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거부할 수 없는
어스름한 새벽, 도희는 울다 지쳐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깨어나고 곧장 병실로 오겠다는 나영도 막았다. 도희는 혼자 있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또 이 꼴을 보였어야 했으니까.
또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씩씩하게 닦으면서도 도희의 눈동자 초점은 흐릿했다. 도희는 벌써 몇 번째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제게 본드를 먹인 그림자가 거대하게 느껴졌고, 순자가 던진 말은 도희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일주일 뒤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였다. 지섭에겐 의젓하게 말했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두려워진 도희였다. 누군가 자신을 해코지할 것 같고, 이상한 소문이 도희를 짓누를 것 같았다. 누군가의 침입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작은 인기척에도 놀라 병실 문을 확인했고, 병원에서 주는 밥 또한 조금씩 먹을 뿐 제대로 넘기질 못했다. 불안한 상황 속에서 계속되는 의심은 도희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때,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란 도희의 몸이 그대로 망부석처럼 굳어졌다.
본드를 먹인 사람인가? 죽지 않아서, 날 죽이러 온 건가?
옆으로 누워 있던 도희는 차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손과 발이 뻣뻣하게 굳고, 극심한 두려움에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정말 자신을 해치러 온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호출을 눌러야 하는데, 이미 자신의 뒤에 선 한 사람의 작은 숨소리가 제 목을 조여왔다. 도희는 이불 속에서 계속해서 타이밍을 쟀다. 일어나는 순간, 호출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도희를 점점 더 떨게 만들었다. 도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파앗- 탁! 벌떡 몸을 일으켜 호출 버튼을 향해 손을 힘껏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빈 거리보다 짧았고, 호출 버튼 근처에 가기도 전에 한 남자의 손에 의해 저지당했다. 도희는 뒤에서 뻗쳐 온 손에 꼼짝없이 묶여 벌벌 떨었다.
“누, 누구세요.”
가느다랗게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남자가 이내 손을 놓고 도희 앞에 섰다. 도희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주완은 바르르 떨고 있는 도희의 손을 잡은 채로 물었다.
“……주완 씨?”
놀란 마음이 진정되는 순간,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도희는 그저 안도감으로 일렁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도희가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하자 놀란 주완이 다가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주완 특유의 맑고 시원한 체취에 거짓말처럼 도희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천천히 개는 느낌이었다.
“미안해.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도희의 모습에 주완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도희를 끌어안고 있다가 어깨를 잡고 그녀의 얼굴을 살피다가 도로 안고 얼굴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나는 걱정이 돼서…….”
그렇게 말한 주완은 이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마지막 잎새처럼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 손놀림은 전혀 침착하지 않았지만, 그의 품 안에서 도희는 안정감을 느꼈다.
“괜찮아. 괜찮아.”
쉴 새 없는 토닥임에 도희가 서서히 진정했다. 떨림도 멎었고, 울음도 잦아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도희는 주완의 품에서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진정할 수 있었다. 도희를 괴롭히고 있던 두려움과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도 저절로 떠밀려 내려가는 듯했다.
“좀 진정됐어?”
“…….”
도희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기엔 괜찮지 않았고, 그를 밀어내기엔 이미 그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도희는 밤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그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안해.”
도희의 침묵에 돌아온 건 사과였다.
“다 나 때문이야.”
안티가 생긴 건 주완 때문이 아니었지만, 도희를 이토록 약하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3년 전, 도희가 공황 장애와 카메라 울렁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알고 있는 주완은 도희가 이번 사건으로 아픈 상처를 다시 들춰낼까 봐 겁이 났다. 주완은 무력한 저 자신을 탓하며 도희의 마른 손을 꽉 붙잡았다.
“지킬 자격이 있다면 좋을 텐데.”
주완의 그 말에 도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완은 그런 도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염치없지만, 그럴 수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
“그전에 했던 말, 진심이야.”
주완의 나직한 목소리가 병실에 잔잔히 퍼졌다. 마음이 연약해져 있을 때, 그를 봤기 때문일까. 그 순간, 도희는 주변에 모든 소리가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았다. 도희는 주완이 이전에 했던 말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사정이 있었어.’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는 왜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지난 3년간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왜?
“이해가 안 되겠지만, 그때 내 상태는-.”
주완이 말을 하려다 입을 닫았다. 도희는 그가 다음 말을 더 하길 바랐지만, 주완을 재촉하진 않았다. 주완은 파리한 안색의 도희를 세심하게 살피곤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미안해.”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또 사과했다.
“지금 너한테 이해를 바라는 건 이기적이지. 아직 놀랐을 텐데.”
주완은 뒤늦게 제 실수를 뉘우치며 도희를 천천히 뉘었다. 도희의 머리와 목을 한 손으로 받치고 도희의 몸을 조심스레 기울이자 그녀의 몸이 맥없이 주완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도희가 베개 위에 완전히 눕자, 별안간 그가 도희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신혼 시절, 악몽을 자주 꾸는 도희가 울며 깨어날 때마다 재워 주던 방식이었다. 이전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주완의 행동에 도희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경계와는 상반된 간질거림이었다. 도희는 애써 그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느릿하게 그를 밀어냈다.
“……됐어요.”
