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39화 (39/71)

39화 모든 건 널 위해

“어디로 가는 거예요?”

택시에 탄 도희가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주완이 기사에게 말한 주소는 자신의 집도, 그의 본가도 아니었다.

“네 집엔 또 들여보내 주지 않을 거 아냐.”

“그래서요?”

주완은 도희의 질문에 잠시 상념에 잠긴 듯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곧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좀 괜찮나?”

“왜 따라왔어요?”

도희 역시 지지 않고 그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자 주완이 눈썹을 씰룩였다.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서. 기회잖아.”

도희는 어딜 가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말해 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더 캐묻는 것을 그만뒀다. 그렇다고 택시에서 내리기엔 좀 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얘기 끝나는 대로 내 차로 안전하게 돌려보낼게.”

도희는 우선 주완이 가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도착한 곳은 잘록한 곡선을 그리며 하늘 높게 뻗어 있는 외형이 깔끔한 건물이었다. 얼핏 대형 쇼핑센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주완을 엉겁결에 따라 내린 도희는 높다란 고층 건물을 올려다봤다. 주완은 건물 외관을 감상하는 도희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안으로 향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뒷모습을 발 빠르게 따랐다.

주완이 들어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도희는 행여 직원 중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주완의 재킷을 여전히 뒤집어쓴 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또 주완은 그녀를 안내하지 않고 내렸다. 도희는 그곳으로 천천히 발을 들였다. 이제 보니 그곳은 주완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펜트하우스였다. 고층 빌딩이라 가장 꼭대기 층이라면 아마도 레스토랑이나 라운지 바 정도로 상상했는데. 설마 주완의 집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도희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혼자 사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주완이 부엌으로 가며 도희에게 말했다.

“앉아.”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 탁 트인 야경이 보였다. 도희는 절경을 더 가까이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얌전히 소파 한구석에 앉았다.

“할 얘기가 뭔데요?”

“일단 차부터 마셔.”

주완은 어느새 풀잎과 새가 조화롭게 금테로 어우러진 전용 트레이를 도희 앞에 내밀었다. 접시까지 세트로 갖춘 찻잔은 복고풍 유럽 스타일이었다. 분홍색 꽃과 나비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찻잔과 주전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 고풍스러웠다. 찻잔에 벌써 차를 우려낸 건지 식기를 트레이에서 천천히 꺼내는 주완의 손놀림이 능숙했다. 두 사람 사이에 식기의 달그락 소리와 막 열이 오른 물의 기포가 낮게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팅을 마친 주완은 뜨겁게 우린 차를 도희 앞에 놓인 찻잔에 따랐다. 그러자 향긋하고 포근한 허브 향이 잔잔하게 퍼졌다. 도희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잠시 잊은 것처럼 마음이 진정됐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주완은 언제부턴가 생전 마시지 않던 차를 즐겨 마시는 듯했다. 매번 이렇게 차를 내오는 걸 보면.

“언제부터 차를 즐겼어요?”

“네가 없고 나서. 진정하기 좋더라고.”

다소 직접적인 주완의 말에 도희는 할 말을 잃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도희는 뜨끈해진 찻잔을 두 손에 쥐었다.

“마시면서 들어.”

뜨거운 차를 홀짝 마신 도희에게 주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약혼 기사는 내 의지가 아니야. 어머니가 멋대로 낸 거지.”

“하지만 결국 하게 되겠죠.”

도희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부현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자 주완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가 마름모꼴로 세워졌다.

“안 할 거야. 그리고 지금 하는 말은……. 후, 내가 이 말을 하는 게 맞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도희는 불안에 떠는 그의 눈빛을 잠잠히 바라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귀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무슨 말이라도 들어 보잔 심산이었다.

“말을 해도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모든 걸 다 말하고 나면 내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자책하게 되진 않을지, 혼자 모든 걸 판단한 내가 더 싫어지진 않을지. 나한텐 모든 게 걱정스럽고 어려워.”

도희는 에둘러 말하는 그의 요점이 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어느 것 하나 주제가 드러날 만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철두철미하고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주완이 확신하지도 못할 말을 뱉으려는 게 의아했다. 도희는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낯설게 느껴졌다. 주완은 겉으로 얼핏 보기엔 침착해 보였지만, 입술을 연신 달싹이며 마른 입술을 축였다.

“네 걱정이 너무 많아서, 내가 오만해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무슨 말이에요? 이제 와서 감정 호소하는 거예요?”

“변한 적 없단 소리야. 내 모든 행동이 내 입장에선 모두 널 위한 행동이었다고.”

“하! 무슨…….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요?”

“못 믿겠지만 사실이야. 그 당시엔……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주완은 병에 관한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도희가 먼저 선수 쳤다.

“대표님께 들었어요. 독립 영화 투자해 줬다는 거.”

설마 재성이 그 사실을 말해 버렸을 줄 몰랐던 주완은 자못 당황한 얼굴로 다음 말은 잊은 채 도희 얼굴을 들여다봤다.

“투자해 준 건 고마운데요, 돈 몇 푼으로 내 인생을 구해 냈다느니 그런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네요. 내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것도 당신이니까.”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하지만 주완의 말을 잠자코 들을 정도로 도희의 인내심이 남아 있질 않았다. 도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대단한 얘기인가 들어 볼까 했는데, 역시나 들어 볼 필요 없는 내용이었네요. 변명은 여기까지만 들을게요. 하소연하고 싶은 거라면 하지 말고 혼자 앓아요.”

