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다시 시작하고 싶어
주완은 SP엔터테인먼트 사옥에 들어오며 특별한 긴장감에 설렜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주완이 새로 투자하게 된 영화 건으로 내일 황재성 대표와 간단한 식사 자리가 있었다. 이제는 도희가 주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E엔터테인먼트도 새로운 투자를 해서 사업을 확장하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 도희가 회사에 들른다는 소식을 듣고 약속을 옮겼다. 황재성 대표에게는 내일 다른 일정이 생겨 회사에서 짧게 미팅하는 거로 식사 자리를 대체하자고 했다. 정 비서는 이를 조심스레 반대했지만, 주완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보고 싶다.]
문자를 보낸 지 며칠이 지났다. 며칠 동안 답장을 기다려도 도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도희에게 묵묵부답인 채로 며칠을 지내는 동안 주완은 그간 도희를 위한답시고 다짐했던 것을 모두 무너트렸다.
평생 불행에 놓일 것 같다는 핑계로 도희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훌쩍 떠난 것,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 외면한 것, 돌아와서도 도희를 욕심내지 않는 척한 것, 괜찮은 척한 것. 모든 게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인정했다. 주완은 도희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과거의 사정을 모두 말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이제라도 하나씩 되돌리고 싶었다. 도희가 받아 주지 않을 게 겁도 났다. 주완은 최선을 다해도 도희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그 이상은 강요하지 않을 것도 다짐했다.
굳센 다짐을 끝낸 주완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약혼 기사에 대해 설명하는 일이었다. 기사가 나가기 바로 전날, 집에 무작정 들어가 도희를 치료해 주고, 보고 싶단 말조차 거짓된 마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다.
황재성 대표와의 미팅은 간단히 끝났다. 황재성 대표는 일부러 도희 얘길 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그의 비서가 들어와 ‘배우 백도희 씨가 회의실에서 미팅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재성은 주완의 눈치를 봤고, 주완은 그 얘길 못 들은 것처럼 일 얘기로 넘겼다.
주완은 미팅이 끝나자마자 회사 안에 있는 회의실을 일부러 찾아다녔다. 층마다 복도를 이리저리 거닐고, 회의실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유리 벽으로 된 3층 회의실에서 도희와 비슷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다행히 미팅이 끝났는지 도희는 혼자였다. 주완이 때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문을 살짝 열었을 때였다.
“흐윽…… 우흐읍!”
대본인지 뭔지 모를 종이 뭉치를 손에 쥐고 서럽게 우는 도희가 어깨를 떨었다. 주완은 천천히 무언가에 끌려가듯 회의실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백도희.”
도희를 나직이 부르자 놀란 그녀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주완의 물음에 도희는 마치 설움이 북받쳐 오른 것처럼 간신히 참으려던 울음을 도로 터트렸다.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뱉길 반복하며 여러 줄기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우악스럽게 닦아 냈다. 도희는 주완의 등장이 결코 반갑지 않은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주완은 증오 어린 시선에 사뭇 당황했다. 만나면 해 줄 말이 여럿 있었는데, 그 눈빛을 보자 하려던 말이 모두 잊혀졌다.
촤륵-! 별안간 도희가 손에 쥐고 있던 종잇장을 그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날아간 종잇장은 공중에 이리저리 흩어졌다. 두 사람 사이로 공중에 뜬 종이가 모두 내려앉자, 도희가 아직까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모르는 척하자고, 내가 말했죠.”
도희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주완은 도희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확신했다.
“무슨 일인데.”
“제발……!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난 게 무슨 일이에요! 대체 왜 자꾸 나타나요? 왜 자꾸 악몽을 되살리게 하냐구요!”
“악몽……?”
주완은 잠시 도희의 말에 제가 하려던 말을 해도 될지 망설였지만, 곧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이번이 아니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약혼 기사는-,”
“누가 궁금하대요?”
도희는 주완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약혼’이란 단어가 들리자마자 그의 말을 잘랐다. 도희는 더는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듯 제가 던졌던 종이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그 손동작이 하도 거칠어, 주완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두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주완은 떨어진 종이들을 줍는 도희를 지켜보다가 제 앞에 떨어진 마지막 종이를 주워 들었다. 종이를 확인해 보니, 단순한 대본 같이 보였다.
[갑자기 자궁 문이 열려 아이를 잃게 된 산모는 현재 자궁 경부 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유산과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부모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거기까지 읽었을 때, 도희가 사납게 주완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그렇게 도희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주완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잠깐만.”
