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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귀환-42화 (42/71)

42화 트라우마

촬영은 전면 중지됐다. 도희가 안티의 소행으로 본드를 마셨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기사화됐고, 이슈가 된 만큼 수사도 빠르게 진행됐다. 하필 공원에는 CCTV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여학생의 단서를 잡을 수 있는 건 음료를 전달했던 라일의 증언뿐이었다. 라일은 여학생의 얼굴을 기억이 안 난다는 듯 두루뭉술하게 말했고, 여학생이 시사회 영상 속 여학생인 건 쏙 빼놓고 얘기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일반적인 주스였어요. 다 마시고 나서 도희 선배가 맛이 좀 이상하다고 하긴 했는데, 특별한 냄새가 나지 않아서 저도 전혀 몰랐구…….”

라일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말했고, 그녀의 감쪽같은 연기에 라일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음료를 건네준 후배’가 되어 있었다. 네티즌 중에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희가 응급실로 실려 가 위세척을 받는 동안 여학생의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라일도 여학생이 걸리지 않길 바랐다. 혹시라도 협박 편지 봉투 동봉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안 되니까.

도희는 위세척을 받은 그날 저녁 깨어났다. 배우들이 한 명씩 문병을 왔다 갔지만, 저녁까지 남아 있는 건 지섭뿐이었다. 도희가 천천히 눈을 뜨고, 홀로 도희 옆을 지키던 지섭은 다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고 먹는 걸 조심하면 별 탈 없을 거라고 얘기하곤 병실을 나갔다. 의사가 나가자마자 지섭은 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도희를 덥석 끌어안았다.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도희는 지섭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천천히 자신이 쓰러진 상황을 돌이켜 봤다.

촬영이 들어가기 무섭게 도희 속이 무척 울렁거렸다. 구토할 것 같았고, 침이 자꾸 고였다. 도희는 계속되는 촬영으로 몸에 무리가 갔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섭에게 다가가면서 점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식은땀이 나고,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다리를 간신히 움직였다. 묵직하고 느린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중, 지섭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영이는?”

도희의 물음에 지섭이 도희를 떼어 내곤 천천히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매니저님은 기사 때문에 회사 들어갔고, 라일 선배가 전달한 음료수…… 거기에 본드가 섞여 있었대요.”

본드라니. 그 말을 들은 도희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지? 도희는 음료를 다 마셨을 때 느껴진 알코올 비슷한 냄새를 떠올렸다.

“……팬이 전해 줬다고 했는데.”

도희는 라일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편지 안 봤죠? 그거 혈서로 쓴 협박 편지였어요. 우선 경찰 쪽에 증거 넘기고 수사하고 있다니까 금방 범인 찾을 거예요.”

‘팬이……! 주스부터 마시라고 하던데요.’

‘촬영…… 촬영 끝나고 봐 달라고 했어요.’

지섭의 말을 듣자마자 도희는 라일을 의심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의심되는 정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함께 일하고 있는 배우를 이런 끔찍한 일과 연관 짓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라일이 자신을 질투하긴 했어도 사람에게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라고 믿었다.

“몸은 어때요?”

“기운 없는 거 말곤…… 괜찮아.”

도희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섭은 그런 도희를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찬찬히 바라봤다. 깨어나서 다행이긴 하지만, 생기 어린 도희 입술은 다 부르터 있고, 안색 또한 시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창백했다. 지섭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별안간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나직이 물었다.

“괜찮은 거 맞아요? 놀라진 않았고?”

“……괜찮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사실 도희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시사회 영상 이후로 도희를 바라보는 사회 시선이 조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사람을 죽일 정도의 악의를 가졌다는 사실이 도희를 주눅 들게 했다. 도희는 악플로 인해 겪었던 3년 전 트라우마가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 내가 진짜 얼마나…….”

“진짜 괜찮다니까.”

도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자신을 우상이라고 말하던 지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지섭은 도희의 미소에 이제야 좀 안심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도희는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제 손을 꽉 잡고 있는 지섭의 손을 차마 떨쳐내지 못했다. 도희의 손을 잡은 지섭의 손이 두려움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도희는 되레 지섭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정말 괜찮아.”

