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34화 (34/71)

34화 약혼녀의 방문

집으로 돌아온 지섭은 침대에 누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내일도 연이어 빡빡한 스케줄인데, 자꾸 가까워지는 도희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았다.

“미쳤네.”

지섭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도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소파 위에서 제 다리 사이로 끼어들어 간 도희의 가녀린 몸, 그녀의 허리 위에 올랐던 제 손, 그리고 두 뺨을 감싸고 키스를 나누던 순간들이 반복돼서 재생됐다.

같은 장면이 수십 번씩 닳도록 반복되고 나서야 지섭은 그제야 제가 오늘 폭발하고 말았던 일을 되새김질했다. 계획엔 없었지만, 연기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도희 모습은 그야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프로답지 못한 모습엔 조금 실망할 뻔했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지섭은 도희에게 어느 정도 본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진 않았다. 로아라는 이름 아래 순자라는 악독한 어머니 밑에서 고생한 건 모르는 척했고, 열애설로 도희의 이목을 일부러 끈 것 등은 일부러 계획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도희가 자신을 쳐다보게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드라마 캐스팅까지는 지섭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니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었다.

생각은 마지막, 차 안에서 도희가 통화한 데까지 미쳤다. 순자의 목소리가 얼마나 까랑까랑한지 수화기 너머로 그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대충 들어 보니 순자는 차주완과 도희를 다시 엮으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순자가 도희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던 지섭은 순자가 더 밉살스러워졌다. 가만히 두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닐 도희인데, 그를 방해하는 두 사람이 바로 주완과 순자였다.

“둘을 어떻게 떨어트려 놓지.”

지섭은 침대에 누워 낮게 읊조렸다. 드라마를 함께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랬다. 지섭은 도희를 보호하고 이끌어야겠다는 막연한 책임감을 강렬하게 느꼈다.

지섭은 이제 이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눈동자가 자꾸 그녀의 뒤를 좇았고, 안 보일 땐 끊임없이 그녀를 찾았고, 그녀를 떠올리면 가슴에 알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섭은 이 감정에 대해 깊게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는 순간, 저 자신이 일 순위였던 지섭은 분명 그 우선순위에 다른 이를 세워 둘 것 같았다. 지섭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결과가 빤히 보이는 미련한 사랑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딱…… 걸리적거리는 것들만 치워 주고 손 떼는 거야.”

* * *

커다란 룸에 앉아 있는 주완은 앞에 과일이니 치즈 플래터니 화려한 안주를 다양하게 시켜 놓고 보리차를 샷 잔에 따랐다. 누런 물빛 색은 꼭 양주 같아서, 스트레이트 잔에 따라 놓으니 영락없는 술이었다. 정 비서는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양주를 주완과 좀 더 떨어트려 놓곤 보리차를 그 앞에 따랐다. 그런 정 비서의 모습을 보던 최 대표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자네, 술을 아예 못 하나?”

“네, 죄송합니다.”

최 대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완이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최 대표 술잔을 채웠다. 또다시 술을 마셨다간 애꿎은 정 비서만 호통을 당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주완은 무리해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최 대표. 그는 유명 포털 사이트 N대표였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1위 포털 사이트로 자리매김하기까지 15년이란 세월이 걸렸지만, 어린 나이에 포털 사이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그래 봐야 고작 5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CHK백화점 광고 계약이 성사된 기념으로 술 한잔하는 중이었다. 그는 트렌드를 따라가는 포털 사이트 대표답게 주완이 술을 못 한다는 점을 비난하거나 못마땅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럴 수 있다는 듯 술을 못 마시는 주완에게 흔쾌히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새신랑 될 사람이 왜 이렇게 죽상이야?”

그래서였다. 약혼 기사가 나가고 누구보다 술이 마시고 싶은 주완이었다.

“J그룹 외동딸과는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라던데. 좋지 않나?”

최 대표는 일부러 표정이 어두운 주완에게 사적인 이야길 꺼냈다. 하지만 약혼 얘기가 나오자 주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같은 실수를 할까 봐 두려운 건가?”

최 대표는 능력만큼이나 눈치도 빨랐다. 이미 이혼 경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그는 주완을 은근슬쩍 떠봤다. 최 대표의 말에 주완이 몸을 움찔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된 듯 최 대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 부인에게 미안한 모양이군. 그래도 어쩌겠나, 이미 끝난 인연은 보내 줘야지.”

“……후회하고 있습니다.”

뜻밖에 주완의 솔직한 말에 최 대표가 잠시 눈을 크게 뜨고 주완을 바라봤다. 주완은 허공을 응시하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보상이라도 하고 싶은가.”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감히 보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더군요.”

“그렇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과거를 보상할 순 없지.”

