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음모
효주는 두렵지만 기대되는 듯한 얼굴로 카페 앞에 도착했다. 주완에게 모욕당하고 며칠 동안 여우 같은 도희의 얼굴이 떠올라 제대로 잠을 청하지도 못했다. 어떻게든 도희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데 효주 머릿속엔 그만한 계획이 떠오르지 않았다. 효주는 자신이 당한 굴욕보다 몇 배의 고통을 안겨 줘야 분이 다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은 약점을 쥐여 줄 사람을 찾았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도희의 엄마였다. 인터넷에 조금씩 묻히긴 했지만, 순자가 각종 도박장에서 백도희 엄마라고 떠벌린 증언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풍채가 큰 순자와 도희의 닮은 점을 찾을 수 없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무시했었다. 하지만 조사한 결과, 그녀는 도희의 엄마가 맞았다.
‘효주 걸 넘본 걸 후회하게 해 줄 거야!’
효주는 유리창 안쪽에서 천박하게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순자를 발견하곤 더러운 벌레를 보듯 미간을 찌푸렸다. 효주는 도희의 약점을 파던 중, 순자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돈이 없어 잠시 끊고 있지만, 그녀가 도박에 중독되었다는 것과 남자를 밝힌다는 것, 그리고 돈이라면 뭐든 한다는 것이었다. 순자는 도희의 소속사에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행패를 부리고,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뺨을 때릴 정도로 안하무인이라고 들었다.
순자에 대한 정보를 듣고도 효주는 처음에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인데, 엄마라면 효주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딸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단 말에도 순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액수를 말하고, 약속 장소에 나왔다. 효주는 잠시 도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효주 걸 빼앗아 갔으니 나쁜 언니야!’
“안녕하세요.”
효주는 사업을 할 때 보이는 딱딱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으며 순자에게 다가갔다. 순자는 생각보다 어린 효주의 등장에 놀라며 그녀가 자신에게 원하는 만큼의 액수를 줄 수 있을지 효주의 행색을 살폈다. 남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순자는 효주가 착용하고 있는 명품에 관해 빠삭했다. 효주가 걸치고 있는 옷과 가발, 액세서리 등은 얼추 값을 매기면 오천만 원이 훌쩍 넘었다. 몇 초 만에 스캔을 모두 마친 순자는 제 약점을 물으러 온 효주에게 사근사근하게 눈웃음을 쳤다. 효주는 순자의 음흉한 눈빛에 잠시 움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았다.
“그럼, 얘기하세요!”
효주는 본론부터 꺼냈다.
“먼저 입금부터 해 주셔야 제가 말씀을 드리죠.”
대뜸 돈부터 요구하는 순자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효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줌마한테 진짜 약점이 있다는 걸 어떻게 믿고요?”
말투에선 여전히 어린 티가 났지만, 그렇다고 효주가 바보는 아니었다.
“힌트를 드리자면, 출생의 비밀입니다. 이건 CH그룹도 모르는 얘기고요.”
순자는 대단한 비밀을 감춰 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도희를 낳았으나 그의 아버지조차 모른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출생의 비밀이라니. 그럼 아버지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건가. 효주는 떨떠름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어 순자의 계좌에 오천만 원을 입금했다. 그리곤 곧장 핸드폰에 내장되어 있는 녹음 버튼을 누르곤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건 효주가 나름대로 생각해 낸 최대 보험이었다.
“우선 절반 드릴게요. 나머지는 약점을 듣고 드리고요.”
순자는 핸드폰을 들어 제 통장에 오천만 원이 입금된 걸 확인하곤 말을 이었다.
“유부남이에요. 가정이 있는 평범한 직장인 남자였고, 다방에 들렀다가 눈이 맞아서 하룻밤을 치르게 됐고, 그 뒤로 몇 번 더 만나고 백일도 못 가 끝났죠.”
“불륜이요?”
효주의 천진난만한 반응에 순자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도희를 지우라고 하더만요. 원하지 않는 아이라면서. 나는 그이의 집이며 회사며 찾아가서 돈이라도 달라며 난리를 쳤고, 결국 그 사람은 이혼하고 회사에서도 쫓겨났죠.”
효주는 자신이 상상해 본 적 없는 도희의 끔찍한 과거를 듣자 그녀가 더 가여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악역은 그 언니였다. 효주는 귀를 쫑긋 세우고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효주는 흥미로운 동화를 듣는 것처럼 몸을 바짝 당기고 눈을 반짝이며 순자를 바라봤다.
“그래서요?”
“노숙잡니다, 그 사람.”
“네?”