아직까지 울렁거리고 말할 기운조차 없는 도희였지만, 도희는 지섭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촬영은 어떻게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해요?”

“곧 온 에어잖아. 중요하지.”

지섭은 도희의 프로다운 면을 동경하고, 또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 몸보다 촬영 스케줄을 걱정하는 도희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제 몸이나 먼저 챙기지.’

지섭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촬영 스케줄 연기됐죠. 선배 괜찮아지면 다시 시작할 거예요. 촬영분 꽤 있으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요. 어차피 다들 무리하던 차였으니까.”

“예능은 언제였지?”

도희와 지섭은 김 감독의 권유로 같은 방송사에서 하고 있는 ‘달리자, 달리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도희의 기억이 맞다면, 촬영은 고작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그냥 그거 하지 말죠.”

“어떻게 그래. 홍보 예능으로 그거 하나 나가기로 했는데.”

드라마 홍보로 예능 출연은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게다가 방송국의 배려로 드라마 스페셜 일정과 예능 방영 일정을 하루 차이로 맞춰 놨으니 이제 와 촬영을 미룰 순 없었다.

“선배, 그거 달리는 프로그램이에요. 이 몸으로 어떻게 그걸 해요.”

“적당히 하면 되지. 알아서 할게.”

“좀……!”

지섭은 그녀에게 호통을 치려다가 겨우 참았다.

백도희는 이런 사람이었다. 도희가 데뷔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 과로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당시엔 도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무리한 일정을 괜찮다는 말로 모두 소화했기 때문이었다. 지섭은 과거에 그런 도희를 보고 연기자라면 저 정도의 열정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달랐다. 책임감에 제 몸을 챙기지 않는 도희가 미련스럽기 그지없었다.

“우선 쉬어요. 매니저님한텐 내가 전달할게요.”

“……응. 고마워.”

그렇게 말한 지섭이 병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병실 문을 열자마자 바깥에는 중년의 여성이 서 있었다.

“누구…….”

“그쪽이야말로 누구?”

순자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도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을 중재하듯 도희가 얼른 덧붙였다.

“엄마야. 지섭아, 나중에 봐.”

도희의 말을 듣자마자 지섭의 눈빛이 딱딱하게 변했다. 이미 순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섭은 순자를 주의 깊게 살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은지섭입니다.”

“은지섭? 그 열애설 났던?”

“엄마!”

순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그대로 드러내며 지섭을 위아래로 훑었다. 도희는 제 손에 꽂혀 있는 링거 때문에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소리쳤다. 하지만 지섭은 그런 순자의 행동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마치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이다.

“선배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내가 그쪽을 또 왜 봐?”

“엄마, 좀!”

도희의 호통에도 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적의를 드러냈다. 지섭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다시 한번 간단하게 묵례한 뒤 병실을 나갔다.

도희는 순자의 무례한 태도에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울렁거리는 속이, 순자를 본 이후로 더욱 심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인터넷에서 그렇게 떠드는데 안 와 볼 수가 있어야지.”

그 말에 도희는 순자가 자신을 걱정해서 병원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자는 곧바로 다른 말을 덧붙였다.

“이 정도 얼굴은 비쳐 줘야 내가 백도희 엄마인 걸 알아보지! 온 김에 사진 한 방 박자!”

우악스럽게 핸드폰을 들이미는 순자의 손을 도희가 매섭게 쳐 냈다.

“엄마를 알아보는 게…… 뭐가 중요한데요?”

“그, 그런 게 있어!”

순자는 언제나 그렇듯 수상한 말을 어물쩍 넘겨 버렸다. 예상은 했지만, 순자는 정말로 도희의 몸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뭘 기대하겠어.’

도희가 3년 전,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도 순자는 지방에 있다며 병문안 한 번 안 와 본 사람이었다. 그 이유가 도박 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순자의 태도에 예전 일까지 떠올리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방금 깨어났지만, 도로 잠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희는 순자를 보내기 위해 몸을 누이며 말했다.

“피곤해요, 눈도장 찍었으면 가세요.”

