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소문
삼십 분이 지나자 수비와 공격 팀을 바꾸라는 경보음이 울렸다. 도희는 자신이 공격 팀이 되자마자 이번만큼은 분량을 꼭 차지하리라 결심하곤 냅다 달렸다. 도희는 자신이 숨었던 곳부터 상대 팀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 도희가 발견한 건 래퍼 고찬원이었다.
“도희 씨, 저 떼면 후회하실걸요!”
찬원은 악동꾸러기 같은 협박을 하며 정신 산란하게 발을 옮겼다. 도희는 말없이 찬원의 스태프에 발맞춰, 자세를 낮추고 그의 이름표를 끈질기게 노려봤다. 찬원을 열심히 쫓은 덕분에 도희는 찬원을 막다른 길에 몰아세울 수 있었다. 찬원은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앞을 막고 있는 도희를 향해 돌진했다. 도희는 당황하면서도 달려 나가려는 찬원을 꼭 붙들었다. 거의 껴안다시피 찬원에게 매달려 그의 이름표를 떼려는 찰나였다. 누군가 도희의 손을 찬원에게서 잡아뗐다.
“오! 오오! 지섭아, 고마워!”
찬원은 도희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같은 편인 지섭은 신경 쓰지 않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평소 고찬원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줄곧 보여 주던 철없는 악동 캐릭터다웠다. 도희는 분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지섭을 향해 소리쳤다.
“야!”
순식간에 도희에게서 떨어진 지섭은 고소한 듯 비소를 머금었지만, 눈매만은 굳어져 있었다. 도희는 씩씩거리며 아까부터 자신을 방해하는 지섭에게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도희의 강한 승리욕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너 이리 와.”
“안 봐준다고 했잖아요.”
조금 전 찬원이 있던 막다른 곳엔 지섭이 들어가게 됐다. 도희는 이렇게 된 거 지섭의 이름표라도 떼야겠다 싶어 얼른 공격 태세를 갖췄다.
“엄청 필사적이네요.”
지섭은 비아냥거리는 사람처럼 말했다. 도희는 지섭이 단순히 도발한다고 생각하곤 그의 말투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엔 도희가 먼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도희는 제 가슴 쪽으로 지섭의 팔을 단단히 옭아맸고, 순간 지섭의 몸에 힘이 풀려 이름표를 손쉽게 북 뜯어냈다.
삐익. 지섭의 탈락이었다. 조금의 반항이라도 할 줄 알았던 지섭은 의외로 일말의 반항 없이 이름표를 순순히 도희에게 내어 주었다. 도희는 이름표를 뜯고도 벙찐 표정이었다. 지섭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뭐야, 봐준 거야?”
“아니에요.”
지섭은 분한 듯 입술을 말아 물며 도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탈락자 대기실로 향했다. 도희는 그의 태도가 이상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조금 전 놓쳤던 찬원을 잡기 위해 다시 달렸다.
탈락자 대기실로 걸어가는 지섭은 찜찜한 얼굴로 성질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게 아닌데.”
지섭은 도희가 찬원과 몸을 부대끼며 실랑이를 하는 모습, 그리고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제 팔에 바짝 붙이며 이름표를 뜯어대던 모습을 되새김질하며 얼굴을 붉혔다. 지섭의 귓불은 이미 불에 덴 것처럼 새빨갰다. 질투와 욕망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지섭은 자신에게 여전히 카메라가 붙어 있음에도 머릿속에 붕붕 떠다니는 도희의 열정적이고 매혹적인 모습을 지워 내지 못했다.
지섭을 찍고 있던 카메라 VJ 두 명은 그와 붙어 다닌 지 한 시간 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은 지섭을 지켜보고 같은 생각을 하며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섭은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게임은 녹색 팀의 승리였다. 도희는 까나리 액젓을 먹어야 하는 벌칙을 앞에 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위세척한 지 얼마 안 돼서 당분간 자극적인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들었지만, 게임은 게임이었다. 게다가 방송인데 몸 상태를 얘기하며 자신만 벌칙을 뺄 수도 없었다. 도희를 비롯한 노랑 팀은 긴 테이블 앞에 놓여 있는 사약 같은 사발을 천천히 들었다. 도희 역시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코를 막고 액젓을 쭉 들이켜려던 순간이었다.
타악. 지섭이 나서서 도희 손에 들린 사발을 빼앗더니 말릴 새도 없이 원샷해 버렸다. 옆에선 그런 지섭의 돌발 행동에 출연진이 소리를 질렀다. MC는 사전에 예고되지 않은 그의 행동에 반칙이라며 주의를 줬다. 그러자 까나리 액젓의 독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린 지섭이 입술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엄지로 스윽 훔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가 얼마 전에 위세척을 해서요. 이런 거 먹으면 안 되거든요.”
카메라를 보며 해맑게 씩 웃는 지섭은 그야말로 왕자님이 따로 없었다. 지섭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자 출연진은 모두 지섭에게 반했다는 듯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대박!”
분위기에 휩쓸려 찬원을 비롯한 남자 출연진 역시 호들갑을 떨며 지섭을 추켜세워 주었다. 얼마 전 도희의 불행한 사고는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출연진이었다. 공정하지 않긴 하지만, 출연진은 이미 퇴원을 하자마자 촬영장에 와서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여기던 중이었다. 출연진은 지섭의 돌발 행동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MC가 예능PD를 향해 “넘어가 주는 거죠?”라고 하자 PD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VJ는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PD는 지섭의 돌발 장면에서 어떻게 시청자들을 이해시킬지 단숨에 스토리를 세웠다. 지섭이 까나리 액젓을 먹자마자 ‘본드 사건’과 관련된 온갖 자극적인 기사와 그녀가 퇴원하자마자 촬영에 임했다는 사실을 끼워 넣기로 마음먹는 PD였다.
