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흔들리는 마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약 일주일간 [백도희 음료수 사건]은 검색어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도희가 깨어났다는 기사가 나간 후로도 사람들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어떤 행위라도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가한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사는 포위망을 좁혀 벌써 그녀가 몇 살인지, 어느 고등학교에 다니는 지까지 알아냈다. 도희를 저주한 미성년자 여고생.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 여고생이 은지섭의 팬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자 지섭은 더 이상 병실에 오지 않았다. 차마 도희를 볼 면목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도희는 어차피 예능 촬영 날 보지 않느냐며 매일 올 필요 없다고 되레 지섭을 위로했다. 지섭은 마치 자신 때문에 도희가 그렇게 된 게 기정사실이라도 된 양 도희의 위로에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도희야.”
“응? 뭐가?”
“너 처음에 그렇게 됐다고 얘기 들었을 때…… 혹시 3년 전 일 되풀이 되는 게 아닌가 했거든.”
도희도 그랬다. 그때만큼 절망적이고 무서웠으니까.
하지만 며칠 사이에 도희는 몸도 마음도 몰라보게 건강해진 상태였다. 주완이 나타난 그 날 이후, 주완은 하루도 빠짐없이 병실을 찾았다. 어떤 날은 막 야근을 마치고 와서 도희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도희를 재워 주다 말고 자신이 먼저 잠들기도 했다. 주완은 도희의 머리칼을 밤새 쓰다듬고, 손을 잡아 주며 도희가 안정적으로 잠을 잘 수 있게 도왔다.
하루는 너무 늦게 와서 도희가 먼저 잠들었는데, 눈을 떴을 때 주완이 귀여운 곤충을 관찰하는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도희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희는 게슴츠레한 눈동자에 비친 주완의 안온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예쁘네.”
잠결에 도희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도희는 하루하루 주완이 기다려졌다. 매일 밤 주완이 나타나는 건 도희의 심신에 꽤 큰 안정을 주었다. 도희의 상태가 다시 나빠질까 불안했던 나영이 정신과 상담까지 예약을 해 두었는데, 다행히 별 이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도희는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을 받을 때도 주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본드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위협은 주완과 함께라는 생각이 든 다음부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엔 뒤늦은 정면 승부를 펼치는 주완의 태도가 괘씸해서 그의 안 좋은 면을 떠올리기도 하고, 맹목적으로 믿을 수 없는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주완이 자신에게 말하려던 ‘사정’을 그저 핑계로 치부했고, 애틋한 진심 따위 염두에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병실을 찾아올 때마다, 그의 얼굴에 진중한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화는 가라앉았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과감해지는 주완의 친절한 메시지와 스스럼없는 방문에 도희는 저도 모르게 감정 호소로 여겼던 주완의 말을 새롭게 떠올리고 있었다.
‘말을 해도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모든 걸 다 말하고 나면 내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자책하게 되진 않을지, 혼자 모든 걸 판단한 내가 더 싫어지진 않을지. 나한텐 모든 게 걱정스럽고 어려워.’
대체 무슨 사정을 숨기고 있길래 이런 말을 했을지 궁금해지고,
‘변한 적 없단 소리야. 내 모든 행동이 내 입장에선 모두 널 위한 행동이었다고.’
그저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던 말이 애절하고 고달픈 고백같이 느껴지고,
‘못 믿겠지만 사실이야. 그 당시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도희를 떠난 이유에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희는 어느샌가 둘의 이혼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감춰져 있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 볼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도희는 고작 일주일간의 병간호로 달라진 제 마음이 두려웠다. 마치 그간 밀어내고 있던 순간이 한데 모여 반작용을 보이는 것처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다고 느낄 만큼 주완에게 끌리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도희는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면들을 억지로 떠올렸다.
이유를 듣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미 끝난 사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건너왔는데. 도희는 자존심과 호기심, 그리고 현실과 이상 속에서 계속해서 갈팡질팡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한 번 물어볼까.’
도희로선 이런 일을 물을 수 있는 게 나영뿐이었다. 주완과의 세세한 역사를 모두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영아. 있잖아.”
도희가 의미심장하게 운을 뗐다. 그러자 퇴원을 위해 침대 주변을 정리하던 나영의 손동작이 멈췄다. 도희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황급히 삼키고 “아니야.”라며 말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나영의 살벌한 눈빛을 피하긴 늦은 뒤였다.
