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약혼 발표
“내 말 안 들려요? 내가 우스워요?”
주완은 처음 오는 집일 텐데. 그는 마치 와 본 적이 있다는 듯 익숙한 태도로 부엌에 가 커피포트 안에 미지근한 모과차를 부었다. 그는 커피포트 전원을 올려놓곤 자신을 뒤따라온 도희의 손목을 잡아채, 거실로 끌고 갔다.
“뭐 하는 거예요!”
주완은 무턱대고 도희를 소파에 앉혔다. 도희는 주완의 힘에 눌린 게 분한 듯 씩씩거리다 분을 못 이겨 그의 뺨을 소리 나게 때렸다.
“……!”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지고, 도희는 그대로 굳어졌다. 때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간 도희 또한 놀랐다. 도희는 자신의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곤 얼른 손을 거두었다. 도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주완은 도희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주완의 고개가 돌아간 채 몇 초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잠시 멎어 있던 주완은 별안간 태연하게 도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만히 있어.”
방금 뺨을 맞은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연한 태도에 도희는 순순히 주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방금은…….”
“됐어.”
주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봉지 안에 있던 연고와 대일밴드를 꺼냈다. 그는 도희의 무릎을 제 앞에 단단히 세워 두곤 연고 뚜껑을 열었다.
“하, 하지 마요.”
도희는 주완을 때린 걸 미안해하면서도 꿋꿋이 말했다. 하지만 집까지 쳐들어온 마당에 주완이 그 말을 들어 줄 리 없었다.
“하게 해 줘.”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을 뱉은 주완은 검지에 연고를 동그랗게 짜서 도희의 무릎 위를 살살 문질렀다. 연고가 원을 그리며 상처 위에 얹어졌다. 도희는 상처 부위가 따끔거려 한쪽 눈을 찡그렸다.
“미안해. 다치게 해서.”
도희의 상처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주완이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나서.”
도희는 주완의 사과에 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무릎을 꿇고 진중하게 사과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화보단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도희는 두 입술을 앙다물었다.
주완이 연고를 바른 그 위에 대일밴드를 붙이자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가 났다. 주완은 벌떡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당장이라도 내쫓아야 하는데. 어쩐지 더는 나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셔.”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과차를 머그잔에 담아 도희에게 내밀었다. 도희는 뜨거운 모과차를 순순히 받아 들었다. 주완은 도희가 차를 마시길 바란다는 듯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의 지긋한 시선에 도희는 저도 모르게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다.
“좀 괜찮아?”
주완의 말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어느덧 소파에 앉아 뜨거운 모과차를 마시니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달달한 모과 향이 주완의 체취와 섞여 잔잔하게 퍼졌다. 도희는 말없이 모과차를 후후 불며 차 위에 동그랗게 물결치는 모양만 빤히 봤다.
“좋아했잖아, 모과차.”
그랬었나. 확실히 예전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희는 커피가 아니면 차를 마시는 일이 없었다. 라떼를 좋아하던 도희는 이제 아메리카노만 마셨고, 달달한 모과차를 좋아하던 취향은 어느덧 잊힌 지 오래였다. 도희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옛날 취향을 꺼내는 주완에게 냉랭한 투로 말했다.
“이젠 아니에요.”
“……그래?”
“취향이 변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요.”
두 사람 사이엔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머그잔을 잡고 있던 한쪽 손을 내리자, 도희 옆에 놓여 있던 다이어리가 손에 잡혔다. 도희는 두툼한 다이어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그를 향해 물었다.
“진짜 훔쳤어요?”
도희의 물음에 주완이 몸을 흠칫 떨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거짓말이죠?”
“사실이야. 그것도 미안해. 내가 훔쳤어.”
“언제, 어떻게요?”
아무리 속을 알 수 없는 주완이지만, 적어도 주완이 그런 짓을 벌일 사람이 아니라는 정돈 알고 있었다. 끝까지 의심하는 도희에게 주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거만한 변명을 꺼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어디에 있든 난 뭐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죠. 그런 사람이죠. 당신은.”
도희는 다시금 자신을 깔아뭉개며 험한 말을 일삼는 부현을 떠올렸다. 참 대단한 집안이었다.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오해를 해 놓고 한마디 사과 없이 사라지고. 예나 지금이나 도희가 곁에 있기엔 주완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슴푸레한 여명이 마당을 적시고 있었다. 도희는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잔잔한 시간은 어느덧 11시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가세요.”
도희는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하는 주완을 깨웠다. 그러자 주완은 알았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완이 무거운 발을 떼고, 도희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주완은 몇 발자국 가지 않아 할 말이 있는 듯 뒤를 돌았다. 그의 얼굴엔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한데,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무슨 약속이요?”
“네 앞에 다신 나타나지 않겠단 약속.”
이미 마음을 다잡은 듯 주완의 목소리가 결연하고 비장했다. 잠시 풀어졌던 도희의 눈에 도로 힘이 들어갔다.
“나한테 왜 이래요?”
“이것만 할게. 다치면 치료해 주고, 아프면 위로해 주고.”
“나한텐 당신 위로 필요 없어요.”
“하게 해 줘. 죽을 것 같아서 그래.”
도희는 집요하게 시선을 부딪쳐 오는 주완을 피하지 않았다. 도희는 고백 같은 주완의 말에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주완의 눈동자가 더 그윽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눈빛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빈주먹을 꽉 쥐었다.