효주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숙자라고요. 이혼 후 술에 절어 살다가, 실수로 도로변에 누웠다는데 하필 버스에 지나가서 다리를 잃게 됐다나 뭐라나. 아마 그 인간 도희가 지 딸인 거 알면 돈 뜯으러 오고 난리 날걸?”
효주는 심술궂은 조소를 섞어 가며 한때 사랑했던 남자의 비극을 늘어놓는 순자를 보며 소름이 끼쳤다. 효주는 제 앞에 있는 순자에게 불쾌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줌마는 아버지 얘길 안 했어요?”
“미쳤어요? 그 인간이랑 내 돈 나눠 갖게?”
순자는 도희를 돈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름대로 기업 운영을 배우면서 온갖 돈의 노예는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자는 그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었다. 효주는 어느새 순자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주완 오빠…… 아니, CH그룹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확실하지. 알았으면 그 여자가 도희랑 차 서방 결혼시켰겠나.”
효주는 순자의 입에서 나온 ‘차 서방’이란 말이 심기에 거슬렸지만, 우선은 질문을 끝까지 하기 위해 겨우 침착함을 유지한 채 말했다.
“당시에 그렇게 돈이 필요했으면…… 아이는 왜 낳았죠?”
“돈이 없었어요. 수술할 돈이. 도박으로 다 써서.”
“낳고 버릴 수도 있었잖아요?”
“내가 버림받아서 이 꼴이 났는데. 이미 낳은 아일 어째. 그래도 도희 년은 저 알아서 잘 크긴 했죠. 밥을 안 줘도 울지도 않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집에 살면서 불평 한마디 안 하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쓸 만했어요.”
딸에게 쓸 만하다니. 효주는 부모님의 넘치는 사랑을 독차지하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혀 본 사람이었다. 손에 쥔 게 많아도 자식에게 더 주고 싶어 하는 게 부모인 줄로만 알았는데, 효주는 이런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효주는 불쾌하게 뒤섞인 복잡한 감정에 땀에 젖은 손으로 제 옷자락을 쥐었다.
“이게…… 언니의 약점이 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뭐 도희가 연예인이니까 언론에 알리면 이미지 타격 정도 주겠죠. 그러려고 물은 거 아니에요?”
그래도 딸인데. 그래도 엄만데. 효주는 아무렇지 않게 연예인인 제 딸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방법을 내놓는 순자가 혐오스러웠다. 동시에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도희의 이미지가 단숨에 바뀌었다.
‘그 언니도 분명 이럴 거야.’
어린 시절부터 효주의 아버지는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노숙자 아버지에, 모성애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 이런 사람 밑에서 도희가 제대로 자랐을 리가 없었다. 싫은 소리 한 번 듣지 않고 자란 효주는 도희에게 주완을 넘겨선 안 될 중요한 명분을 찾은 기분이었다.
“어때요, 값어치 하죠?”
순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었다. 도희의 약점을 잡았는데도 효주는 어딘가 꺼림칙하고 불쾌한 기색을 지울 수가 없었다. 효주는 잠시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은 순자에게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효주 눈에 순자는 그저 돈만 밝히는 마녀 같았다.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효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촬영을 마치고 간만에 집에 돌아온 라일은 들어오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는 튀지 않는 옷을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단단히 눌러쓴 채 PC방으로 향했다. 처음엔 집에서 도희의 영상을 올릴 계획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자칫 신고당해 아이피 추적이라도 당한다면 곤란해질 게 뻔했다.
라일은 일부러 집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PC방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온몸을 꽁꽁 싸맨 덕분인지, 사람들은 라일에게 관심 갖지 않았다. 라일은 편한 마음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열애중인 ㅂㄷㅎ 양다리임]
라일은 피아노 연주를 하듯 신이 나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스크 안에서 교활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차 안에서 우연히 찍은 건데, 여자는 ㅂㄷㅎ 남자는 그 전남편이었음.]
영상에는 간단한 설명만 덧붙였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하지만 머리 길이, 마르고 굴곡 있는 몸매의 그녀를 ‘ㅂㄷㅎ’라고 칭한 것만으로 사람들은 그녀가 백도희란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으리라. 라일은 지섭과의 열애설로 이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걸 기뻐했다. 벌써부터 다음 날 아침 쏟아질 스태프들의 불쾌한 눈초리가 상상됐다. 라일은 당황스러운 백도희의 얼굴을 보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해졌다.
영상을 올리고 반응은 서서히 나타났다. 영상을 올리는 데 오래 걸리진 않았으나 라일은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싶어서 한동안 PC방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엥? 이거 진짜 ㅂㄷㅎ 맞음?]