“나는-.”

“나도 그랬으니까.”

도희는 그대로 미련 없는 걸음걸이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를 누르자, 1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가 느릿하게 올라왔다. 또다시 저를 보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을 하며 모자를 깊게 눌러쓰는데, 주완이 뒤에서 도희를 돌려세웠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엔 이전처럼 힘이 있지 않았다. 그의 핏기 없는 혈색과 애달픈 눈동자가 도희의 동정심을 미미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동요하던 것도 잠시, 도희가 마음을 굳게 먹었을 때였다.

“내가 많이 아팠어.”

주완의 뜬금없는 고백에 도희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안 아팠을 것 같아요?”

도희는 주완의 말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대로 도희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맞닥뜨렸다.

“오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서 있는 건 장효주였다. 효주는 애절하게 도희를 쳐다보는 주완을 보자마자 도희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쏘아봤다. 그러더니 이내 붉으락푸르락 변한 얼굴로 도희를 힘껏 확 밀었다.

타악! 효주의 악력에 뒤로 넘어갈 뻔한 걸 주완이 잡아챘다.

“오빠! 효주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도희는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 전남편, 그런 전남편 집에 거리낌 없이 찾아온 약혼자.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도희는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에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희는 주완의 품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실었다.

“이 언니가 왜 여기 있어!!”

효주는 주완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고, 동시에 도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제 몸을 실었다. 도희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자신을 표독스럽게 노려보고 있는 효주와 그녀의 손목을 잡고선 놓지 못하고 있는 주완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도희의 입가엔 약간의 조소도 머금고 있었다.

“차주완 씨. 약혼 축하드려요.”

“다음에 다시 얘기해.”

“아니요. 얘기는 끝났어요. 꼭 결혼하시길 바라요. 다신 이혼하지 마시구요.”

도희는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약혼자로서 처음 보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제 앞에서 드디어 사라졌다.

더 어둑해진 탓인지 도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택시를 잡는 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도희는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제 하루를 돌이키며 실성한 듯 웃음을 피식피식 터트렸다. 백미러로 흘긋흘긋 그녀를 훔쳐보는 기사는 그녀를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눈치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도희는 그대로 창밖의 풍경을 감상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주완의 말은 결국 감정 호소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그가 오만했기에 실수를 저질렀다는 건데, 도희의 그간 아픔을 단순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기엔 그 상처가 너무 깊었다. 그래 놓고 ‘변하지 않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런데도.

도희는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차 문을 열었다. 심각해 보이는 도희의 표정 때문이었는지 기사는 마음대로 하라며 흔쾌히 에어컨을 껐다. 스산한 바람을 일부러 맞으며 도희는 머리를 식혔다. 머리칼이 엉망으로 흩어지며 도희를 귀찮게 했지만, 개의치 않고 바람을 만끽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날려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 * *

“왜 그 언니가 이 집에 있어?”

도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마자 효주가 이번엔 주완에게 따져 물었다. 주완은 효주의 뾰족한 목소리를 듣고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넋이 나간 채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효주는 그런 주완을 놓치지 않고 쫓았다.

“오빠!”

효주가 바로 제 옆에 앉아서 보채도 주완의 눈엔 효주가 보이지 않았다. 주완은 바로 옆에서 효주가 연신 소리를 치는데도 도희가 뱉은 말을 되감기에 바빴다.

‘나는 안 아팠는 줄 알아요?’

처음부터 쉽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진 않았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도희의 반응에 주완은 자신이 과연 도희에게 다가가도 되는지 다시금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얘기를, 어떻게 깊숙하고 차분하게 꺼낼 수 있을까.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으려나. 주완은 생전 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방적이고 공개적인 애정 공세 방식을 떠올렸다.

아니다. 그랬다간 도희가 제 마음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지한 얘길 털어놓자니 도희는 주완에게 그만한 곁을 주지 않았다. 주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 말 듣고 있어?”

효주가 자리를 옮겨, 주완의 얼굴 앞에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래도 주완의 초점이 돌아오질 않았다. 효주는 불쾌한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주완의 정강이를 발로 툭 찼다. 그제야 주완이 눈을 치켜뜨고 효주를 올려다봤다.

“효주가 약혼자야! 저 여잔 끝난 여자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여자기도 해.”

“오빠, 오빠 효주한테 어떻게…….”

효주는 상처받은 얼굴로 울먹였다. 그러자 주완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효주야. 난…….”

“듣고 싶지 않아! 말하지 마! 한마디도 하지 마!”

효주는 주완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두려웠는지 그가 더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게 한 채 도망치듯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음질쳤다. 주완은 효주가 걱정되긴 했지만, 현재 주완의 온 마음은 도희에게 기울어져 있어 그녀를 쫓을 여력이 없었다.

주완은 잠시 머리를 괴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도희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무언가 놓치고 있는 듯 찜찜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주완은 회의실에서 울던 도희의 모습을 떠올리고 심장이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체 놓치고 있는 게 뭘까. 주완은 차근차근 도희에게 다가가야겠다고 결심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정 비서. 오늘 도희 회사에서 한 미팅 좀 알아봐. 사소한 것까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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