 여간 진정되질 않았다.
가해자는 시사회에서 봤던 그 여학생이라고 했다. 도희는 가해자가 미성년자라는 말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시사회 영상이 퍼지고 한동안은 그 여학생을 안쓰러워했었는데, 설마 앳돼 보이던 그 학생이 끔찍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찰서 앞에 선 도희는 상대가 학생임을 알면서도 쉽사리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나영이 도희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들어가자.”
경찰서 안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다행히 아직 기자들은 들이닥치지 않았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가해자가 자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도희가 경찰서 안에 들어서자마자 형사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도희 쪽으로 쏠렸다. 막 촬영을 끝내고 온 도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 사이에 껴 있는 도희는 우아하고 찬란한 분위기를 뿜어냈다. 경찰서에 들어선 도희를 안내하는 형사는 발그레해진 얼굴을 숨기며 도희를 안내했다. 도희와 나영은 엉거주춤 그 뒤를 따랐다.
여학생 앞에 섰을 때, 도희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학생을 막지 못했다. 여학생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도희에게 울며불며 매달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도희는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드는 여학생에게서 공포를 느꼈다. 울고 있지만, 핏대가 선 여학생의 눈동자에선 적의가 느껴졌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범인 잡혔다며. 내가 갈까?]
주완의 문자를 받자마자 도희는 입술을 악물었다. 두려운 건 맞지만, 뭐든 주완이 나서야만 해결할 줄 아는 바보는 아니었다. 도희는 핸드폰을 굳게 쥐며 제게 매달리는 여학생을 밀어냈다.
“왜 그랬어요?”
“저는 그, 그냥 겁만 주려고 했어요…… 지, 지섭 오빠랑 너무 친해서…… 질투가 나서…… 잘못했어요, 언니!”
“시사회 때도 혹시…….”
“그때도 언니 곤란하게 하려고 그랬어요! 근데 영상이 퍼지고, 제 신상 털리면서…… 학교생활 하기 더 힘들어지고…….”
여학생은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고 싶다는 듯 학교생활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줄줄이 설명했다. 실내화는 가져다 놓기 무섭게 소각장에 버려져 있고, 교과서는 찢어져 있고, 책상과 의자엔 치약이니 쥐약이니 하는 것들이 칠해져 있어서 괴로웠다고. 도희는 여학생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었다. 여학생의 흐느낌은 경찰서가 떠나가라 계속됐다.
“조용히 못 해? 뭘 잘했다고 울어!”
보다 못한 형사가 여학생을 조용히 시키려고 하자 도희가 형사에게 괜찮다고 눈짓했다. 여학생은 계속해서 울음을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분해서 화풀이하려고 그랬는데…… 혈서 보면 언니가 본드 안 마실 줄 알았어요…… 흑, 정말 죄송해요.”
여학생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혈서…… 주스 다 마시고 보라고 했잖아요?”
“네? 아니에요, 저 일부러 편지 봉투도 붙이질 않았어요. 언니가 혹시 그냥 주스 마셔 버릴까 봐, 진짜예요! 믿어 주세요!”
도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여학생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봤다. 여학생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도희를 보고 뭔가를 눈치챈 형사가 도희를 향해 물었다.
“뭔가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다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흑흑.”
도희는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도희가 비틀거리자 나영이 황급히 그녀를 붙들었다. 여학생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여학생의 잘못뿐만이 아니었다. 도희는 라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곤 형사를 대신해 여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류라일에게 전달한 건 맞니?”
여학생이 더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도 열어 놨고…… 주스부터 마시라는 말을 전한 적도 없고?”
이번에도 여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형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하필…… 류라일한테 전달했어? 거기에 뭐가 들었는지, 라일이 알고 있었니?”
그걸 묻는 도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형사도 도희의 질문에 주목했다. 여학생은 라일이 거기에 들은 게 뭔지는 모른다고 말했다. 애초에 한 번도 말을 섞은 적도 없고, 자신이 음료를 들고 왔다 갔다 하자 제게 먼저 음료를 넘기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사실만 들어선 라일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도희는 학생의 대답을 듣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걸리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형사의 물음에 도희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라일에게 주스를 받았던 정황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편지 봉투는 닫혀 있었고, 주스부터 마시라는 말을 들었다는 말까지. 그러자 여학생이 억울한 듯 버럭 소리쳤다.
“아니에요! 전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러자 형사도 뭔가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일단 상황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분은 더 조사한 뒤 도희에게 알려 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의 변명이 끝나기 무섭게 막 경찰서에 도착한 여학생의 어머니가 도희를 잡고 빌었다. 어머니는 허름한 옷 위에 비닐 앞치마를 두르고 나타났다. 온갖 음식 냄새와 기름 냄새를 풍기며 도희에게 매달리는 걸 나영이 겨우 뜯어말렸다. 도희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연약해졌다.
“합의금 얼마든지 드릴게요! 제발, 우리 딸 선처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모습에 도희 마음은 여간 편해지질 않았다. 얼마가 됐든 행색을 보아 작은 합의금조차 마련하기 넉넉지 않아 보였다. 듣자 하니 여학생은 아버지 없이 포장마차로 생계를 이어 가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도희의 마음이 연약해지는 걸 느낀 나영은 도희에게 조용히 귓속말했다.
“난 이 사건 조용히 못 넘어가.”
하지만 도희 생각은 달랐다. 게다가 여학생 말이 사실이라면, 만일 편지 봉투도 동봉되어 있지 않았고, 라일이 전달한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도희는 주스를 마시지 않았을 터였다. 여학생이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를 이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여학생의 앞길은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도 사는 게 더 힘들어질 게 뻔했다. 도희는 초라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제 엄마인 순자를 떠올렸다.
“형사님. 이번 일, 그냥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요.”
