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31화 (31/71)

31화 가면을 벗다

나이 열일곱에 지섭은 동네에서 알아주는 베짱이었다. 대인 관계는 원만하나 이렇다 할 친한 무리도, 단짝 친구도 없이 그는 늘 혼자 다녔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튀는 외모였기에 지섭을 쫓아다니는 여학생도 많았지만, 여학생의 러브 레터는 지섭의 흥미를 크게 끌지 못했다. 몇몇 일진이라 불리는 무리가 찾아와 자신들과 함께 다니자고 제안해도 지섭은 다 귀찮을 뿐이었다.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도, 사랑도, 명예도 지섭에겐 모든 게 다 시시했다.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삶에 의욕이 있지도 않았다.

지섭은 학교도 자주 결석했다. 공부가 싫으니 마음대로 잠을 잘 수 없는 수업 시간이 지루한 것도 당연했다. 담임선생님은 몇 번이고 지섭의 부모님에게 전화했지만, 지섭의 부모님은 전화를 제때 받은 적이 없었다.

지섭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유명한 떡집을 운영했다. 근처에 떡집이 많지 않아 지섭의 부모님은 옆 동네 떡 주문까지 받느라 바빴고, 그만큼 외동아들인 지섭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지섭은 그런 부모님의 방치가 딱히 서럽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간섭하지 않는 부모님이 고맙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지섭에게 간섭했다간 가출 청소년이 되기 딱 좋았다.

세동 고등학교 입학식, 지섭은 여느 때처럼 강당으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도 체육 창고에 기세 좋게 누워 있었다. 아직 명찰을 달지 않아 그가 1학년이라는 걸 모르는 학생들은 태평하게 누워 있는 그를 슬슬 피해, 필요한 체육 도구들을 가져갔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지섭의 얼굴을 보며 저런 훈남이 우리 학교에 있었냐는 등 이런저런 말소리가 들리자, 지섭은 귀찮다는 듯 뜀틀 뒤로 가서 자신이 안 보이도록 몸을 숨겼다.

그렇게 잠이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돌연 문을 잠그는 소리에 지섭은 눈을 번쩍 떴다. 창고에 갇힌 건가 싶어서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멀리서 청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

독백하듯 긴 대사를 애절한 목소리로 읊는 그 목소리에 지섭이 상체를 도로 기울였다.

“아버지를 잊으시고 그 이름을 버리세요. 아니, 그렇게 못 하시겠다면 저를 사랑한다고 맹세만이라도 해 주세요.”

뜀틀을 가림막 삼아 지섭은 고개만 빼꼼 내밀어 그 너머의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딱 달라붙지 않는 너덜너덜한 교복을 입고 3학년 명찰을 달고 있었다. 지섭은 높게 달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비춘 여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화장기 없이 맑고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얼굴은 눈물 없이도 우는 것처럼 처량해 보였다. 고작 두 살 차이인데, 지섭이 보기에 여자는 한 백 년 살아온 사람처럼 한 서린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름이 뭐람? 장미꽃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똑같이 향기로울 게 아닌가? 로미오 역시 그 이름이 아니라도 그 이름과 관계없이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남을 게 아닌가?”

청순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는 곧 교활한 여자처럼 표독스러웠다가, 책임감 없이 철없는 표정을 지었다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격앙된 목소리를 날카롭게 냈다가 도로 절망 속에 버려진 듯 고달파졌다.

지섭은 그녀의 독백 연기를 홀린 듯 바라봤다. 숨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연기가 계속되는 내내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압도당한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지섭은 여자의 눈짓 하나, 표정 하나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관찰했다.

“하아.”

연기가 끝난 듯 숨을 뱉자마자 여자의 표정이 유순하게 변했다. 연기할 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마치 여자에게 빙의되어 있던 영혼이 그대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지섭은 여자의 이름표를 유심히 바라봤다.

‘백로아’

여자의 이름표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진짜 이해 안 되네.”

그 말을 하며 여자가 지섭을 향해 돌아섰다. 지섭은 깜짝 놀라 재빨리 몸을 숨겼다.

“5일 만에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건가?”

여자는 정열적인 사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지섭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감정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그런 연기를 한 거야?