“말해라.”
협박과도 같은 나영의 말에 도희는 하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솔직히 털어놨다.
“놀라지 말고 들어. 그 사람이…… 그러니까 이전 일은 오해였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데…….”
“약혼까지 한 마당에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영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도희의 말을 잘라 버렸다. 도희는 마음이 다급해져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원하지 않았대. 약혼 기사는 일방적이었던 거라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마음에 걸려. 사정이 있었대. 변한 적 없었대.”
“백도희.”
나영은 도희가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졌다는 듯 경고하는 어조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도희는 나영의 입에서 더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이제 와서 뭐가 달라지겠나 싶어. 근데…… 그래도 무슨 말인지 자꾸 듣고 싶어져.”
“말해 두는데. 너 그 인간 다시 만나면 네 매니저 안 한다.”
나영은 단호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곤 화가 난 사람처럼 성큼성큼 병실을 빠져나갔다. 도희는 나영에게 얼핏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곧 그녀의 말이 자신의 감성적인 의심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도희는 잠시 마음을 흔들었던 그를 향한 관대함을 거두어들였다. 아니, 거두어들였다고 생각했다.
* * *
도희는 조금 전 퇴원한 환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상큼한 메이크업을 한 상태로 밴에서 내렸다. 바로 맞은편에선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지섭이 있었다. 지섭은 도희의 혈색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움에 내달려 왔다.
“좀 괜찮아요?”
“그럼. 멀쩡해.”
도희는 이제 안 보이던 여유까지 보이며 어깨를 휘휘 저어 보였다. 괜찮다는 말을 하면서도 도희는 또다시 주완의 얼굴을 떠올렸다. 멀쩡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덕분인 게 분명했지만, 도희는 최대한 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드라마 7회분까지 촬영이 거의 마무리 됐을 때 즈음 지섭과 도희는 ‘달리자, 달리자’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섭외됐다. ‘달리자, 달리자’라는 예능은 팀끼리 나눠서 곳곳에 숨어있는 암호를 찾고, 그 암호를 가장 비슷하게 맞힌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상대 팀끼리는 서로의 왼쪽 어깨 위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떼어 내면 아웃시킬 수 있었기에 술래잡기와 보물찾기를 한꺼번에 수행해야 했다. 암호는 공격 팀과 수비 팀이 모두 찾을 수 있었으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30분마다 공격과 수비가 바뀌는데, 수비 팀은 공격 팀을 피해 다니기만 해야 했고, 공격 팀은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출연진은 늦은 밤, 서울 근교의 대형 백화점에서 모였다. 백화점은 폐장 후 잠깐 빌릴 수 있는 거라 시간을 조정할 수 없었다. 도희와 지섭은 예능 PD에게 대략적인 룰에 대해 설명을 듣고, 출연진과 깍듯이 인사를 나눴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예능에서 주로 활동하는 연예인이라 메인 MC를 제외하곤 거의 초면이었다. 다행히 출연자들은 텃세 하나 없이 도희와 지섭을 반겼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큰일을 치른 도희에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도 더해졌다.
“촬영 괜찮겠어요?”
“힘내요. 무섭겠지만, 털어 버려야죠.”
“오늘 살살할게요.”
그중에서도 유난히 까불거리는 찬원이 도희를 보며 말했다. 찬원은 출연진 중 도희와 유일하게 동갑인 래퍼였다. 그는 도희의 긴장감을 풀어 주려는 것 같았지만, 예능 분위기는 느껴 본 적 없던 도희는 머쓱하게 웃을 뿐이었다.
여러 대의 카메라, 각 출연진을 따라다니는 VJ들까지. ‘달리자, 달리자’는 해외 수출 1위 예능인만큼 스태프들도 그 수가 많았다. 도희는 불현듯 수많은 카메라들이 저를 따라올 상상을 하자 안색이 파래졌다. 도희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열어 주완의 문자를 찾았다. 촬영 전, 오늘도 영락없이 그의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집에 가면 연락해.]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주완을 봤던 도희였다. 막상 퇴원을 하고 나니 주완을 다신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내심 아쉽기까지 했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샘솟는 서운함에 깜짝 놀라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나영에게 충고를 들은 뒤로 다시금 그를 밀어내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도희는 그를 머릿속에서 떨쳐 버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일부러 핸드폰을 보지 않기도 하고, 무음으로 설정하며 신경을 끊어 보려고 했으나 잘 되진 않았다. 틈만 나면 시계 보는 척 화면을 띄웠고, 울리지 않는 핸드폰에 자꾸 시선이 갔다. 결국 그를 밀어내는 동안도 아이러니하게 쉴 새 없이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여긴 따로 구경하는 시민들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나영은 도희가 멍 때리는 이유가 얼마 전 있던 본드 사건의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멀쩡하다곤 말하지 못하겠지만, 도희가 자주 넋을 놓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나영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도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언제까지 주완을 밀어낼 수 있을지 도희는 점차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도희는 말없이 그의 문자를 띄워 놓은 핸드폰만 손에 꼭 쥐었다.
