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키스 신
저를 혼내듯 반말을 뱉은 지섭을 도희는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백로아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철렁했지만, 지섭의 문병을 갔을 때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본명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위안했다. 도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반항적인 투로 물었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말끝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도희는 한참 후배인 그에게 질 순 없었다.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거야. 이름 버리고 새 출발하기로 한 마음 잊었어?”
“뭐?”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던 도희는 도로 동요하고 말았다. 이름을 버리고 새 출발하기로 했다는 건, 어린 날 도희의 마음가짐이었고 제 기억으론 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길 로(路) 아이 아(兒)’.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도 서러운데, 길에서 배 아파 낳았다고 이름을 로아로 짓다니. 참으로 순자다운 작명이었다. 도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자를 적어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순자에게 그 뜻을 물었던 도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순자는 어린 도희에게 거리낌 없이 성의 없는 이름의 뜻을 알려 주었고, 도희는 그길로 개명을 해 달라고 졸랐지만 순자가 그 귀찮은 일을 해 줄 리 없었다. 도희는 학창 시절 백로아로 불릴 때마다 자신이 ‘길에서 낳은 아이’라는 걸 매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잘한 일을 해도 그 이름으로 불릴 때면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도희는 성인이 되자마자 이름을 ‘백도희’로 개명했다. ‘인도할 도(導) 빛날 희(熙)’. 제 손으로 직접 지은 도희라는 이름은 앞으로 빛이 있는 곳으로 자신을 인도해 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이기도 했다.
“너 그걸 어떻게…….”
“당신 이것밖에 안 돼?”
도희는 갑작스레 돌변한 지섭의 태도도 그렇지만, 그가 뱉는 살벌한 질문들이 가슴을 묵직한 돌덩이로 때리는 것 같았다. 지섭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도희를 보고도 폭언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깟 남자 하나 때문에 다시 온 기회 놓치지 마. 그땐 내가 가만 안 둬.”
“너 뭘 안다고……! 자꾸 허튼소리 할래?”
“허튼소린지 아닌지는 본인 양심이 더 잘 알겠지.”
도희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의 말에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사실 누구보다 도희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젯밤 제집에서 까진 무릎에 정성스레 연고를 발라 주던 주완을 밤새 떠올린 도희는 약혼 기사를 보자마자 또다시 밀려드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리곤 배신감을 느끼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났다. 연고 하나 발라 준 게 뭐라고, 제 어머니가 저지른 실수를 수습한 것뿐인데. 고백 같았던 주완의 말도, 결국은 죄책감을 면죄받고 싶은 알량하고 비겁한 양심이라는 걸 깨닫자 도희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켰다. 왜 대체 그 모진 일들을 당해 놓고도 잠깐의 달콤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도희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 생각은 촬영 내내 도희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대사를 읊다가도 어제의 다정했던 주완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동시에 그를 떠올리는 자신을 혐오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즐겁게 놀고, 극 중 ‘이지환’이라는 낯선 남자에게 설레야 하는데 억눌린 분노 때문인지 그 감정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촬영이 늘어질수록 도희는 저 자신을 더욱더 모질게 채찍질했다. 그럴수록 주완을 향한 원망은 커져 가고, 악순환이었다.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내 노력 헛수고로 만들지 마.”
그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지섭이 생각보다 자신의 상당 부분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희가 지금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 그녀가 로아라는 이름을 버렸던 이유 등 모든 건 도희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알아차릴 수 없는 맥락이었다. 그저 평범한 후배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섭은 도희의 속사정을 전부 알고선 충고를 하는 것 같았다.
“똑바로 하라고. 안 그럼 나한테 잡아먹힌다?”
“너, 너…… 무슨……!”
마지막 경고까지 마친 지섭은 말을 더듬는 도희에게서 확 떨어졌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지섭은 느릿하게 제 머리를 쓸어넘기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나한테 오든가.”
“뭐?”
도희는 자신을 등지고 나직이 중얼거린 지섭의 목소릴 제대로 듣지 못했다. 도희는 지섭의 넓은 등만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선배님.”
