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동경
지섭이 먼저 목을 당기자 그 위에 누워 있던 도희의 입술이 지섭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입술이 포개어지자마자 지섭은 입을 벌려 도희의 입술을 느릿하게 머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도희는 촬영 중이라는 걸 겨우 떠올리곤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 오던 지섭은 이내 커다란 손으로 도희의 뺨을 감싸곤 각도를 바꿔 가며 도희의 입술을 탐했다. 혀를 넣은 것도 아닌데, 타액이 붙었다 떨어지며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도희의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물었다 뱉어 내는 지섭의 달콤한 키스에 도희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쪽. 쪽. 쪽.
입술 박치기를 하고 나면 그대로 입술을 맞대고 있는 거로 충분하댔는데. 게다가 대본대로라면 수향이 지환에게 먼저 키스를 해야 맞는데. 무슨 일인지 김 감독은 컷을 외치지 않았다. 도희는 일 분의 시간이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키스는 점점 더 농밀해지는데, 주변은 모두가 숨을 참기라도 한 것처럼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고 적막했다. 그렇게 지섭의 키스를 어색하게 받아 주던 차에 지섭의 혀가 도희의 입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타악!
“컷.”
얼굴이 붉어진 도희가 결국 지섭을 먼저 밀어내고, 동시에 김 감독의 컷이 들려왔다. 도희는 숨을 낮게 헐떡거리며 양옆에 팔을 세운 채로 지섭을 내려다봤다. 키스 신이 끝나면 또다시 짓궂은 미소로 자신을 놀릴 줄 알았던 지섭은 마치 아직 키스 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양 입술을 살짝 벌리고 더운 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도희는 지섭의 촉촉한 입술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방금 거 나쁘진 않았는데. 일단 대본대로 다시 갑시다.”
나쁘지 않았다고?
도희는 그제야 김 감독의 스타일이 어땠는지 깨달았다. 김 감독은 배우들에게 인물의 감정선을 느끼라고 하는 스타일이었다. 분명 처음 어떻게 감정을 잡을지 묻는 도희에게 느끼는 대로 하라고 했었지. 도희는 촬영이 끝나고 지섭에게 놀리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지섭은 그저 ‘이지환’으로서 역할을 충실했을 뿐일 테니. 도희는 프로답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제 뺨을 두어 번 툭툭 때렸다.
‘똑바로 하라고. 안 그럼 나한테 잡아먹힌다?’
잡아먹히면 안 되지! 안 돼!
* * *
“아 신나!”
효주는 오랜만에 직접 걸려온 주완의 전화에 회사 일을 제쳐 두고 나왔다. 그간 걸어댄 전화를 모두 무시한 주완이었는데, 그가 난생처음으로 점심 한 끼를 같이 하자고 했다. 그 한마디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침에 부현과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부현이 혹시 약혼 기사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게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주완의 전화 한 통으로 그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주완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다정했고, 따스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기 전, 효주는 매장 유리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아침에 뜬 약혼 기사를 보고 하늘색 리넨 롱스커트를 챙겨 입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허리를 꼬임으로 잡아 주고 엉덩이부터 다리까지 일자로 쭉 뻗은 원피스 덕에 몸매 굴곡이 잘 드러났다. 자신의 콜라병 같은 몸매를 본다면 저 아무리 무뚝뚝한 주완이라도 자신을 어린 동생으로만 보던 생각이 싹 가실 것만 같았다. 효주는 제 차림이 만족스러운 듯 단발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 돌연 심각한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숍 들렀다 올걸!”
그도 그럴 게 약혼자로서 제대로 된 첫 데이트였다. 효주는 약속 시각이 십 분밖에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곤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정장 차림의 주완이 창가 쪽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창가를 바라보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주완을 보고 있자니 효주의 입꼬리가 실쭉 올라갔다. 효주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서둘러 미소를 짓고 주완에게 다소곳이 다가갔다.
“왔어?”
“응, 오빠!”
효주는 주완이 몸매가 드러난 자신의 옷차림을 전체적으로 봐 주길 원하며 일부러 앉지 않고 그의 곁에 섰다.
“앉아.”
하지만 주완은 평소와 다른 효주의 복장에 별 감흥 없는 태도였다. 효주의 입이 부루퉁하게 나왔지만, 주완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메뉴판을 건넸다. 효주는 꿋꿋이 서서 주완을 노려봤다.
“오빠, 나 안 예뻐?”
“어?”
“나 안 예쁘냐고.”
