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41화 (41/71)

41화 라일의 계략

다음 날 촬영장에서 라일이 올린 영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지워진 영상을 복사한 사람은 없었고, 영상이 더 퍼져 나갈 일도 없었다. 물론 퍼져 나가도 말끔하게 다 지워졌겠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여전히 활기찼다. 라일은 어제 기대했던 것과 사뭇 다른 촬영장의 분위기가 무척 불만스러웠다. 라일은 조명 아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촬영하고 있는 도희를 보다가 짜증스레 고개를 돌렸다. 라일의 촬영분이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가 많을 때, 야외 촬영을 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낮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공원 주변에는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주부부터 어린아이들, 그리고 교복 입은 학생도 보였다. 라일은 저 멀리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들고 초조하게 서성이는 여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라일은 낯이 익은 여학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쟤 시사회에서 봤던 걔 아니야?’

이혼녀였던 도희 이미지를 바꿔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영상. 그 안에 저 여학생이 있었다. 여학생의 질문은 분명 적의를 갖고 있었고, 덕분에 여학생의 신상이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녔다. 그때 라일도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여학생의 유출된 사진을 봤었다. 여학생은 일기를 올리는 형식으로 트위티 정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도 욕을 먹는 통에 그 계정마저 삭제해 버렸다고 들었다.

그런데 쟤가 여기 왜? 라일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도희에게 질문 한번 잘못했다가 신상까지 털린 여학생이 도희의 팬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여학생이 이곳을 찾은 건 악의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라일은 주의 깊게 여학생을 들여다봤다. 여학생은 몰려 있는 사람들 뒤로 안절부절못하며 왔다 갔다 하길 반복하더니 이내 뒤를 홱 돌았다. 그 행동이 퍽 수상했다. 라일은 촬영장에서 멀어지려는 여학생을 황급히 뒤쫓았다.

“학교 갈 시간 아니에요?”

라일이 여학생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촬영 팀을 둘러싸고 있는 통에 공원의 좁은 옆길로는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여학생은 갑작스레 등장한 라일을 위아래로 쳐다보며 경계했다. 길목에는 라일과 여학생, 단둘뿐이었다. 연예인이 갑자기 말을 걸다니. 당황한 여학생이 계속해서 쭈뼛거리자 라일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촬영 대기 중이라 시간이 좀 남아서.”

라일은 눈을 빛내며 여학생이 꼭 쥐고 있는 오렌지 주스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건 뭐예요? 누구 주려고?”

라일이 주스를 가리키자 별안간 도둑질이라도 들킨 듯 여학생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라일은 손을 덜덜 떨고 있는 여학생의 태도로 보아 그 학생이 불길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조급함을 뒤로하고 여학생을 달래듯 그녀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아, 혹시 내 건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은 라일은 여학생 손에 들려 있는 주스를 빼앗아 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학생이 몸을 홱 돌려 주스를 품에 안았다.

“안 돼요!”

그 모습을 본 라일의 눈이 몇 초간 가늘어졌다.

“이런……. 줄 사람이 따로 있나 보네. 알았어요. 전해 줄게요.”

라일은 음흉한 미소를 감추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학생은 잠시간 망설이는 듯하더니 손을 천천히 뻗었다. 여학생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 이거……백도희 씨한테 전해 주실래요?”

“그럼요. 이거 말곤 없어요?”

“이것도요.”

여학생은 손수 편지를 써 온 건지 빨간색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편지는 예쁘게 접혀 있을 뿐 봉인되어 있진 않았다. 라일은 유리병에 든 오렌지 주스와 편지 봉투를 건네받았다.

“꼭 백도희 씨한테 전해 주셔야 해요.”

여학생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라일에게 한 번 더 경고했다.

“어머, 그럼요. 나만 믿어요.”

‘이게 대체 뭐라고 저렇게 비장해?’

상한 주스인가 싶어서 밑에 제조 기한을 보면 유통 기한도 한참 남아 있는 주스였다. 라일은 유난히 벌벌 떨고 있는 여학생의 태도보다 훨씬 싱거운 선물에 실망했다.

주스를 건네자마자 도망치듯 달아나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확인한 라일은 열려 있는 편지 봉투를 당연한 듯 열었다.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어. 우리 오빠 괴롭히지 마.]

편지 봉투 안에는 혈흔으로 보이는 빨간색 글자가 적혀 있었다. 탁한 색을 띤 채 말라붙어 있는 거로 보아 혈서가 분명했다.

라일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퍼붓는 혈서까지 쓸 정도인데, 고작 주스 한 병 건네고 가다니. 저주를 할 거면 적어도 죽은 쥐 정돈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 문득 라일의 머릿속을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주스 안에 뭔가 있나?’

라일은 주스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어딜 봐도 딴 흔적이 보이질 않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니 주스 위에 씌워져 있어야 할 비닐이 없었다. 라일의 입꼬리가 비뚜름해졌다.

“선배님, 이거 어떤 팬이 주고 가던데요?”

라일은 도희가 잠깐 짬을 내 쉬는 타이밍을 노려 그녀에게 접근했다. 열려 있던 편지 봉투는 이미 라일이 단단히 봉인해 둔 상태였다.

“네가 웬일이야? 이런 것도 전해 주고.”