세동 고등학교에 연극부가 유명하단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예술고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10년 전 모여 만든 연극부는 선배들이 모두 졸업하고 5년 동안 유명무실했는데, 작년에 청소년 연극제에서 대상을 타면서 다시 그 이름이 급부상했다고 했다. 지섭은 그 중심에 혹시 저 여학생이 서 있는 건 아닐까 추측했다.

“로미오, 그 이름을 버리시고 당신의 신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 이름 대신에 이 몸을 고스란히 가져가세요…….”

여자는 이해가 안 된다는 말 뒤에 몇 번이고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지섭은 더는 그 속에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다음이 무슨 내용인진 모르겠지만, 지섭은 다음 대사를 읽어 주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저런 연기를 하는 여자와 함께 나란히 서, 여자가 부르는 로미오가 되는 상상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나 같으면 이런 가족 있었으면 절대 안 버린다.”

“……?”

“배가 불렀지, 줄리엣.”

“풉.”

지섭은 방심한 틈에 터져 나온 웃음에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인기척을 느낀 여자는 경계 서린 목소리로 허공에 대고 물었다.

“누구야? 누구 있어요?”

들켰다고 생각한 지섭이 놀라지 않게 그녀 앞에 나타나려는 순간이었다.

쾅쾅쾅! 바깥에서 누군가 요란하게 창고 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여자는 문을 열고 불현듯 나타난 체육 선생님께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입학식 때문에 강당을 빼앗겨서 장소가 여기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는 여자의 말이 끝날 때까지도 지섭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지섭은 연극부 단원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교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연극부를 담당하던 음악 선생님에게 원서를 내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이야, 너 들어오면 우리 애들 난리 나겠다.”

선생님은 지섭의 말끔한 이미지를 칭찬했다. 그는 별안간 지섭의 중학교 때 성적을 물어보더니, 진지하게 연기해 볼 생각은 없냐고 묻기도 했다. 선생님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척하던 지섭은 돌아가기 직전 진짜 궁금했던 걸 물었다.

“여기 ‘백로아’라고 있나요?”

“로아? 단원이긴 한데, 이제 부 활동은 못 할걸. 걔 데뷔해서 바쁘잖아. 너도 로아 공연 보고 들어왔구나?”

“네? 아, 네. 뭐…….”

공연을 본 건 아니지만 로아의 연기를 보고 연극부에 지원한 건 사실이니까. 지섭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로아 걘 부모만 잘 만났어도 바로 데뷔했을 텐데.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네?”

“아, 아니다. 내가 로아를 좀 예뻐하거든. 어쨌든 너도 그 친구처럼 되고 싶으면 열심히 해! 우리 연극부 유명한 거 알지? 로아 따라가고 싶으면 너도 열심히 해서 따라잡으란 말이야, 인마.”

음악 선생님의 말씀은 지섭에게 계기가 됐다. 자신이 연기자로서 성공하면 언젠가 분명 그 눈망울을 마주 보며 연기할 날이 오겠지. 그런 게 연기라면, 지섭도 제법 흥미가 생겼다. ‘백로아’는 지섭의 인생에 처음 등장한 그 순간부터 특별했다. 공부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흥미를 못 느끼던 지섭에게 ‘백로아’라는 여자가 삶을 부여해 준 거나 다름없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목표를 정하고 그를 향해 달려가는 지섭의 기지가 제대로 발휘된 건.

그로부터 반년 후, 지섭은 로아를 TV에서 발견했다. 백로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여자는 ‘백도희’라는 새 예명으로 일일 드라마에 모습을 나타냈다. 지섭은 그 뒤로 도희가 나오는 드라마며 인터뷰를 다 찾아봤다. 도희가 연예계에서 입지를 굳히면 굳힐수록 지섭의 연기 열정도 날이 갈수록 불타올랐다. 지섭의 부모님은 지섭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그저 보기 좋은 듯 그가 해 달라는 대로 다 밀어주었다.

그렇게 3년. 열아홉에 그는 수시로 그토록 원하던 K대학의 연극 영화과에 합격했다. 모든 건 지섭의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섭이 도희의 인터뷰를 찾아보던 중,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

[백도희 씨는 이름이 본명인가요?]

[네, 본명입니다.]

내가 아는 이름은 분명 ‘로아’인데? 지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를 파헤치다가 그녀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개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음악 선생님을 통해 ‘백로아’라는 이름에 관련된 아픈 사정도 알아냈다.