“예뻐.”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효주는 그런 주완의 말이 진심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무척 서운했지만, 하는 수 없이 주완에게 메뉴판을 되돌려 주며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 먹고 싶은 거로 시켜.”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엔 알리오 올리오와 베이컨 크림 파스타가 놓였다. 깔끔한 메뉴 선택이었다. 효주는 주완과 살가운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지만, 주완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에 효주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민망해 할 수 있는 말을 열심히 골랐다. 상념에 빠진 그녀가 말없이 크림 파스타를 포크로 떠 수저에 돌돌 말 때였다.
“약혼 기사, 미안해.”
주완의 사과에 효주의 행동이 멈췄다. 주완이 사과한다는 건, 약혼 기사에 주완의 의지는 없었다는 얘기였다. 효주는 눈을 부릅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야?”
“어머니가 멋대로 하신 일이야.”
그 말 한마디에 효주는 오는 길 내내 설렜던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우린 이게 첫 데이트인데……. 오빤 효주랑 행복해야 하는데…….
“오빠 효주랑 결혼해야 돼.”
“효주야.”
“J그룹 딸이랑 CH그룹 차남 약혼, 이미 발표했잖아. 약혼 기사로 주식……, 아니, 주가 변동도 있었고! 효주랑 결혼 안 하면 어머님도 힘드시고!”
효주는 비통한 감정을 숨기고 경영 수업에서 주워들은 걸 총동원해 주완을 설득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주완은 효주의 말에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되레 돌아오는 건 자신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는 주완의 동정 어린 시선이었다.
“많이 변했네.”
“뭐?”
“그런 거 잘 몰랐잖아.”
오늘만큼은 어리게 보지 않을 줄 알았는데. 효주는 발끈해서 말했다.
“효주도 경영 일 시작한 지 몇 년 지났어! 이 정도는 당연하다구!”
“그래, 기특하네.”
“……오빠도 변했어! 예전이라면 이런 것쯤 효주보다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효주는 은근슬쩍 그의 감성적인 면모를 힐난하듯 말하며 주완의 눈치를 살폈다.
“그치. 나도 변했지.”
하지만 주완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효주의 투정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듯 덤덤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랬나?”
“효주가 알던 오빠로 돌아와. 그게 더 멋있고, 그게 더 어울린단 말이야.”
효주는 자신의 맘을 몰라주는 주완을 성마르게 채근했다. 한 번 튀어나온 어리광은 멈출 새 없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효주는 내심 주완이 잘못했다며 달래 주길 바라고 있는데, 효주의 말을 듣고 있던 주완이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효주야.”
“왜, 왜.”
이 정도 어리광 부렸으면 안아줄 때가 됐는데. 효주는 설핏 긴장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나도 힘들 때가 있다. 그걸 이제 알았어.”
“……!”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사실 아니었다는 거.”
* * *
키스 신을 비롯한 모든 촬영을 끝마친 뒤 지섭과 도희는 밴 안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처음엔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따질 생각이던 도희는 지섭의 오랜 동경에 대해 듣고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체육 창고에서부터 동아리 등 도희의 행적을 좇아 열심히 달려온 지섭이 한 말은 도희를 묘하게 들뜨게 했다. 지섭의 경고는 건방지긴 했으나, 동경 하나로 여기까지 쭉 달려온 지섭이 기특하기도 했다. 처음엔 같은 고등학교 나왔다는 말을 흘려들었는데, 이제 보니 지섭에겐 그게 엄청난 의미였다. 도희는 그제야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게 그토록 열을 냈던 그의 태도도 얼추 이해가 갔다. 도희는 새삼 다른 이들의 꿈까지 짊어졌던 톱스타라는 이름의 값어치를 떠올리고, 그 막중한 무게를 다시금 느꼈다.
도희는 지섭의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 만에 입을 뗐다.
“로아라는 이름, 버리고 새 출발하기로 한 거 잊었냐는 건?”
“학교 다닐 때 우연히 들었어요. 선배가 그 이름 뜻 때문에 끔찍이 싫어했다고. 그거 이상은 몰라요.”
“그럼 열애설도 네가 다 계획한 거야?”
“그건 아니구요. 선배님과 드라마 하고 싶어서 넌지시 얘기 던진 건 맞고요. 일이 단시간에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지섭의 말을 들은 도희는 내심 안심했다. 열애설부터 드라마 캐스팅까지 모두 계획되어 있었다면 그를 결코 곱게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희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지섭의 동경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도 연기 좋아해. 걱정하지 않아도 연기 그만둘 일 없고, 앞으로 폐 끼치지 않을게. 아깐 지적받을 만했어. 프로답지 못했고…… 그건 인정!”
“고마워요.”
“그래도 너! 건방진 게 다음에 또 그런 식으로 굴었다간 국물도 없어.”
지섭을 꾸짖긴 해야겠고, 그렇다고 저도 떳떳하지 않아 도희는 분명하지 않은 어조로 지섭을 위협했다. 그러자 지섭이 실소를 터트렸다.