“미련 있는 사람처럼 굴지 말고, 행동 똑바로 하세요.”
침대에 누운 도희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도희는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오늘 있던 일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도희에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부현에게 따귀를 맞은 게 아니라 주완이 다친 무릎 위에 연고를 발라 주는 모습이었다. 부현의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더 분하고 화가 나야 하는데, 도희는 계속해서 그 뒤에 나타난 주완만을 떠올렸다.
기세 좋게 뻗어있는 눈썹, 깊은 눈매, 오뚝한 콧날을 가까이서 내려다보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잔향이 짙게 남은 머스크 향을 풍길 때마다 도희는 숨을 멈춰야만 했다. 도희는 제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은 제 속도대로 뛰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이 흥분 상태인 것처럼 자꾸 열이 올랐다. 밤샘 촬영으로 힘들 법도 한데 잠이 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도희는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주완의 생각을 지우려고 부단히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주완의 모습은 더 선명해졌다. 부현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피던 걱정스러운 주완의 표정과 현관 앞에서 문을 잡고 봉투를 내밀던 주완의 강경함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도희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밤새 주완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3년 전, 얼마나 바랐던 주완의 다정한 모습이었나. 결혼하고 점차 변해 가는 주완을 볼 때마다 몇 번이고 되돌리고 싶던 모습이었다. 도희는 뒤늦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주완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하게 해 줘.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주완의 절절 끓는 애달픈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도희는 두 손으로 제 귀를 꽉 막은 뒤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도희는 점차 그를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간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 *
다음 날,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한 도희는 퀭한 눈으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오전 스케줄이 없기에 반드시 늦잠을 자라고 신신당부했던 나영은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도희를 보곤 걱정스레 물었다.
“밤새 무슨 일 있었어? 상태가 왜 이래?”
“아냐, 아무 일도.”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호의적인 댓글 덕에 기분 좋았었는데. 나영은 도희를 둘러싸고 있는 음울한 분위기를 수상하게 여겼다.
하지만 도희는 나영에게 어제 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좋은 일이 있어도 불안하다는 도희 말에도 열을 낸 나영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도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본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한참 대본을 읽고 있던 도희는 촬영 스케줄과 대본을 비교해 보곤 화들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안개처럼 뿌연 머릿속에 한순간에 개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이 그날이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본을 꼼꼼히 보던 도희는 마침 지섭이 다가오자, 부자연스럽게 그의 눈을 피했다.
“선배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지섭은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도희에게 말했다. 도희는 하는 수 없이 지섭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지섭은 이전보다 더 말끔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유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식해서인지 오늘따라 어려 보이기만 했던 그의 얼굴선이 평소보다 굵어 보였다.
“어, 어……네.”
도희는 지섭의 손에 도희와 같은 쪽 대본이 펼쳐져 있는 걸 확인하곤 어색하게 대꾸했다.
오늘 찍을 3회 신에서는 다름 아닌 지섭과의 키스 신이 있었다. 아니, 이건 뽀뽀나 다름없나. 신세 한탄을 하며 술에 취한 두 사람은 한집에서 유치한 실랑이를 벌이다가 소파에 몸을 겹치며 엎어지고, 그 위에 있던 도희가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맞춤을 해야 했다. 결혼 전엔 ‘이슬 키스’니 ‘인형 키스’니, 내로라할 유명 키스 신도 많이 했던 도희였는데 도희는 오랜만에 하는 키스 신이 어쩐지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여자가 먼저 충동적으로 하는 키스 신은 예전 드라마에선 잘 없던 풍경이었다.
“긴장되는 건 아니죠?”
지섭이 짓궂은 미소를 그리며 키스 신이 있는 대본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도희는 지섭이 자신을 놀리려고 한다는 걸 깨닫자마자 눈빛이 돌변했다.
“누가요. 저 잘해요.”
미쳤어. 잘한다는 말은 왜 해!
“우와, 정말요?”
도희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후회하는 사이 지섭의 광대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지섭의 얄궂은 표정을 보며 도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나 놀리는 거예요?”
“아뇨, 선배님. 그럴 리가요. 근데요, 선배님. 저한테 말 언제 놓으실 거예요?”
지섭은 능숙하게 말을 돌리며 도희의 시선을 다른 데로 끌었다.
도희는 갑자기 말을 놓으라는 지섭의 말에 지난날 후배들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도희가 드라마를 오래 찍었을 땐 좀 편해졌다 싶었을 때 자연스레 말을 놓거나 초창기에 후배들의 권유로 말을 놓곤 했었다. 물론 존댓말이 서로 간의 예우일 수도 있지만, 어쩔 땐 먼저 친근하게 말을 놓고 다가오는 선배가 편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배우들과의 관계만 신경 쓰느라 존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도희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니, 그래. 지금부터 놓을게.”
“좋아요.”
도희의 반말을 들은 지섭은 의연한 미소와 달리 귓불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갑자기 훅 올라오는 열기에 지섭이 도망치듯 뒤를 돌았을 때였다. 도희의 매니저인 나영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오늘 내내 기분 안 좋은 거, 설마 이것 때문이야?”
“뭐가?”
“차주완 약혼 발표.”
“……!”
도희에게서 멀어지던 지섭이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