최 대표 역시 한 번의 이혼, 그리고 현재는 재혼한 부인과 살고 있었다. 최 대표는 그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주완은 더 이상 도희를 떠올렸다간 하지 않아야 할 말까지 다 털어 버릴 것 같아, 무기력한 모습으로 천천히 룸에서 나왔다.

청담동에 있는 이곳은 유명인사들이 주로 연예인들의 접대 자리에 많이 오는 곳이라 무척 프라이빗한 술집이었다. 이름 있는 주완 역시 그래서 이곳이 편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복도를 걸으며 주완만이 또렷한 정신으로 음침한 검은 문들을 지나치던 차였다.

“류라일 씨, 나한테 돈 줬잖아. 아니야?”

코너를 돌기 전, 들리는 ‘류라일’이라는 이름에 주완의 걸음이 멎었다.

“감독님. 그건…….”

“내가 연애를 하재, 잠을 자재. 그냥 술 좀 같이 마셔 달라는데 왜 이렇게 튕겨? 캐스팅 끝났으니까 이제 배 째라 이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내일 오전 스케줄 있으시니까 감독님 걱정돼서 그렇죠.”

라일은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는 김 감독을 달랬다. 주완은 일부러 그곳을 나가지 않고 두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내가 누구야! 명색이 감독인데 술을 아무리 마셔도 스케줄은 문제없게 하지!”

“그래도 내일 도희 선배님이랑 첫 촬영이시고…… 약속 시각 철저한 선배님이라 말 나올 텐데…….”

“라일 배우, 아직도 백도희 씨 의식해? 이제 안 그럴 때도 됐잖아? 닮은 꼴 얘기 들어간 지가 언젠데.”

거기까지 들었을 때 주완은 라일과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현재 드라마 촬영을 하는 감독이란 걸 깨달았다. 라일은 도희 ‘닮은 꼴’ 얘기가 나온 다음부턴 말이 없었다.

“이제 그런 말 안 나오게 내가 잘 찍어 줄게. 그러니까 잔말 말고 들어와. 어?”

김 감독은 라일을 무척 얕잡아 보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그 말을 남긴 채 김 감독이 코너를 돌았다. 코너를 돌자마자 김 감독은 주완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미 눈이 반쯤 풀린 채로 얼굴이 붉어져 있는 김 감독은 주완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김 감독은 특별한 반응 없이 주완을 지나쳤다.

“아악! 신경질 나!”

별안간 들려오는 괴성에 주완이 깜짝 놀랐다. 다행히 김 감독은 이미 룸으로 들어간 뒤였다. 주완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누군가와 통화하는 라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백도희는 이런 거 안 해? 왜 나만 김 감독 비위 맞춰야 되냔 말이야!”

김 감독의 말에도 불구하고 라일은 여전히 도희를 의식하는 듯 말했다. 라일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전화기에 대고 연신 씩씩거렸다.

“백도희, 꼬투리만 잡혀 봐. 다신 촬영장에 발 못 붙이게 할 거야.”

“……?”

“촬영을 펑크 나게 할까.”

라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완을 등지고 멀어졌다.

주완은 엉뚱한 곳에 열을 내는 라일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도희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라일은 하도 자신과 비교당해서 그 열등감이 도희를 향한 증오로 피어난다고. 말로만 들었을 땐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오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도희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말을 해야 하나.’

주완은 제가 또 다른 구실을 만들려고 한다는 건 깨닫지 못한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라일이 행동을 취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니기에 주완이 전달할 말은 딱히 없었다. 좀 더 명확한 구실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주완의 머릿속에 김 감독의 말이 번뜩 스쳤다.

‘류라일 씨, 나한테 돈 줬잖아. 아니야?’

‘캐스팅 끝났으니까 이제 배 째라 이거야?’

돈, 캐스팅. 그렇다는 건 뇌물이란 건가. 주완은 한참을 망설이다 핸드폰을 들었다.

* * *

집에 도착한 도희는 또다시 집 앞에 찾아온 불청객의 등장에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라인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짧게 단발머리를 한 여자는 오늘 약혼 기사에서 봤던 이목구비를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도희는 작고 아담한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초면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네요.”

오랜 여동생으로 알고 지냈던 J그룹의 장효주. 직접 마주친 적은 한두 번밖에 되지 않았지만, 효주가 도희에게 보여 준 적개심 때문에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집 앞에 화려한 스포츠카를 대 놓고 도희를 기다린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도희를 격렬하게 노려보며 다가왔다. 앳된 얼굴로 노려보던 게 생생한데. 고작 3년 새에 효주는 제법 성숙한 티가 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적의로 가득 찬 효주를 보며 도희가 먼저 물었다.

“효주, 주완 오빠랑 약혼했어요.”

“알아요.”