“원래 이렇게 귀여워요?”
“너 또!”
“알았어, 안 그럴게요.”
지섭은 항복하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몸을 뒤로 기울였다. 이제 지섭의 이야길 모두 들었으니 다음은 도희가 궁금했던 걸 물어볼 차례였다.
“너 혹시 뭐…… 그런 거야?”
“?”
“그 있잖아, 그…….”
후배 앞에서 늘 똑 부러지던 도희였는데,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도희가 한참을 망설였다. 지섭은 도희가 눈동자를 황황히 굴리며 머뭇거리는 모습도 감상하듯 그림처럼 지그시 바라봤다.
“다중인격…… 뭐 그런 거.”
병을 의심해서일까. 조심스러운 도희의 질문에 별안간 지섭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지섭은 끅끅대던 웃음을 멈추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도희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그, 근데 어떻게 사람이 앞뒤가 이렇게 다르니?”
“앞뒤가 다른 게 아니라 선배한테만 내 본 모습 보인 거예요.”
진중한 얼굴빛을 띤 지섭의 모습에 도희는 순간, 키스 신을 막 마친 지섭의 흥분한 얼굴이 떠올랐다. 도희가 황급히 얼굴을 돌리자 지섭은 그녀의 마음을 다 읽었다는 듯 짓궂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선배님. 키스 신은 어땠어요?”
“뭐?”
생각지 못한 지섭의 질문에 도희가 화들짝 놀라 그의 능글맞은 얼굴을 마주 봤다. 때마침 도희의 전화벨이 울렸다. 순자였다.
“너 이만 가.”
순식간에 얼굴이 어두워진 도희가 지섭을 차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하지만 닫힌 차 문이 도희의 손kjmdm짓 하나로 열릴 리 없었다. 호기심이 일은 지섭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저기 기자! 나 지금 나가면 안 되는데. 그냥 받아요, 귀 막고 있을게요.”
“기자 확실해?”
지섭이 가리킨 곳엔 평범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카메라 한 대를 어깨에 메고 있었다. 지섭은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양 손바닥으로 두 귀를 꽉 막았다. 도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전화가 끊어지기 전에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순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들려왔다. 지섭은 도희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제 귀를 꽉 틀어막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
“촬영 중. 왜요?”
도희는 귀를 막고 있는 지섭을 흘긋 확인한 뒤 일부러 조용히 대답했다.
-기사 봤어, 못 봤어! 내가 찜질방에 없었으면 차 서방 기사 모르고 그냥 넘어갈 뻔했네! 어떻게 된 거야?
약혼 기사 때문이구나. 순자의 살벌한 목소리를 들은 도희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뭐가 어떻게 돼요. 애초에 어떻게 될 사이가 아니라니까.”
-그럼 정말 끝나기라도 했다는 거야? 내가 그러라고 지한테 다이어리 갖다 바친 줄 알아? 차 서방 이제 보니 아주 배은망덕하네!
혼잣말에 가까운 순자의 신경질적인 비탄에 도희가 눈을 번쩍 떴다.
“다이어리를 갖다 바치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 그게 중요해?
“중요해요! 말해 봐요. 다이어리, 그거 엄마가 주완 씨 가져다줬어요?”
귀를 막는 시늉을 하고 있던 지섭은 ‘주완’이라는 이름에 저도 모르게 도희 쪽을 쳐다봤다. 도희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격앙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지섭은 그런 도희의 절망적인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게 너 이사할 때…… 그래! 줬다 줬어! 내가 예전에 챙겨 놓은 건데 차 서방이 보면 좀 나을까 싶어서 줬다, 왜!
“엄마!”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순자의 목소리에 도희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제야 그게 왜 주완의 집에 있었는지 납득이 갔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순자가 전달한 줄도 모르고 주완을 다그쳤던 제 모습이 떠올라 낯부끄러워졌다.
‘사실이야. 그것도 미안해. 내가 훔쳤어.’
‘언제, 어떻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디에 있든 난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차 서방 이제 보니 보통이 아니네. 사람을 쥐락펴락 아주…….
도희는 순자의 말을 더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분명 다시 전화 올 게 뻔하기에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머리가 아팠다. 그를 머릿속에서 떼어 내고 싶은데, 잊을만하면 자꾸 도희를 들쑤셨다. 전원이 꺼지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도희는 이마를 짚고 머리를 괴었다. 그러다 아직 옆에 지섭이 남아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
다 들었을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순자 목소리도 다 들린 걸까. 주완의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진 도희는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지섭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겠단 생각에 다 들었느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기자 갔네요.”
“어?”
“저도 이만 가 볼게요.”
지섭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처음 봤을 때처럼 유순하고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차 문을 힘껏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