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죄책감
다음 날, 나영은 어젯밤 지섭과 밴 안에서 무슨 얘길 나누었는지 끈질기게 물어 왔다. 도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열정적인 키스 신을 찍었던 지섭도, 지섭과 나누었던 대화도, 순자의 협박도 아니었다.
[보고 싶어]
도희는 주완에게 끝까지 답장하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며 그가 보낸 문자를 읽고 또 읽었지만, 주완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알 수 없었다. 도희는 더는 주완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앞으로 주완이 무슨 행동을 하든 무시로 대응하기로 다짐했다.
“말해 줘어, 응? 무슨 얘길 그렇게 했는데에. 둘이 부쩍 친해 보이던데, 뭔데. 뭐야아.”
“별 얘기 안 했다니까. 왜 사람 말을 안 믿니.”
도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나영은 그 말을 여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 근데 그거 하나만 알아 둬라.”
“뭘?”
“난 지섭 씨 찬성이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너도 새 출발해야지. 둘이 말도 놓고, 비밀 얘기 하는 걸 보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더만 왜.”
……‘너도’라.
나영은 어제 촬영 내내 도희의 어두웠던 표정과 주완의 약혼 기사를 의식하는 듯했다. 지난 3년간 도희에게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대해서 강요한 적 없었는데. 나영은 혹 도희가 동요할까 봐 조바심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비밀 얘기는 무슨.”
도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섭의 건방짐을 용서하기로 한 이상 지섭이 저질렀던 대범한 행동에 대해선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그런 말까지 했다간 불같은 나영 성격에 화를 낼지, 아니면 제대로 엮으려고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희 입장에선 이러나저러나 피곤한 일이었다.
“참! 보자마자 좋은 소식 알려 준다는 게! 우리 다큐 내레이션 들어왔다?”
별안간 나영이 기쁜 소식을 알리듯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비록 연기는 아니지만, 차분한 내레이션도 좋아하는 도희는 그 제안이 내심 반가웠다.
“다큐? 어디서 하는 건데?”
“KBC에서 하는 건데, 특별 기획 다큐라서 분량이 그렇게 많진 않대. 3일 정도면 녹음 스케줄 충분할 거라는데?”
게다가 KBC라면 지상파였다. 도희의 입매가 살며시 양옆으로 벌어졌다.
“스케줄 되면 하면 좋지.”
“응, 그래서 한다고 했어.”
“얼씨구?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좋아할 거 알고 했지!”
나영은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도희가 웃음을 풋 터트렸다.
“시사회 그 영상이 좀 도움이 됐나? 정규 방송 내레이션까지 들어온 걸 보면 우리 도희 이미지가 좋아진 게 확실하다니까!”
나영은 마치 방금 다큐멘터리 제안을 받은 것처럼 활기차게 말했다. 도희는 그 모습에 또다시 벅찬 감정이 희미하게 차올랐다. 어제 봤던 영상을 떠올린 도희는 불쑥 시사회에서 곤란한 질문을 했던 학생을 떠올렸다.
“시사회 영상이 그 정도로 영향이 있으면, 그 질문한 학생은? 괜찮나?”
“뒷모습만 나와서 신상이야 안 밝혀졌는데, 교복 때문에 어느 학굔지는 다 알게 됐나 봐. 욕을 좀 먹고 있긴 한데 뭐, 큰일 있겠어? 그래 봤자 앤데.”
시사회 영상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줘서 좋긴 하지만, 나영은 무례하게 사적인 질문을 던진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퉁명스레 말했다. 네티즌의 무서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도희는 어린 학생이 혹시 악플로 상처를 입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따로 연락을 취하는 것도 이상하고. 도희는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기에 나영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선생니임.”
촬영하던 중 지섭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도희 쪽으로 달려왔다. 지섭의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마카롱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 종선과의 신을 마친 도희는 간식 차가 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이제 보니 오늘은 ‘아는 누나’에서 지섭과 함께 합을 맞췄던 솔희 배우가 간식 차를 보낸 모양이었다.