그러자 순자는 아직 용건이 남은 듯 쭈뼛거렸다.

“너, 장효주라고 아냐?”

순자의 말에 도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완의 약혼자를 엄마가 왜.

“엄마가 그 여자를 어떻게 알아요?”

“혹시 뭐 다른 연락처 아는 거 있냐? 사무실 번호라든지. 도통 만날 수가 있어야지.”

“무슨 소리예요? 엄마가 그 여자를 왜 만나요?”

“글쎄 그럴 일이 있는데…….”

“그럴 일이 뭔데요!”

불안감이 엄습한 도희는 순자를 다그쳤다. 하지만 순자는 거릴 게 없다는 떳떳한 투로 말했다.

“거, 거래를 한 게 좀 있어! 근데 이 요망한 게 잔금을…….”

“무슨 거래요? 잔금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니 글쎄, 알아? 몰라?!”

순자는 쉽게 도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을 것 같지 않았다. 도희는 순자 입에서 나온 주완의 약혼자 이름에 가뜩이나 뛰던 심장이 더 세차게 요동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대로 말해요.”

“정정당당한 대가야! 정보를 좀 팔았다!”

“엄마가 그 여자한테 무슨 정보를 팔아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예요?”

“그야 네년이 상관할 건 아니고. 모르면 됐다! 혹시나 해서 와 봤더니만. 쯔쯧, 어디 써먹을 데가 있어야지.”

순자가 혀를 끌끌 차며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당장이라도 졸도해 버릴 것처럼 머리에 피가 쏠렸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 순간, 도희의 머릿속에 순자와 연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탕!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혀 있던 도희가 문을 쳐다봤다. 도희가 어떤 상태든 관심 없는 순자는 이미 병실을 나간 뒤였다. 미닫이였던 병실 문은 거칠게 닫혔다가 그 반동으로 살짝 열렸다. 문을 닫을 힘조차 없는 도희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계속 부정하고 밀어내려고 하고 있지만, 순자로 인해 도희는 또다시 세상에서 버려진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혼하고, 유산했을 때와 같았다. 지독한 병원 냄새, 당장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적막, 링거를 낀 손목으로 들어온 차가운 액체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흐윽…… 흐으읍……!”

아니야. 이번엔 아니야. 도희는 이불 속에서 울음을 삼키며 스스로에게 계속 그렇게 주문을 걸었다. 자신을 이유 없이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유 없이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 본드를 먹일 정도로 앙금을 품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공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도희는 계속해서 우물에 빠지려는 자신을 스스로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도희는 다시는 죽고 싶었던 그 날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세상은 두렵고 힘겨웠지만, 도희는 다신 숨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한편, 순자와의 모든 대화를 엿들은 지섭은 순자가 나올 타이밍에 맞춰 몸을 숨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실을 다시 찾아갔는데, 한 뼘 정도 살짝 열린 문틈에서 도희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섭은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으윽…… 우윽…….”

억눌린 흐느낌을 들은 지섭은 열린 문틈 앞에 조심스레 섰다. 문틈으로 보이는 이불 속 그녀의 실루엣에 누군가 심장을 쥐어뜯는 것처럼 아려왔다. 지섭은 저도 모르게 빈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이 요동치는 감정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모르는 척하기엔 이미 그 크기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내 방식대로 선배 지킬게요.’

차주완과 순자. 그 둘만 떨어트려 놔도 도희 인생에 걸림돌은 없었다. 지섭은 설사 훗날 도희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그녀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지섭은 핸드폰 화면에 미리 준비해 뒀던 메모장에 연락처를 띄웠다. 대략 열 명 정도 되는 연락처엔 각자 다른 이름, 그리고 0이 여러 개 적힌 금액이 적혀 있었다. 지섭은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하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차라리 나였더라면.’

자신이었더라면 주완처럼 도희를 두고 떠날 일도, 순자에게 괴롭힘당하게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어느 것으로도 융화할 수 없는 증오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지섭은 설사 훗날 도희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그녀를 불행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도희에게서 떼어 놓고 싶었다. 지섭은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하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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