오프닝은 순조로웠다. 드라마 촬영을 일주일이나 쉬어서인지 몸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 촬영부터 워낙 유명한 스캔들을 몰았던 두 사람이기에 출연진은 지섭과 도희가 나란히 설 때마다 잘 어울린다고 몰아가며 짓궂은 장난을 쳤다. 장난을 잘 받아치지 못하는 도희와 달리 지섭은 능글맞게 출연진을 농락했다. 출연진은 지섭더러 만만치 않은 상대가 나타났다며 과장되게 혀를 찼다.
팀은 일부러 도희와 지섭을 갈라놓았다. 두 사람이 출연진 중 팀원을 뽑는 것으로 노랑 팀과 녹색 팀이 결정됐고, 오프닝이 끝나자마자 출연진은 전원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도희는 노랑 팀, 지섭은 녹색 팀이었다. 추리닝 어깨 부근에는 사전에 공지했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안 봐줄 거예요, 선배님.”
“누가 봐 달래?”
추리닝을 갈아입은 뒤로는 전 출연자들에게 카메라가 한 대씩 붙었다. 물론 지섭이 도희에게 선전포고하는 내용도 담겼다.
노랑 팀은 먼저 수비를 맡았다.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 도희를 비롯한 출연진이 대형 백화점 곳곳으로 숨어들었고, 도희 역시 2층 의류 매장 쪽으로 가서 암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도희는 의류 매장 곳곳에서 암호로 보이는 카드를 찾아냈지만, 전부 꽝이었다. 도희는 주머니 속에 꽝인 카드를 쑤셔 넣었다.
그렇게 3층으로 올라가려던 차에 하필 가장 먼저 만난 건 다름 아닌 지섭이었다. 도희는 전속력으로 층계를 내려가 도로 의류 매장에 들어갔다. 그래도 몇 군데 뒤져본 곳이니 지섭보다는 숨을 곳을 잘 알아낼 수 있단 생각 때문이었다.
도희는 전속력으로 달려 지섭을 따돌리려고 했으나, 지섭은 그런 도희를 놓치지 않고 쫓았다.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옷들을 피해 몸을 요리조리 피하던 도희는 결국 지섭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잠깐, 잠깐만!”
시작한 지 고작 20분 만에 아웃될 순 없었다. 도희는 지섭에게 협상이라도 할 요량으로 그를 불렀다.
“은지섭! 나한테 암호 있어!”
도희가 지섭을 부르자, 사냥감을 향해 빛나던 지섭의 눈빛이 뭉그러졌다. 도희는 얼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꽝 카드를 꺼내 보였다. 카드는 반으로 접혀 있어, 겉으로 봤을 땐 다른 암호와 다를 바 없었다.
“나 풀어 주면, 암호 공유할게!”
“진짜요?”
유순해진 지섭이 되물었다. 도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섭이 손을 내밀었다. 도희는 이때다 싶어 카드를 주는 척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순식간에 몸을 뺀 지섭은 카드를 받지 않는 대신 도희의 이름표를 뜯어 버렸다.
삐익. 도희의 아웃이었다. 도희는 씩씩거리며 지섭을 노려봤다. 그러자 지섭은 특유의 맑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 안 통하지. 저 선배님 팬이라니까요.”
“씨이. 나 분량 안 나오면 책임져.”
도희는 부루퉁한 얼굴로 홱 돌아섰다. 탈락자 대기실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는 도희의 뒷모습을 잠시간 애틋하게 바라보던 지섭은 실소를 툭 터트렸다. 그의 눈빛은 마치 어린아이를 보듯 따뜻하고 유순했다.
자신도 모르는 표정이, 카메라에 생생히 담기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