“놔요.”
“할 말이 있어.”
“듣고 싶지 않아요.”
“도희야.”
주완이 그렇게 불렀을 때, 도희는 주완이 잡아챈 손목을 매섭게 뿌리쳤다. 그를 노려보던 도희가 더는 그를 상대하기도 지친다는 듯 등질 때였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주완의 묵직한 목소리에 도희가 다시 천천히 주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도희는 감격한 표정도, 놀란 표정도 아니었다. 주완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도희의 얼굴을 세세히 살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염치없는 거 알아. 다 설명할게. 약혼 기사부터 지금까지 왜 그랬는지-.”
“나랑 장난해요?”
“……진심이야. 그 어떤 순간보다 간절해.”
“아니면 내가 만만한가?”
도희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조소를 띠었다. 그러더니 곧 그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쏘아봤다.
“내가 그렇게 말해 달라고, 뭐가 문젠지 대화로 해결하자고 할 땐 모르는 척하더니! 3년 내내 내가 어떻게 살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뭐라구요?”
“일단 어디 가서 얘기 좀 해.”
간곡하게 부탁하는 투로 주완이 그녀에게 손을 뻗을 때였다. 도희는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난 당신 아내도 아니고, 다신 당신과 얽히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당신이 무슨 사정이 있었든지 간에 불행했던 우리 결혼 생활, 그리고 이혼한 후 그 시간들. 절대로 보상 못 해요. 그 사정이 뭐든 난 이해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구요.”
“…….”
“당신이 죽었다면 모를까.”
도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완의 눈빛이 몹시 동요했다. 도희의 마지막 말이 주완의 가슴 깊숙한 곳에 눌어붙었다. 그 말이 귓가에서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주완은 손이 제게 닿는 것조차 경멸한다는 듯한 눈빛을 한 도희에게 더는 다가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는 도희를 차마 붙잡을 힘이 없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온 도희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희는 자신의 눈물과 바닥에 쓸려 얼룩덜룩해진 대본을 꼭 쥐었다. 그녀는 사무실에 맡겨 두었던 커다란 가죽 토트백을 챙겼다.
“가게?”
성이 난 사람처럼 가방을 챙기고 있던 도희 앞에 황재성 대표가 불쑥 나타났다. 도희는 제 얼굴에 아직 덜 마른 눈물 자국을 성급히 지우며 그에게 묵례했다. 재성은 다행히 도희의 비통한 심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좋은 소식 있다며?”
“……네.”
“잘했어. 앞으로도 고생하고.”
재성은 진심이 담긴 격려를 건넨 뒤 도희에게 가서 쉬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재성에게 도희가 물었다.
“왜 자꾸 그 사람이 여기 있는 거예요?”
재성은 도희가 말하는 ‘그 사람’이 주완임을 짐작했다. 조금 전 미팅이 끝났으니 우연히 마주쳤을 수 있겠단 생각에 재성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안 그래도 언젠가 물을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뭐를요?”
재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도희는 저도 모르게 다소 공격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처음 장천희 감독 작품 들어갈 때, 투자 때문에 엎어질 뻔한 거 기억해?”
재성의 말에 도희의 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휘둥그레졌다. 재성은 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듯 짙은 한숨을 내뱉더니 말을 이었다.
“그때 도와준 게 차주완 대표님이야.”
“네? 그때 신생 투자 회사에서 해 줬다고…….”
“E엔터테인먼트 투자 회사 대표가 차주완이야.”
재성의 말에 도희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멎었다. 재성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도희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설명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너 힘들다는 얘기 듣고 연락이 왔더라고. 그 작품에 투자해도 되겠냐고. 너랑 정을 생각하면 꺼림칙한 제안이긴 했다만, 솔직히 내 입장에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럼 그 뒤로도 계속…….”
“그래. 투자가 어려운 작품엔 다 투자해 줬어. 이번 드라마는 아니고. 오늘 온 것도 다른 영화 투자 미팅이었다. 이젠 너도 인지도 높아졌고, 투자도 어렵지 않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다음부턴 마주치는 일 없도록 내가 신경 쓰마.”
재성의 말을 들은 도희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회사를 빠져나왔다. 나영이 데려다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좀 걷고 싶다고 말했다.
찬 공기를 쐬어 주니 마음이 한결 진정된 듯했다. 저녁때라 그런지 거리엔 가로등 불빛이 불그죽죽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희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모자를 꺼내 쓰곤 별 하나 없는 도시의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다행히 골목엔 사람들이 없었다. 도희는 좀 더 과감하게 도로변으로 나갔다.