“선생님, 아메리카노 드시죠?”
지섭은 눈웃음을 치며 종선에게 먼저 커피를 내밀었다. 종선은 그런 지섭의 살가운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받았다.
“마카롱은 좋아하세요?”
“난 단 건 싫어.”
“넵.”
지섭은 싹싹하게 들고 있던 마카롱을 뒤로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종선은 지섭이 기특하다는 듯 코끝을 찡긋거리곤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도희가 그곳에 멀뚱히 서 있자 지섭은 남은 마카롱과 커피를 도희에게 내밀었다.
“선배님도요.”
“고마워.”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마카롱. 쓴맛과 단맛의 조화는 도희가 무척 사랑하는 조합이었다. 안 그래도 출출했던 차에 도희는 잘됐다 싶어 그 자리에서 비닐을 까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때까지도 지섭은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도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복스럽게 먹네.”
생글생글 웃으며 태연하게 반말을 뱉는 지섭의 말을 듣고 도희가 화들짝 놀랐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섭의 어깨를 툭 쳤다.
“까분다?”
“왜요, 설렜어요?”
“꿈 깨.”
“아 좀 설레지. 마카롱 좋아한대서 기껏 챙겨 왔더니.”
뾰로퉁하게 입술을 내미는 지섭의 축 처진 눈과 도희의 커다란 눈동자가 부딪쳤다. 마카롱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도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터뷰에서 봤어요. 나 선배님 팬이라는 걸 잊지 마요.”
“아.”
“내가 빨리 안 챙겨 뒀으면 마카롱 다 떨어질 뻔했다고요.”
이때다 싶은 지섭이 늠름하게 어깨를 쫙 펴며 생색을 냈다. 그 모습에 도희는 “고맙다, 고마워.”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스태프들은 멀찍이서 두 사람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주연 배우가 친해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특히 열애설이 났던 두 사람이기 때문인지 스태프들의 시선이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게다가 키스 신을 계기로 부쩍 친해진 것 같아 스태프들을 비롯해 배우들은 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역시 사귀는 것 같지?”
라일은 다음 신을 위해 제 메이크업을 돕고 있는 아티스트에게 말했다. 아티스트는 말을 아꼈고, 그러자 라일은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덕분에 화장을 하던 아티스트의 손이 라일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그쵸, 사귀는 거 같죠?”
라일은 마침 옆에 있던 중년 배우에게 확신에 차서 말했다. 중년 배우 역시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터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남녀가 자주 붙어 있다 보면 그럴 수 있지.”
“그렇죠? 거봐, 내 말이 맞다니까!”
중년 배우는 단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을 에둘러 말했을 뿐인데, 라일은 중년 배우에게 확언이라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중년 배우는 라일의 반응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여기서 이러쿵저러쿵해도 남녀의 문제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라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일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래도 비위에 거슬리는 도희를 어떻게 해서든 나쁜 소문에 휩싸이게 하고 싶었다. 가장 첫 번째는 촬영장에서 도희의 위치를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열애설을 부정하던 도희가 지섭과 또다시 열애설이 난다면……. 아니, 아니야. 그거론 약해.’
라일은 도희가 지섭 외 다른 남자는 없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만일 지섭과 또다시 열애설이 나고, 그다음에 다른 남자가 등장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소문은 없을 것 같았다. 라일은 웃고 있는 도희의 얼굴에서 하루빨리 미소를 지우고 싶었다.
* * *
며칠 뒤, 회사에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미팅이 잡혔다. 원래라면 방송국에서 진행했어야 할 미팅인데, 마침 이쪽에 볼일이 있는 PD가 회사로 직접 찾아오겠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PD는 이미 도희 쪽의 확답을 듣고 기뻐한다고 말을 전했기에 간단한 사전 미팅이 될 예정이었다. 도희는 튀지 않는 베이지색 면 티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미팅에 나갔다.