지섭은 하루빨리 그녀 곁에 서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도희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다. 지섭은 대학교 1학년을 마친 뒤 군 복무를 제때 마쳤고, 제대하자마자 곧장 대형 소속사 오디션을 봐서 계약했다. 지섭은 일부러 SP엔터테인먼트에는 지원서를 넣지 않았다. 누구나 다 동경을 품을 만한 도희 소속사의 흔한 후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섭은 언젠가 도희와 어깨를 견줄 날만 고대했다.

대학교에 다니던 도중 지섭은 운 좋게 주말 드라마 조연에 캐스팅됐다. 졸업을 앞둔 상황이었기에 출석 일수는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모든 건 지섭이 설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촬영에 임하던 중 지섭은 도희 열애설을 접했다. 처음엔 좀 충격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줄리엣의 가슴 아픈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도희였으니, 그녀가 사랑 때문에 연기를 그만둘 리는 없었다. 도희가 연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지섭은 도희와 함께 연기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여겼다.

지섭은 더욱 열심히 연기에 충실했다. 어딘가 모르게 조금 조급해지긴 했지만, 인지도를 쌓은 뒤 도희에게 다가가려는 계획도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열애설이 나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도희의 결혼 발표 소식이 들려왔다. 하필 상대가 재벌이라 이대로 은퇴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지만, 연기를 죽을 때까지 그만둘 마음이 없다고 한 도희의 결혼 소감을 보곤 그마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일은 일 년 뒤 이혼 소식이 밝혀지며 터졌다. 연기를 사랑했던 도희는 여러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드라마니, 광고니 모두 하차하는 건 물론이고, 하필 재벌과 결혼했던 도희의 행적을 좋게 보는 이가 많지 않았다. 도희는 돈 보고 결혼하더니 꼴좋다느니, 위자료는 얼마나 받았다느니 하는 많은 악플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공황 장애와 대인 기피증을 얻었다는 기사도 봤다. 그때, 지섭은 첫 주연인 ‘아는 누나’ 캐스팅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자리에 있었으면 됐는데.

허무했다. 도희의 가치를 알아차린 건 지섭이 주완보다 훨씬 먼저였다. 그간 뭐든 머리를 써서 얻지 못한 게 없던 지섭은 당연히 자신의 계획대로 도희 옆에 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결혼과 이혼이 도희의 창창한 앞길을 모두 망쳤다. 지섭은 주완을 용서할 수 없었다.

..“NG! 오늘 백도희 씨 왜 그래?”

그런데. 주완은 이혼하고 3년이 지난 지금도 배우 백도희를 흔들고 있다. 언제는 사랑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더니.

“죄송합니다.”

아직까지 남자 하나 못 잊어서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도희의 모습이 몹시 불쾌했다.

도희는 키스 신은커녕 술에 취한 장면도 제대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가 나야 하는데, 도희의 표정은 장례식장에 온 사람처럼 시종 허탈하고 음울했다. 스태프들도 이번만큼은 김 감독이 트집을 잡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도희는 분한 듯 입술을 짓이기며 악착같이 촬영에 임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게 서른 번쯤 찍었을까. 김 감독이 결국 쉬었다 하자며 소리를 질렀다. 도희는 흩어지는 스태프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쉬었다 합시다!”

성질난 김 감독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도희를 원망의 눈초리로 흘기며 하나둘 흩어졌다.

지섭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깟 지나간 남자 약혼 발표가 뭐길래. 남자 하나 때문에 연기를 저버리는 도희가 괘씸했다. 결국 지섭은 충동적으로 도희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얘기 좀 해요.”

그렇게 말하곤 성큼성큼 앞서가는 지섭을 도희는 잠시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쫓았다.

지섭은 큼직한 촬영차 뒤편으로 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곤 도희를 몰아세웠다. 도희는 큰 키를 자랑하며 위협적으로 제 앞에 선 지섭의 행동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왜, 왜 이래.”

게다가 항상 웃는 미소를 유지했던 그가 미간을 좁히며 험상궂은 얼굴을 하니 더 무섭기도 했다. 도희는 자꾸만 가까이 붙는 지섭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지섭은 한쪽 팔을 도희의 얼굴 옆에 세우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백도희. 아니, 백로아.”

지섭이 잊고 있던 이름을 낮게 부르자마자 도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섭은 ‘백로아’라는 이름이 떨어지자마자 자신을 노려보는 도희를 노골적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정신 안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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