그때, 활기찬 목소리를 내며 지섭이 뒤를 돌았다. 마치 벗어던졌던 가면을 다시 쓴 듯 지섭의 표정은 아까완 달리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가실까요?”
미간을 좁히는 것만으로 도희를 압도했던 그의 눈이 거짓말처럼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었다. 그 표정 하나로 도희는 지섭과 조금 전 있었던 일이 꿈처럼 몽롱해졌다.
촬영이 재개되고 도희의 눈이 총명하게 빛났다. 맞는 말만 주야장천 늘어놓은 지섭 덕분인지 머리를 여러 번 두들겨 맞은 것처럼 정신이 좀 전보다 훨씬 맑아졌다. 지섭이 건방지긴 했지만, 촬영에 집중해야 하는 지금은 우선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도희는 잔뜩 힘주고 있던 눈에 힘을 풀었다. 피식피식 우스꽝스러운 실소를 터트리기도 하고, 몸을 배배 꼬기도 하며 도희는 술에 취한 진상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어둠을 한 꺼풀 벗겨 낸 도희의 모습에 스태프들도 저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몰래 삼켰다. 촬영의 분위기를 느낀 지섭도 도희의 열연을 지켜보며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야이쒸! 거기 너! 서!”
“수향 씨? 정신을 좀 차려 봐!”
지환이 수향을 걱정하며 그녀의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는 순간, 도희의 표정이 바뀌었다. 연기에서 확 깨어난 듯한 도희의 모습에 감독은 또다시 NG를 외쳤다.
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저러지? 지섭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죄송합니다.”
“방금 거 좋았으니까, 그대로 하자고. 어?”
김 감독은 배우들이 감정을 놓치지 않도록 곧장 카메라를 재정비했다. 지섭은 아무 생각 없이 도희를 응시했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린 듯한 도희의 연기에 만족하고 있는데. 아쉬운 마음에 도희를 쳐다보자 도희가 자신을 공격적으로 노려봤다. 도희의 살기에 지섭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자 도희가 멀리서 입을 작게 움직였다. 지섭은 잘 보이지 않는 도희의 입 모양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너, 이따 봐.’
그렇게 입을 벙긋거린 도희는 목 언저리를 손으로 찍 그었다. 이제야 연기가 확 깬 이유가 짐작됐다.
‘의식한 건가.’
지섭이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표정이 변한 건 아무래도 좀 전에 보였던 지섭의 달라진 모습 때문인 듯했다. 지섭은 도희에게 좀 더 살가운 후배 노릇을 하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면을 벗은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후배로만 보던 자신을 경계한다는 건 지섭에게 나쁜 일이 아니니까. 지섭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도희를 보곤 씩 웃었다.
‘귀엽네.’
이번엔 씩씩거리는 도희에게 지섭이 입을 벙긋거렸다. 크게 입을 벌린 탓에 무슨 소린지 단번에 알아들은 도희는 별안간 뻣뻣하게 굳어졌다. 지섭은 그 모습을 보곤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어깨를 떨며 큭큭거렸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에 두 배우의 눈빛이 변했다.
술에 취해 발이 꼬인 수향이 지환을 덮치고, 소파 위에 두 사람의 몸이 포개지는 것까지 두 번 만에 넘어갔다. 그다음은 곧장 키스 신이었다. 대본에 쓰인 건 [수향이 지환을 지그시 노려본다. 지환은 그런 수향을 반한 듯 바라본다. 수향이 충동적으로 입술 박치기를 한다. 지환이 키스를 받아들인다.] 정도가 다였다. 스태프들은 여태까지 케미가 잘 맞던 두 배우가 키스 신을 어떻게 해낼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 * *
오전 회의를 끝낸 주완은 점심 식사 약속을 취소하곤 본가로 향했다. 본가에 들어서자 여러 직원이 인사를 건넸지만, 주완은 인사를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경직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마당을 가로질렀다. 어제 일도 그렇고, 당장 부현을 보기 껄끄러운 정 비서는 그 뒤를 따르면서 내내 울상이었다.