예상대로 미팅은 순조로웠다. 도희의 수수한 모습을 본 PD는 도희를 더 좋게 보는 듯 말했고,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도 전 대본부터 내밀었다. 그런데, 대본을 훑어보는 순간 도희의 낯빛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저희가 특별 기획 다큐라, 4부작 대본이 끝입니다. 시간도 도희 씨 스케줄에 맞춰서 잡을게요. 녹음은 3일에 걸쳐서 하면 될 것 같네요.”
신이 나서 스케줄을 줄줄 읊는 PD의 말에도 도희는 어색하게 표정을 관리하며 대본을 훑었다. 도희는 대본을 보자마자 이 다큐멘터리를 안 할 순 없느냐고 묻고 싶었다.
다큐멘터리의 주제는 ‘생명’이었다. 1부에서는 지켜지지 못한 생명, 즉 유산에 대해 다루는 이야기였고, 2부는 낙태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3, 4부는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에 관한 얘기였다. 도희는 대본을 보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이 바르르 떨려 왔다. 마치 하늘이 저를 시험하려는 것 같았다. 도희는 스스로 생명을 다룬 주제, 특히 유산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에 내레이션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이긴 했으나, 이미 구두로 합의가 다 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도희는 대본을 자세히 보는 척하며 등 뒤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를 모르는 나영은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주제가…….”
“주제가 좀 어둡긴 하죠? 그래도 뜻 있는 작업이 될 겁니다. 도희 씨 단단하면서 청아한 목소리면, 저희 기획과 딱 어울릴 것 같구요.”
도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PD는 얼른 다큐멘터리 기획을 어필했다.
도희는 차마 회의가 모두 끝날 때까지 내레이션을 못 맡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속으론 이 작업을 할 수 있겠냐고 수십 번 자문했고, 못 할 것 같단 답이 정해져 있었지만,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도희는 활기차게 계약서를 내미는 PD 앞에서 사인을 하고 말았다.
PD를 보내고, 도희는 텅 빈 회의실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영이 PD를 회사 문 앞까지 배웅하겠다며 나갔고, 도희는 회의실에 넋을 놓고 앉아 구겨진 대본만 만지작거렸다. 대본을 들고 있던 도희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희는 용기 있게 다시 대본 1부를 넘겨 봤다.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바로 삶입니다. 잠을 자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켜켜이 당연한 하루가 쌓이고, 우리는 당연한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지도 모르죠. 탄생의 여정은 참 깁니다. 길고 험난합니다. 30주도 안 되어 태어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500g도 안 되는 몸무게에 장기조차 덜 생성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기도 전에, 태아로서 삶이 마감되는 안타까운 생명도 존재합니다.]
도희는 거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다. 도희는 자신이 가장 자신 없는 부분, 유산에 대한 에피소드를 훑어봤다.
[은수 씨 부부는 아이와의 만남을 간절히 바랍니다. 갑자기 자궁 문이 열려 아이를 잃게 된 산모는 현재 자궁 경부 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유산과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부모의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 갑니다. 아이를 끝까지 지켜낸다는 일념 하나로 수술대에 오른 그녀는 뼈를 깎는 괴로움의 시간을 감내합니다. 백일이 넘도록 화장실을 제외하고 누워만 있어야 하는 하루하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부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던 도희는 끝내 회의실 책상에 엎드리고 말았다.
도저히 잘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잘해선 안 될 것 같았다. 도희는 간신히 잊으려고 노력하던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성난 파도처럼 도희의 마음을 휩쓸어 잠기게 하는 것 같았다.
“흐윽…… 우흐읍!”
도희의 흐느낌이 점차 커졌다. 고작 내레이션뿐이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됐다. 일은 일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조차 죄악인 것 같았다. 눈앞의 시야가 뿌옇게 흩어지고 맑아지길 반복됐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뒤에선 인기척이 느껴졌고, 도희는 나영이 돌아왔단 생각에 애써 울음을 그치기 위해 들썩이던 어깨를 천천히 추스르던 차였다.
“백도희.”
별안간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도희가 뒤를 홱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또, 또 그였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차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