도로변으로 나가자 깔끔한 치킨집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걷는 도희를 신경 쓰지 않았다. 도희는 좀 더 자유로운 기분으로 단출하게 치킨과 맥주를 놓고 서로를 마주 보고 웃는 커플을 눈에 담았다. 도희는 다정한 커플을 보며 자연스레 주완과의 과거 일을 떠올렸다.
‘당신이랑 이렇게 평범하게 치맥 하니까 좋다.’
‘치킨은 우리 집 셰프한테 부탁하면 깨끗한 기름에 튀겨 줄 텐데. 지금 시간이 늦었으니까…… 위생적으로 좀 그렇지 않나?’
‘그런 걸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 쓰면서 먹어요! 그냥 먹어요, 안 죽어.’
‘술도 난 조용한 곳에서 와인 한두 잔 마시는 게 좋…….’
‘차주완 씨. 그래서 싫어요?’
‘아냐. 네가 좋으면 됐지.’
‘주완 씨는 안 좋나?’
‘너랑 하면 뭐든 좋지, 난.’
‘그럼 어서 먹어요. 자요!’
평범한 데이트를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주완에게 도희는 많은 것들을 경험시켰다.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서서 먹는 것, 목장갑을 낀 아주머니가 파는 붕어빵을 먹이는 것, 코인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는 것, PC방에서 자동차 경주 게임을 하며 라면을 시켜 먹는 것 등 도희는 자신도 연예인의 신분이라 못 해 본 ‘평범한 데이트’의 로망을 주완과 모두 실천했다. 주완은 처음엔 그런 곳에 로망을 갖는 도희를 이상하게 봤지만, 도희가 웃는 모습을 보곤 덩달아 좋아하곤 했었다.
도희는 고개를 돌려, 얼른 커플에게서 눈을 뗐다. 조금만 더 바라보고 있다간 완전히 추억에 젖어 버릴 것 같았다.
‘3년 내내 내가 어떻게 살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뭐라구요?’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희가 복귀를 결심하자마자 이를 도왔다는 건, 도희를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어.’
도희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 얽히기도 했다. 결혼 생활 동안, 누구보다 사이를 되돌리고 싶었던 도희였다. 그때마다 주완은 냉랭하고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다. 변하지 않았다면, 사랑이 끝나지 않은 거라면, 우린 왜 헤어져야 했던 걸까.
“엄마. 엄마아아.”
때마침 도희 앞에 3살짜리 어린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갔다. 앞에선 엄마가 아이를 향해 손을 벌리고 있고, 아이는 누구보다 불안한 얼굴로 멀리 떨어진 엄마를 향해 걸음을 뗐다. 아이를 향한 엄마의 눈이 네온사인 아래 반짝였다. 도희는 그 광경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도 그 사람과 평범하게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가 마침내 엄마 품에 안기고, 엄마가 아이를 꼬옥 안아 들었을 때 도희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어? 백도희다!”
그때, 지나가는 청소년 둘이 도희를 보곤 크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도로변에 지나가던 몇몇이 고개를 돌리고, 순식간에 도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길을 멈춰 섰다. 도희가 모자를 눌러 써 봤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질 뿐이었다. 손바닥으로 겨우 얼굴을 가리고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도희가 엉거주춤 서 있을 때였다. 제 위로 커다란 재킷이 떨어졌다.
“가만히 있어.”
도희는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재킷에 밴 향기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편, 늦은 예능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라일은 뜻밖의 광경에 차를 세웠다. 매니저는 영문도 모른 채 다급한 라일의 외침에 우선 차를 세웠다.
“대애박.”
라일은 어정쩡하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 한가운데 도희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어어! 창문 열면 안 돼요!”
라일은 매니저의 말을 무시한 채 황급히 창문을 열고 카메라를 최대한 확대했다. 저 멀리 보이는 모자를 쓴 여자는 딱 보기에도 도희였고, 그런 도희에게 다가가는 남자는 딱 봐도 주완이었다. 도희가 CH재벌가에 시집을 간단 소식을 들었을 때 무척 배가 아파 기사를 수십 번 찾아본 라일이라, 그녀는 멀리서도 주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을 몇 장 건진 라일은 연달아 동영상 촬영을 했다. 주완이 도희를 재킷으로 감싸는 것, 함께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까지 모두 영상에 또렷하게 담았다. 라일은 핸드폰 카메라 성능이 좋아진 데 감탄하며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럭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