집에 들어온 주완은 황급히 부현을 찾았다. 거실, 부엌, 침실 등을 살피던 주완은 드디어 서재 문을 열었다. 부현은 고풍스러운 빈티지 느낌으로 잘 꾸며진 책상 위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옆에 두고 서류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부현은 갑작스레 방문한 주완을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마치 그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내려놓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 아들 왔니?”
“결혼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주완은 인사도 없이 곧장 부현에게 말했다. 주완은 오전 회의가 끝남과 동시에 정 비서에게 약혼 발표 소식을 들었다. 하룻밤 새에 이런 일을 벌인 건 보나 마나 부현의 소행이 틀림없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효주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우선 부현을 만나야 했다.
“나도 말했잖니.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고. 이게 다 널 위해서야.”
부현은 자신이 벌인 일이 꽤 마음에 드는 듯 여유롭고 고매한 태도로 커피를 홀짝였다.
“장효주도 알아요?”
“알지?”
“상의하시고 벌인 일입니까?”
“안 그래도 아침에 사과하려고 전화했더니 되레 좋아하더구나. 어머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나도 좋다면서. 애가 너무 예쁘지 않니?”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주완은 노기등등한 얼굴로 부현을 노려봤지만, 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앞에 놓인 서류들을 마저 살폈다. 주완은 그런 부현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제 아들의 서늘한 눈빛이 내심 신경 쓰였지만, 이번만큼은 밀리지 않겠노라 생각한 부현은 일부러 더 입꼬리를 올리며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점심 먹고 갈래?”
“어머니.”
묵직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주완의 목소리에 부현은 솜털이 쭈뼛 섰다.
“저 죽다 살아났어요.”
애써 의연한 척 앉아 있는 부현의 낯빛이 돌연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런 제가…… 못할 건 없단 말입니다.”
담담하게 말을 마친 주완은 그대로 사색이 된 부현을 내버려 둔 채 본가를 빠져나왔다.
* * *
도희와 지섭은 립을 새로 고친 뒤 긴장감 속에 아까 엎어졌던 그 자세 그대로 소파에 포개어 누웠다. 도희가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에 올리고, 한쪽 팔을 세워 상체를 들고 있긴 했지만 몸이 계속 밀착되자 지섭은 어딘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자꾸 자세를 고쳤다.
“촬영 시작합니다.”
하지만 지섭이 편한 자세를 찾기 전, 촬영이 시작됐다. 지섭은 술 취한 메이크업으로 제 볼 터치가 과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가까이서 도희의 숨결이 자꾸만 입술에 닿으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물론 제대로 숨을 쉬기도 곤란했다. 한마디로 죽을 맛이었다.
도희는 지섭의 당황스러운 얼굴이 연기라고 생각하는 듯 진지하게 연기를 이어 갔다. 도희는 대본에 쓰인 대로 마치 키스하고 싶다는 얼굴로 노골적으로 지섭의 입술을 눈으로 훑었다. 지섭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도희의 매혹적인 얼굴을 전체적으로 응시했다.
첫 촬영 때도 이만큼 긴장하진 않았는데. 비록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니지만, 이제야 비로소 로미오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지섭은 새삼 감격이 밀려왔다. 동시에 그간 도희와 함께 연기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그 파노라마 속엔 빌어먹을 주완의 얼굴도 있었다.
주완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지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지섭의 시선은 느릿하고 끈적하게 도희의 이목구비를 배회했다. 그러자 충동적으로 지환에게 입을 맞춰야 할 수향의 열띤 표정이 수줍게 변했다. 이대로라면 김 감독은 또다시 NG를 외칠 게 뻔했다. 그 순간, 지섭은 도희의 목을 당겼다.
“……!!”
도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는 걸 보고 지섭은 눈을 감았다.
예정에 없던 진한 키스를 퍼붓는 지섭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바람만이 떠올랐다.
‘이젠 날 봐, 백도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