효주의 뜬금없는 약혼 고백에 도희가 빠르게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눈빛으로 효주를 보고 있으니 효주가 나름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럼 이제 떨어져 줘야죠!”

“하!”

효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희가 실소를 터트렸다. 부현도 그렇고, 효주도 그렇고. 막무가내로 집에 들어와 치료해 주겠다는 주완도 그렇고. 이틀 사이에 이 집안사람들이 왜 저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지 기가 찼다. 도희는 효주의 눈을 또렷하게 바라보며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난 떨어진 지 오래됐고, 그쪽이 주완 씨랑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상관없으니까 나한테 찾아와서 이런 충고 하지 마세요.”

“언니가 행동을 똑바로 안 하니까 주완 오빠가 시사회까지 가는 거잖아요! 설마 아직도 재벌 마누라가 탐나는 건 아니죠?”

도희는 건방진 효주의 태도에 안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안 그래도 저를 밤새 흔들어 놓고 약혼 기사를 낸 주완에게 화가 나는데, 그의 약혼자한테까지 모욕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난 행동 잘못한 거 없고, 똑바로 못 한 건 주완 씬데 왜 나한테 와서 이러죠?”

도희는 효주를 향해 있는 힘껏 비아냥거렸다.

“저기요!”

“난 제발 주완 씨가 내 인생에서 떨어져 주길 바라는 사람이에요. 그렇게 못 하겠다는 게 주완 씨고. 약혼자 관리는 그쪽이 못 한 것 같은데.”

“오, 오빠가 그랬다고요? 언니 망상이 아니고요?”

효주가 못 믿겠다는 듯 울먹이며 되물었을 때 도희의 주머니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도희는 효주를 더는 보기 싫어, 핸드폰을 곧장 확인했다. 발신자는 또 모르는 번호였는데, 도희는 그 번호가 기껏 지웠던 주완임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류라일, 김 감독한테 뇌물 주고 캐스팅. 필요하면 약점으로 써.]

정확한 사안은 몰랐지만, 류라일이 김 감독과 무언가 있다는 건 도희 역시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도희는 문자의 내용보다 뜬금없는 내용으로 연락을 해 온 주완이 무척 괘씸했다. 약혼하거나 말거나 별개로 계속 연락을 하겠다는 건가? 그때, 또다시 문자가 왔다.

[조심하고. 촬영 스케줄 잘 확인하고 다녀.]

지금 제 약혼녀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른 채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는 주완에게 몹시 화가 났다. 동시에 배신감 비슷한 감정이 도희의 마음을 쥐어뜯었다. 도희는 자신의 말로 인해 이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효주를 쳐다보다가 이내 유치한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믿겨요? 보여 줄까요?”

“뭐, 뭘요?”

도희는 자랑스럽게 자신이 보고 있던 액정 화면을 효주 쪽으로 내밀었다. 주완이 두 번째로 보낸 문자를 화면에 크게 띄운 채였다.

효주가 몇 발자국 더 다가와 액정에 쓰인 글자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러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번호와 내용을 두어 번씩 더 확인하더니 이내 입술을 짓이기며 뒷걸음질했다.

“봤죠? 난 등록도 안 해 놓은 번호예요. 제발 나타나지 말라고, 신경 좀 꺼 달라는데 주완 씨가 못 하겠다네요.”

도희는 최대한 얄미운 목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주완 씨가 못 하겠다는데. 나한테 와서 이럴 시간에 효주 씨가 가서 좀 도와주지 그래요?”

“효, 효주는 언니한테 안 질 거예요!”

효주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끝까지 악을 쓰며 도망치듯 차에 탔다. 차가 도희를 쌩하고 지나치자마자 여유로웠던 도희의 낯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한 번 부현이 찾아온 다음이라 그런지 나름 악랄하게 반격하긴 했지만, 이 상황 자체가 결코 달갑지 않았다. 도희는 화를 애써 진정시키며 숨을 찬찬히 고르게 쉬었다. 도희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주완이 보내온 문자를 다시 들여다봤다.

류라일에 대해 뭐라도 들은 걸까. 뜬금없는 경고였다. 도희는 [신경 꺼요]라고 문자를 작성했다가 도로 지웠다. 이토록 막무가내인 주완에겐 답장하는 것보단 무시가 상책일지도 몰랐다.

조금 전엔 효주에게 지지 않기 위해 여러 말을 뱉어 냈지만, 도희 마음속에 아주 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동안 주완에게 마음을 썼던 도희는 약혼 기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선 제대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도희는 주완과 관련 없는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었다. 주완이 이제 와 다른 태도를 보인다고 한들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희가 노여운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고, 찬 바람을 쐬며 마음을 추스르던 중이었다. 그때,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보고 싶다.]

“……!!”

이번에도 역시 주완이 보낸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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