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들어와, 네 집에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영은 운전하는 내내 노래를 불렀다. 도희는 오랜만에 신이 난 나영의 모습을 보는 게 몹시 어색했다. 도희는 그간 함께 고생해 온 나영을 바라보며 내심 뿌듯한 마음에 물었다.
“그렇게 좋아?”
“너무 좋아. 우리 도희 마음가짐 달라지기가 무섭게 일일 술술 풀려. 이제 드라마만 잘 되면 다시 잘나가는 건 시간문제야!”
“너무 기대하지 마. 그러면 실망만 크잖아.”
나영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도희의 말에 나영의 입이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나영은 신호등 앞에서 차를 세우곤 돌연 도희를 홱 노려봤다.
“너는 항상 그러더라? 좋을 땐 좋은 것만 생각해! 나쁜 건 닥치면 생각하고!”
“그러게. 나도 좋은데, 좋을 땐 항상 불안하더라. 무슨 일 생길까 봐.”
도희는 알 수 없이 괴어오는 불안에 제 옷깃을 말아 쥐었다.
“됐어. 그간 그 자식 만나서 액땜이란 액땜은 다 했어! 이제 그만 힘들 때도 됐지!”
“그랬으면 좋겠다.”
도희도 사실은 내심 기뻤다. 힘들 때 이유 없는 악플로 시달린 도희는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혼도 이혼이었지만, 생명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도희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도희는 어쩌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기분을 가라앉히는 그 버릇이 죄책감에서 비롯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한 주제에, 행복해선 안 될 거란 생각이 은연중에 도희를 괴롭혔다. 도희는 허리춤에 붙을 것 같은 제 마른 아랫배를 느릿하게 쓸었다. 그 모습을 본 나영은 차를 출발시키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하지 마. 네 잘못 아니고, 너 힘들 만큼 힘들었어.”
도희는 나영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과연 힘들 만큼 충분히 힘들었던 걸까? 도희는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씁쓸하게 웃었다.
집에 도착한 나영은 도희를 내려 주곤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내일은 오후부터 스케줄이 있으니 오랜만에 푹 자 두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오랜만에 집에서 푹 자리라 생각한 도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대문을 열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대문을 열자, 현관 앞에 서 있는 한 중년 여성이 보였다. 도희는 순자인가 싶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중년 여성이 완전히 뒤를 돌았다. 도희는 부현의 얼굴을 확인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현은 도희를 노려보다시피 매섭게 응시하며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찰싹! 얼굴이 맥없이 돌아가고, 도희는 뺨 맞은 부위에 천천히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차마 바로 앞에 위압적으로 서 있는 부현의 얼굴을 똑바로 보진 못했다. 그러자 부현은 도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바닥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다이어리였다.
“너, 이게 뭔지 알지?”
낯익은 다이어리였다. 어느 순간 사라져서, 집 안 어디엔가 있을 거라고 여겼던 다이어리가 왜 부현의 손에 들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희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부현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바라봤다.
“이게…… 뭐예요?”
“이 앙큼한 년 좀 봐. 누가 배우 아니랄까 봐 시치미 뚝 떼고!”
부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희는 순진한 얼굴로 억울한 듯 입술을 악물었다.
“이게 왜 어머님 손에 있……!”
찰싹! 도희의 입에서 ‘어머님’이란 말이 오르자마자 부현은 다시 한번 따귀를 때렸다. 이번엔 더 세게 후려친 덕분인지 도희의 몸이 휘청거리다 이내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뺨은 화끈거리고 얼얼한데, 무릎도 돌부리에 까졌다. 도희는 갑자기 닥친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놓고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부현의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누가 네 어머니야!!”
도희는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했다. 도희는 부걱부걱 끓어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도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몰라?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게 왜 어머…… 아니, 사모님 손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집에 있던 물건을요.”
도희의 설명에도 부현은 도희의 말을 믿지 않는 듯 조소를 터트렸다.
“그럼 네 집에 있던 물건이 발이 달려서 주완이네 집에 떡하니 찾아 들어갔겠니?”
“네?”
이 다이어리가 주완 씨 집에 있었다고? 대체 왜?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저는 주완 씨한테 이 다이어리를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이게 왜 거기서 나와!!”
잠깐의 기쁨도 허락되지 않는 걸까. 잠시 붕 떴던 기분이 한순간에 추락했다. 도희는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 부현에게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달리 변명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대로 침묵을 지키고 있자 부현의 고성이 더욱 커졌다.
“내가 너한텐 당최 체통을 지킬 수가 없어! 어쩜 이렇게 영악하니, 넌?”
부현은 도희가 자신의 고상함을 무너트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잘못한 게 없었지만, 도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을 내리깔고 부현의 말을 듣는 것뿐이었다.
“빨리 바른대로 말 안 해? 이게 끝까지 입 꾹 다물고 있는 것 봐! 너 주완이 다시 만날 거야? 그래? 그래서 이러니?”
“전 주완 씨 만날 생각…….”
“어머니!!”
고성 사이로 묵직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위태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주완이 보였다. 주완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경직된 걸음걸이로 두 사람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 정 비서가 말했니? 내 그 자식을 그냥……!”