“네? 하지만…….”
“백도희!”
나영과 형사는 생명이 걸린 일이니만큼 그럴 수 없다는 듯 완강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도희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도희는 울음을 그친 채 딸꾹질을 하는 여학생의 머리를 쓸며 말했다.
“넌 좋겠다. 널 위해 이렇게 애쓰는 엄마도 있고.”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도희의 손길에 여학생은 벙찐 표정을 지었고, 그 옆에서 여학생의 엄마는 머리를 바닥에 찧을 정도로 고개를 수십 번 숙였다.
“잘해 드려. 어머니 속 썩이지 말고.”
* * *
도희는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홀로 방송국을 찾았다. 경찰서에 남아 처리할 일들은 나영에게 모두 맡겼다. 납득할 수 없다는 나영을 떼어 내기에도 좋은 핑계였다. 도희는 애써 괜찮다며 나영을 향해 웃어 보였지만, 뒤죽박죽 한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미성년자인 가해자, 라일과 관련된 수상한 정황, 효주와 거래를 했다는 순자, 지섭과의 소문, 도희에게 끊임없이 연락하는 주완에, 당장 도희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다큐멘터리 녹음까지. 모든 걸 다 생각하다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도희는 아까부터 끊임없이 울리는 주완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도희가 방송국에 도착했을 즈음, 이미 범인을 용서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나간 뒤였다. 도희는 핸드폰을 꺼 버렸다. 도희는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경찰서에 갔다 온 뒤로 온몸에 힘도 없었다.
“도희 씨, 할 수 있겠어요?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기사를 본 PD는 도희를 걱정하며 물었다. 도희 역시 녹음을 미루고 싶었으나, 드라마 촬영이 한창인 지금 시기에 스케줄을 다시 잡는 건 무리였다. 도희는 조금만 더 견뎌 보기로 했다.
“괜찮아요.”
도희는 여느 때보다 경직된 자세로 대본을 딱딱하게 읽기 시작했다. PD는 가뜩이나 늦게 시작한 녹음이라 그런지 조급하지만, 최대한 안 그런 척 도희를 다그쳤다.
“도희 씨, 조금 힘을 빼고 읽어도 괜찮아요. 도희 씨 평소 목소리대로 하면 되는데? 어깨에 힘 좀 빼 볼래요?”
대본을 읽기 시작한 뒤로 도희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잔뜩 겁을 먹은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황황히 굴렀다. 당황한 나머지 들고 있던 대본을 몇 장 떨어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희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계속해서 대본을 읽었다.
“산모는 현재 자궁 경부 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유산…… 과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부모의 가슴은 까맣게,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아이를 끝까지 지켜 낸다는 일념, 하나로-.”
“컷.”
“죄책감에 부모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아이를 끝까지 지켜 낸다는 일념 하나로 수술대에…… 오른 그녀는 뼈를 깎는 괴로, 괴로움의 시간을 감내합니다.”
“컷. 지금 도희 씨 너무 숨이 많고, 길어요. 호흡 더 짧게. 그리고 도희 씨 감정을 담는 건 좋은데, 지금보단 더 덤덤하게 해 주세요.”
몇 번의 NG가 계속되자 PD는 심각한 낯빛으로 눈을 치켜떴다. 도희는 그런 PD의 눈치조차 살피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다시 해 봅시다.”
“……혹시 뒷부분부터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내레이션을 이어가려고 입을 벙긋거리던 도희는 끝내 못 하겠다는 듯 대본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PD는 도희의 컨디션을 맞추기 위해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3, 4부는 아직 편집 완성이 덜 돼서 2부밖에 없어요. 그것부터 할래요?”
도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는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동안 녹음은 계속됐다. 다행히 2부는 1부보다 순조로웠다. 2부 역시 낙태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지만, 도희는 오히려 유산보다는 그편이 더 자신 있었다. 도희는 최대한 느껴지는 죄책감을 내려놓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대본을 꼼꼼히 살피고 읽었다. 도희는 알맞은 톤을 찾은 것처럼 영상에 맞춰 대본을 쭉쭉 읽었고, PD도 만족스럽게 내레이션을 들었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 여기까지 할까요?”
PD의 제안에 도희는 시간을 보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1부 조금이라도 끝내고 싶어요.”
“목 상태 괜찮으면 그렇게 합시다.”
대신 도희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나가려고 일어섰다.
새벽에도 방송국 건물에 불 켜진 곳은 많았지만, 주차장 쪽에 사람은 없었다. 도희는 가로등 불빛 아래 벤치에 조명을 받은 사람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어느덧 푸릇푸릇한 낙엽은 바래고, 쌀쌀한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엔 일교차가 심해 특히나 밤이 되면 추웠다. 반팔 면티와 청바지 하나만 겨우 입은 도희가 몸을 떨었다. 그래도 도희는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람이라도 쐬니 녹음실 안에 있을 때보단 머리가 맑게 개는 기분이었다.
도희는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 간신히 버티고 있지만, 누군가 툭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유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희는 달리 도망칠 곳이 없었다. 모든 상황이 도희의 목을 조여 왔지만, 어느 것 하나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일이었다.
툭. 그때, 누군가 도희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가 퍼지자마자 도희가 홱 뒤를 돌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숨을 헐떡이고 있는 주완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혼자 둬서 미안해. 내가…….”
“이거 놔요.”
“내가 책임질게.”
무슨 일인지 그렇게 말하는 주완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은 주완은 그녀를 고쳐 안고, 또 고쳐 안으며 숨이 막히도록 그녀를 안았다.
“이거, 놔요!”
도희는 그의 팔을 떼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곧 주완의 다른 말에 의해 힘이 풀리고 말았다.
“잃어버린 아이도, 네 죄책감도.”
“……!”
“내가 다 책임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