팬이 전해 주는 거라면 당장 쓰레기통에 버릴 것 같은데. 도희는 라일을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라일이 기분 나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가 싫은 거지 팬들이 싫은 건 아니거든요?”

“그래, 팬들이 무슨 죄니. 고맙다.”

도희가 주스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도희는 주스를 옆에 두고 편지를 먼저 뜯어 보려고 했다. 그때, 라일이 다급하게 이를 막았다.

“팬이……! 주스부터 마시라고 하던데요.”

“뭐? 편지는?”

“나중에 보고요. 촬영…… 촬영 끝나고 봐 달라고 했어요.”

라일은 일부러 말을 지어냈다. 도희가 편지를 최대한 늦게 봐야 주스를 마실 수 있었다. 만일 불길한 저주 편지를 먼저 보게 된다면, 주스를 안 마실 수도 있으니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진 몰라도 도희에게 해를 끼칠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9월이 다 가는 날씨였지만, 가을볕은 여름 볕만큼이나 따가웠다. 선선한 공기와 달리 햇볕 아래서 긴 촬영을 하느라 목이 타는 도희는 라일의 예상대로 주스를 곧장 따더니 이내 쭉 들이켰다.

“맛이 좀…… 이상하다.”

“그래요?”

도희의 그 말에 라일의 표정은 더 음흉해졌다. 하지만 도희는 특별한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바로 다음 촬영을 위해 일어섰다.

다음 신은 수향과 지환이 이별 후, 우연히 공원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이었다. 집 앞을 거닐고 있던 수향 앞에 지환이 나타나고, 수향은 지환을 매정하게 스쳐 지나간다. 지환은 그런 수향을 잡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안타까운 장면. 그리고 그 뒤에는 그런 지환을 지켜보는 라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공원의 끝에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레디, 액션!”

두 사람이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갔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지환과 수향의 애절한 눈빛이 클로즈업됐다. 그 뒤에는 그런 두 사람을 슬픈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라일이 비친다. 천천히, 느릿하게 서로에게 다가가는 두 사람. 지환은 수향에게 눈을 떼지 않지만, 수향은 지환과 마침내 가까워졌을 때, 애먼 곳을 바라본다.

그때, 지섭의 눈빛이 변했다. 멀리서 봤을 땐 그저 감정에 몰입해 허공을 응시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도희의 낯빛이 창백했다. 게다가 가까이서 본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대로 NG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그 순간 도희의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백도희!!”

도희가 맥없이 쓰러지는 걸 지섭이 가까스로 받아 냈다. 그 순간, 몸을 숨기고 있던 라일이 벌떡 일어섰다. 스태프들과 감독들, 그리고 그 장면을 소리 없이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백도희 씨 왜 그래?”

김 감독은 도희가 오랜 야외 촬영으로 잠시 현기증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희의 몸을 받치고 있던 지섭이 그녀를 바닥에 누이자 김 감독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섭은 그녀를 다급하게 흔들고 숨을 쉬는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김 감독이 소리쳤다.

“119 불러! 빨리!”

* * *

“네, 이번 일은 무척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완은 최 대표와 전화를 마친 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새벽, 주완은 얼마 전 술을 함께 마셨던 최 대표에게 연락을 받았다. 최 대표는 새로 올라온 영상이 아무래도 주완인 것 같아 연락했다며 영상을 확인해 보길 권했다. 그리고 최 대표의 눈썰미는 맞았다. 얼굴이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그곳에는 주완과 도희가 나란히 택시를 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최 대표는 주완의 부탁으로 영상을 모두 지웠고, 그 후론 어느 사이트에서도 영상이 올라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영상은 순식간에 모든 사이트에서 내려갔고, 더는 영상이 퍼질 일도 없었다. 주완은 감사의 뜻으로 최 대표에게 ‘N페이’에 CHK백화점 할인 혜택을 부여하기로 했고, 최 대표는 그 대가에 충분히 만족했다.

“누구 소행이지?”

“저, 그게…….”

잠시 머뭇거리던 정 비서는 냉랭한 주완의 표정을 보곤 말을 이었다.

“아이피 추적한 결과 한 PC방이었는데요. 그곳에 찍힌 CCTV 주인이 바로 류라일 씨랍니다.”

“뭐?”

‘류라일’이란 이름에 주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시도 때도 없이 도희를 끌어내리려고 하더니, 그런 영상을 찍었던 건가.’

“CCTV 영상 확보하고, 목격자는?”

“주변에 있는 남학생 몇 명이 사인을 받았답니다.”

“목격자 증언 확보하고. 그리고 김 감독 뇌물 거래 내역도 알아봐.”

주완은 라일이 일전에 청담동 룸 복도에서 악의를 가지고 중얼거리던 말을 떠올렸다. 도희에게 가진 열등감, 어떻게든 도희를 끌어내리겠다는 집념. 그래도 연예인 신분이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완은 라일을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김 감독이라면 도희 씨가 있는 드라마 총괄 감독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대로 정 비서가 본부장실을 나가려는데, 그가 문 앞에서 핸드폰을 꺼내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보, 본부장님.”

순식간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정 비서가 말을 더듬으며 뒤를 돌았다. 주완은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말고 정 비서를 다시 바라봤다.

“백도희 씨가…….”

주완은 도희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졌다.

“말해.”

“보, 본드를 마시고 지금 응급실에 실려 가셨답니다.”

정 비서의 말에 주완의 심장이 쿵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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