주완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부현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희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던 중 주완의 시선이 도희의 뺨과 무릎에서 멎었다. 붉게 부어오른 뺨과 둥글게 살갗이 까진 상처 위로 작게 흐르는 피를 보자 주완은 숨이 멎을 것처럼 답답해졌다. 주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도희를 제 뒤로 숨겼다. 주완의 널따란 등에 가려 도희의 시선에서 부현이 가려졌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부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 지금…… 뭐 하니?”
“어머니야말로 뭐 하시는 건데요.”
“너! 내가 저 다이어리 못 봤으면 어쩔 뻔했어? 저 영악한 게 아직도 너한테……!”
“제가 훔쳤어요.”
부현의 말을 뚝 자르고 뱉은 주완의 폭탄 발언에 도희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졌다.
“뭐?”
“저 다이어리, 제가 훔쳤다고요. 제가 사람 시켜서 그랬습니다.”
“너 미쳤니?”
“어머니 이러시는 것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에요. 숨이 막힌다고요!”
주완의 굵직한 호통에 부현이 눈물을 글썽였다. 제게 늘 효자였던 아들인데, 여자 하나 때문에 저에게 매번 소리치는 게 그토록 서러울 수가 없었다. 부현이 상처를 받은 얼굴로 주완을 바라보자 속상한 듯 미간을 찌푸린 주완이 부현의 손목을 덥석 잡아끌었다.
“나오세요.”
주완은 그대로 부현을 끌고 나갔다.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멀뚱히 서 있던 도희는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듯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다이어리는 주완 씨가 훔쳤고, 그걸 주완 씨 집에서 발견하고 어머님이…….
“하, 하하하.”
그제야 눈물샘이 터져 버린 도희는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실성한 듯 웃었다. 모든 게 오해라는 게 밝혀졌지만, 도희에겐 또 다른 원망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그는 왜 저 다이어리를 훔쳤을까.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주완은 달려오는 택시를 거칠게 잡았다. 뒷문을 열고 어머니를 택시 안에 밀어 넣은 주완은 문 끄트머리를 잡곤 기사 아저씨께 말했다.
“청담동 20길 11. 길은 가면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뭐 하는 거야? 너는!”
부현은 그제야 주완이 함께 타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부현이 뒷문을 닫으려는 주완의 손짓에 얼른 문을 붙잡았다.
“그 애한테 가려고? 엄마 이렇게 두고?”
“구실 주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너, 너! 이 엄마가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아?”
“가세요.”
주완은 그 말을 남기곤 택시 문을 매정하게 닫았다. 부현은 창문으로 멀어지는 주완의 뒷모습을 기가 찬 듯 바라봤다.
도희는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사라진 주변에 거무죽죽한 공기만 도희를 감쌌다. 도희는 오한이 드는 듯 제 몸을 두 팔로 감싸며 몇 발자국 거리에 떨어진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홀린 듯 지난날의 아픈 기억이 기록된 다이어리를 두 어장 넘겨 보았다.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우리의 결혼식.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빨리 부부가 될 줄이야.]
도희는 다이어리를 몇 글자 보지 못하고 덮었다. 다신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묻어 둔 거였는데. 이걸 주완을 통해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가 훔쳤어요.’
정말 그가 훔친 걸까. 점차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 큰 어폐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가 언제 제 이사 온 집을 뒤져 봤단 말인가. 게다가 다이어리가 집에서 사라진 건 꽤 오래전 일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뺨을 두 번씩이나 세게 얻어맞아서인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도희는 몸을 축 늘어트리고 천천히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띠릭. 도어 록 연 소리가 들리자마자 뒤에선 돌연 우당탕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라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대문을 넘어 든 주완이 보였다. 도희는 다시 등장한 주완의 모습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주완이 제게 다가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겠단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희는 주완의 긴 다리에 단숨에 따라잡혔다. 탁! 가까스로 문틈에 발을 끼워 넣은 주완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문을 미처 닫지 못한 도희는 하는 수 없이 문틈을 살짝 벌리고 주완을 올려다봤다. 뛰어왔는지 주완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말했지만 당신 편하자고 하는 사과 안 받아요.”
“이거.”
딱딱한 얼굴로 그를 밀어내는 도희 앞에 주완이 불쑥 작은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봉지 안에는 연고와 밴드, 그리고 편의점에서 파는 따뜻한 모과차가 들어 있었다.
“놀랐을 텐데 마셔. 촬영은 내일인가?”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지만 주완만의 특유한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오랜만에 듣는 주완의 따스한 모습에 도희는 실소를 터트렸다.
“하,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네요.”
“…….”
“가세요.”
도희는 봉지를 내민 주완의 손도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그때였다. 주완의 다른 손이 저돌적으로 문틈을 벌리고, 주완의 커다란 몸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들어와.”
주완은 도희의 몸을 옆으로 밀어내곤 마치 제집처럼 빠르게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행동은 연결된 동작처럼 너무나도 빨라, 미처 도희가 따라잡지 못했다.
“나가요! 누구 마음대로 내 집에 들어와요!”
집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딛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도희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주완은 도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완강하게 움직였다. 주완의 돌발 행동에 도희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