[실루엣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둘이 다시 합치는 거임?]
[헐 ㅇㅈㅅ 어캄? 팬들 난리 나겠네]
댓글은 삼십 분 만에 백 개가량 쌓였고, 라일은 댓글이 하나씩 올라올 때마다 기쁨을 숨기지 않고 키득거렸다. 그녀의 음흉한 웃음에 옆에 있는 남학생이 그녀를 흘긋흘긋 쳐다볼 정도였다. PC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라일은 마지막 확인만 하고 컴퓨터를 끄려던 차였다.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자마자 라일을 즐겁게 하던 댓글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 이거 왜 이래?”
라일은 F5키를 계속 눌러대며 확인했지만, 댓글은 물론이거니와 라일이 정성 들여 올린 영상까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라일은 처음엔 자신이 버튼을 잘못 눌렀거나 알 수 없는 오류로 게시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라일은 처음에 올렸던 것처럼 영상을 빠르게 다시 올렸다. 하지만, 이번엔 영상이 1분도 채 되지 않아 곧장 삭제되었다.
“뭐야?”
불쾌한 라일이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탕탕 내리쳤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남학생들의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라일의 눈엔 뵈는 게 없었다. 라일은 답답한 듯 마스크를 턱 아래로 끌어 내리고 영상을 다시 한번 올렸다. 그리고 영상은 다시 삭제되었다.
“아악!”
라일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마우스를 집어 던지자 남학생들이 라일 쪽을 대놓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라일은 주변의 이목을 느끼곤 다시 마스크를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곤 이번엔 올리려던 커뮤니티 대신 다른 커뮤니티를 노렸다. 처음 올리려던 사이트보다는 파급력이 약하지만, 어느 정도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사이트였다. 하지만 그곳에 올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십 분 정도 버티나 싶더니 영상이 삭제되었다. 라일은 PC방 사용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은 걸 깨닫고 충전하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라일은 주변의 시선이 여전히 제게 몰려 있는 걸 깨닫지 못하고 다급하게 무인 기계로 다가갔다.
“야.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연예인 아니야? 마스크 끼고 있잖아.”
“연예인이 이 시간에 PC방을 왜 오냐. 게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가.”
막 스무 살이 넘은 앳된 남학생들은 호기심에 끊임없이 라일을 살폈다. 그때 자리로 돌아온 라일은 자리에 털썩 앉아 비장한 얼굴로 또 다른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러나 어딜 들어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유명 사이트란 유명 사이트는 다 돌아봤지만, 라일이 올린 영상은 불과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모조리 지워졌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허탕만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참다못한 라일이 또다시 소리를 지르려고 의자를 뒤로 홱 뺀 순간 의자가 턱하고 어딘가 걸려 멈췄다.
“뭐야?”
라일이 뒤를 돌자 그곳에는 남학생 한두 명이 종이와 펜을 들고 쭈뼛쭈뼛 서 있었다.
“저, 싸인 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라일은 황급히 마스크 뒤로 미소 지으며 종이와 펜을 받아 들었다.
“저 여기 있는 거 비밀이에요.”
라일은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지 않길 바란다고 덧붙이며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찡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남학생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어떻게 알았지?’
라일은 남학생들이 당연히 자신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누군지 전혀 몰라 떠보기 위해 사인을 해 달라고 한 것이었는데, 순순히 제 이름을 쓰며 사인을 하는 라일의 모습에 남학생 눈이 휘둥그레졌다.
“류, 류라일……!”
평소 팬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예능이며 드라마며 얼굴을 비춰 왔던 라일이기에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뒤늦게 그녀가 류라일임을 알아차린 남학생들은 다음 날 류라일의 사인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일 생각에 히죽히죽 웃었다.
라일은 사인을 대충 해 주자마자 PC를 끄고 일어섰다. 더는 남학생들 때문에 영상을 올리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PC방을 나서는 라일은 분한 듯 입술을 짓이겼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영상을 모두 내려 버리다니.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라일 생각에 딱 한 명뿐이었다. CH그룹 후계자 차주완.
‘그 인간은 왜 아직까지 붙어 있는 거야?’
지섭과 열애설 난 지가 언젠데. 라일은 도희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는 주완이 못마땅했다.
“악! 짜증 나!”
라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에 극심한 분노를 느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 이거…… 백도희 씨한테 전해 주실래요?”
예상치 못한 기회가 생겼다. 라일에게 수상한 음료를 전해 준 건 다름 아닌 시사회 영상으로 도희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 여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