주변에 환호성이 터졌다. 두 사람, 아니 정확히는 지섭의 눈빛을 심상찮게 여긴 출연진은 둘이 진짜 뭐 있는 거 아니냐며 몰아갔다. 도희는 아니라고 하면서 손사래를 쳤지만, 지섭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촬영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은지섭이 백도희를 좋아하는구나!’
* * *
“그 소문 진짜야?”
이 바닥은 확실히 소문이 빨랐다. 방송국 사람들끼리는 알음알음 인맥이 넓어서 지섭이 도희를 짝사랑하는 게 분명하다는 추측이 오갔다. 그 소문은 단 며칠 만에 ‘스위트 셰어 하우스’ 식구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내용인 즉, 지섭이 도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고, 그의 행동이 꼭 좋아하는 여학생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어수룩한 남학생 같다는 것이었다. 지섭은 도희를 도발하기를 즐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희에게 져 주고, 도희가 다른 남자와 붙어 있을 때마다 번개처럼 나타나서 떼어놓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게다가 반발을 무릅쓰고 까나리 액젓을 대신 마셔주기도 했고. 사람들은 ‘드라마 스페셜’ 첫 방송보다 오히려 주말에 방영될 예능 프로그램을 더 기대하는 눈치였다.
라일은 지섭과 도희의 소문이 더 커지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상이 더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영상을 올리려고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허탕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영상을 뿌릴 생각은 없었다. 라일은 도희를 망가트리기 위해 잘 쌓아 둔 자신의 이미지를 망쳐 버릴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기회가 있을 거야.’
게다가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백도희 본드 사건’엔 라일도 개입되어 있었다. 당장은 아무도 의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제 라일을 의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그래 봤자 설사약이나 들어 있을까 했는데, 본드가 들어 있단 사실은 라일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굳이 편지를 나중에 보라는 말까지 덧붙였으니 도희가 자신을 의심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라일은 도희가 촬영장에 돌아오고 일부러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라일이 도희에게 말을 거는 건 주로 시비를 걸기 위해서였으므로 시비를 걸지 않았단 뜻이었다. 도희도 그런 라일에게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몸은 좀 괜찮고?”
종선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투로 도희에게 다가와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일주일 입원해 있는 동안 세 번이나 찾아온 종선이었다. 그는 병문안을 올 때마다 빈손으로 오지 않으면서도, “네가 드러눕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돌잖아.”라며 도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다.
도희는 종선이 자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돌아오자마자 이제 자신이 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도희는 평소보다 더 몰라보게 친절해진 스태프와 배우들의 관심을 받으며 마음이 치유되는 듯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종선과 대화를 나누던 도희는 문득 지섭과 눈이 마주쳤다. 도희는 지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도희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틀 전부터 지섭을 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도희로선 소문을 잠재우는 방법은 그뿐이었다. 그보다 도희는 조만간 방영될 예능 프로그램이 더 걱정이었다. 어떻게 편집이 되냐에 따라 같은 소문이 네티즌 사이에서 퍼질 수도, 안 퍼질 수도 있었다.
연기자다운 능숙함으로 지섭을 못 본 척하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섭은 쓸쓸한 얼굴로 도희와는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도 없는 거야?”
이를 모두 지켜보고 있던 종선이 특유의 무뚝뚝하면서 능글스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소문은 사실인 것 같던데?”
종선의 눈동자가 지섭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도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 없는 투로 대답했다.
“아……. 아닐 거예요.”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니고?”
도희 역시 소문이 들리고 난 후로 지섭의 행동을 새로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제 본 모습을 보여 주고, 발 벗고 나서서 충고하고, 챙기고,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는 그의 눈빛에 애정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처음엔 동경이란 타이틀을 씌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도희slakpwkjmdm에게도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도희는 그럴수록 지섭이 더 부담스럽기만 했다.
“만나 보지? 젊은 남녀가 안 될 게 뭐 있어. 만나 보고 아니면 헤어지면 되지.”
“…….”
“이혼녀가 대수야? 그거 그냥 서류에 한 줄 있는 것뿐이잖아.”
도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종선은 지섭을 멀리하는 이유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젊은 세대와 어울려서인지 의외로 열린 사고를 가진 종선은 도희를 위해 말을 덧붙였다.
“어깨 펴. 넌 애도 없잖아. 요즘 그런 시대 아니다?”
종선의 위로는 뜻밖의 곳에서 비수가 되어 꽂혔다. 애가 없다는 말은 도희에게 결코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도희는 순식간에 떠오른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고 말없이 땅 아래만 응시했다.
“얘는 어떻게 나보다 더 막혀 있어.”
별거 아니라는 듯 시원스러운 어조는 도희에게 나름의 기운을 전해 주었다. 종선은 힘을 북돋워 주려는 듯 도희의 어깨를 성의 없이 툭 쳤다. 종선의 진심을 충분히 느낀 도희는 애써 미소 지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도희는 멀어지는 종선의 뒷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주완을 떠올렸다. 이혼녀 얘기는 주완을, 주완은 유산을, 유산은 오늘 해야 할 내레이션 녹음을 떠올리게 했다. 퇴원하자마자 숨돌릴 틈 없이 녹음 스케줄까지 잡힌 도희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굳게 마음을 다지고 촬영장을 나서려는데, 돌연 핸드폰이 울렸다. 도희는 [02]로 시작되는 번호를 보곤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백도희 씨, 지금 서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발신자는 다름 아닌 ‘본드 사건’을 맡은 담당 형사였다.
“아, 촬영이 끝나긴 했는데…….”
-백도희 씨 사건 가해자가 자수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