도희가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주완은 다른 한 손으로 저지하려는 손을 끌어 내렸다. 도희는 그때 처음으로 주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알아차렸다. 도희는 다시금 제 옆에서 무너질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주완을 응시했다.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두려움이 깃든 주완의 목소리에 도희의 마음이 세차게 동요했다. 평소 흐트러짐이 없는 주완의 초조함은 도희의 기분을 더욱 달뜨게 했다. 그러는 사이 주완의 손아귀에 힘이 더 강해졌다. 그의 손에는 조금 땀이 차 있었다.
“아프지 마. 부탁이야.”
또다.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에 도희는 잠시간 침묵했다.
“괴로웠어. 내가 아픈 것보다 더.”
주완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도희는 그의 말이 그저 감동적이게만 다가왔다. 도희는 이런 불안한 순간에 옆에 있는 주완이 무척이나 위로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곤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지섭이 있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지섭의 앞에선 괜찮은 척, 의젓한 척했지만 주완 앞에선 어쩐지 정반대의 약한 모습만 튀어나왔고, 도희는 그 사실이 못마땅하면서도 주완에게 알 수 없는 깊은 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단지 부부였기 때문일까. 도희는 다시 답답해졌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막막함은 아니었다.
“잘자. 잘 때까지 옆에 있을게.”
“……그럴 필요 없어요.”
“무섭잖아.”
주완은 도희를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잠 못 이룰 게 분명하기에 주완은 그녀가 잠들 때까진 결코 일어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주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조금 아프긴 했지만, 도희는 그 강한 악력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잠시 후 마법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편안한 기분이 도희를 몽롱하게 만들었다. 하루 종일 울면서 탈진 직전까지 간 도희는 그의 손을 잡고, 비로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매일 올게. 네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게.”
그리고 잠결에 어렴풋이 들리는 말에 도희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지섭은 도희가 깨어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던 무기력한 사람으로서 극심한 분노를 느낍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자유 국가라곤 하지만, 못난 감정을 주체 못 해 한 사람의 생명에 위협을 준다는 건 살인 미수나 다름없습니다.]
되도록 예민한 이슈에 자신의 의견을 SNS에 피력하지 않던 지섭은 이번만큼은 강력하게 제 의사를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도희에게 악의를 품은 여학생이 은지섭 팬이라는 말은 이미 공공연하게 떠도는 소문이었다. 지섭은 그 소문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정황상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라일의 증언에 따르면 여학생이 촬영을 구경하는 내내 쉬고 있는 지섭만 바라봤다고 했으니까.
SNS에 글을 올리자마자 지섭은 파파라치에게 넘겨받은 사진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지섭과 도희가 회식 날 나란히 나오는 순간을 포착해서 찍은 사진 몇 장이었다. 찍힌 장면은 지섭이 도희의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것이었지만, 사진은 교묘한 각도에서 찍혀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은 이미 은밀하게 소속사로 전달되었고, 소속사에선 열애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파파라치 역시 정확한 증거를 잡기 전까진 열애설 터트리길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지섭은 그 사진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명확한 증거가 되진 않으나 한 번 열애설이 났던 두 사람이기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이걸로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지섭은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찜찜하고 음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효주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집 안을 배회했다. 며칠 전부터 불안정한 효주의 상태를 보고 부모님들은 불안감에 무슨 일이 있냐고 몇 번이나 물었지만, 효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끝까지 일을 숨겼다. 효주는 핸드폰을 들어 액정 위에 띄워 놓은 백도희와 관련된 기사를 들여다봤다.
[백도희 위세척하고 하루 만에 깨어나, 생명에 지장 없어……]
순자를 만나고 온 효주는 되레 싱숭생숭해졌다. 분명 복수를 하겠다고 순자에게 거금까지 주며 도희의 출생의 비밀까지 알아냈는데. 다음 날 도희가 팬이 준 음료를 마시고 쓰러졌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도 그렇지 본드는 너무 했어.”
효주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당장 기자를 찾아가 도희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늘어놓을 생각이었지만, 병실에서 자신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게 될 도희가 불쌍해진 효주는 당분간 계획을 미루기로 결심했다. 주완의 집에서 마주친 거나 자신을 약 올리던 그녀의 얄궂은 표정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까지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그때, 효주의 전화벨이 울렸다. 효주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확 찌푸렸다.
[못된 엄마]
발신자는 다름 아닌 순자였다. 도희를 동정하게 된 이유에는 이 사람도 있었다. 그녀가 주완과 어울리지 않는 건 확실하지만, 딸의 정보를 팔아 돈을 벌려는 엄마를 둔 도희가 한 편으로 가여웠다.
“엄마는 선택하는 게 아닌데…….”
효주는 그런 그녀에게 남은 잔금도 주고 싶지 않았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괘씸해서였다. 효주는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눌렀다.
“효주가 바본 줄 아나.”
효주는 새초롬하게 입을 내밀며 혀로 날름 보이지 않는 상대를 약 올리기까지 했다. 다행히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순자는 계약서 한 장 작성하지 않은 채 효주에게 비밀을 줄줄이 늘어놨다. 한마디로 둘의 거래를 증명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단 뜻이었다. 효주는 전화 온 번호를 즉시 클릭해 차단했다. 앞으로 질이 나쁜 순자는 다신 상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퇴원을 하지 못했단 기사를 보곤 효주는 도희의 비밀에 관해 당분간만 더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확실하게 주완과 떼어 놓긴 하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