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이어리의 행방
나영이 들이민 건 다름 아닌 시사회 직캠이었다. 이미 조회 수가 100만 가까이 가는 동영상은 이미 댓글이 수천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누가 직캠을 유튜비 사이트에 올렸는데, 이게 지금 SNS에 ‘이혼녀 소신 발언’으로 떴대. 이걸 왜 이제 발견했을까!”
나영은 반응을 보아하니 나쁜 내용은 아닌 듯했다. 도희는 침착하게 동영상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직도 아파요. 시간이 지난다고 이미 남은 흉터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근데 무뎌지긴 하더라구요.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인정하고 받아들여졌어요. 아, 사랑이 식었구나. 우리 사랑이 특별하지 않았구나.]
도희는 제삼자가 되어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당시엔 덤덤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 목소리에 애처로운 허탈감과 씁쓸함이 묻어났다.
[다들 사랑할 땐 그러잖아요. 내 사랑이 영원할 것 같고, 다신 변하지 않을 것 같고. 그렇죠?]
“댓글 반응 봐. 장난 아니야. 이제 우리 도희 진짜 잘 풀리려나 봐!”
나영은 동영상을 재생시킨 채로 그 아래 있는 댓글들을 천천히 보여 줬다. 옆에 앉아 있던 지섭도 나영이 보여 주는 영상과 댓글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
[와, 저렇게 말하기 쉽지 않은데. 백도희 멘탈 갑이네. 쿨하다ㄷㄷ]
[시사회에서 저런 질문을 받아 주네.]
[아픔을 딛고 일어나셨기에 ‘칸의 여인’이 더 의미 있는 거겠죠. 응원합니다.]
[저 무례한 여고생은 뭐냐. 저기 가서 저런 얘길 왜 물어봐. 인성ㅉㅉ]
[학생 질문이라 받아 준 듯. 백도희 예전부터 물러 터진 거로 유명했음.]
[배우가 연기만 잘하면 됐지. 이혼녀가 대수? 하루살이 천만 가즈아!]
[댓글 반응 봐. 물타기 오지네ㄷㄷ]
악플로 한동안 고생했던 도희는 오랜만에 우호적인 댓글을 읽으며 마음이 벅차올랐다. 우호적인 대중들이 돌아서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도희지만, 그저 오랜만에 응원 댓글을 보니 힘이 났다. 시사회 동영상 아래는 대부분 응원 댓글이었고, 질문을 한 학생을 비난하는 댓글은 간간이 보였다. 도희는 지섭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잠시 잊은 채 올라온 댓글들을 하나씩 읽으며 표정이 밝아졌다.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그들은 아니었지만, 팬들이 그간의 아픔을 어렴풋이 알아줬다는 것만으로도 도희는 힘든 시간을 조금은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축하드려요.”
도희가 핸드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지섭이 말했다. 지섭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여전히 암울한 기운이 보였다. 하지만 도희는 그를 눈치챌 만큼 지섭을 꼼꼼히 보지 않았다.
“감사해요.”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곤 댓글을 마저 읽는 도희는 지섭이 멀어지는 걸 보지 못했다.
지섭은 몇 발자국 못 가 뒤를 돌았다. 핸드폰에 파묻힌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도희를 보는 지섭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섭은 조금 전 도희에게 들었던 ‘친구’ 이야기와 시사회 영상에서 봤던 도희의 말을 조합했다. 눈치 빠른 지섭이 그 얘기가 도희, 본인 이야기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친구가 예전에 엄청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지섭은 다른 말보다 그 말이 가장 거슬렸다.
사랑? 사랑이라고?
지섭은 열아홉의 도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5일 만에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건가?’
지섭은 배신감을 느꼈다. 사랑에 회의적이었던 도희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곤 하지만, 그 당시 여배우에게 결혼은 아직까지도 치명적이었다.
도희가 한창 잘나가는 시점에, 나라면 청혼하지 않았을 텐데. 도희의 앞길을 막은 것 같은 재벌 2세가 지섭에겐 이기적인 소유욕을 부린 남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희에게 무책임하게 이혼녀 딱지를 붙이다니. 그로 인해 도희의 일이 여럿 끊겼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주완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섭은 그때 자신의 무력함이 원망스러웠다. 도희를 어둠 속에서 꺼내고 싶어도 당시 이제 막 조연을 맡고 있던 지섭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지섭은 영향력 있는 배우가 되었고, 잘 짜여진 판에 도희를 은밀하게 끌어올 수 있었다.
‘몇 년 지나서 그 남자가 다시 찾아온 거예요. 처음엔 사정이 있다나 뭐라나.’
근데 이제 와 다시 도희를 흔든다니. 지섭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진짜 웃기는 새끼네.”
더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됐다. 무늬만 열애설이 아니라, 도희의 마음을 어떻게든 뺏어서 그녀가 더는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야 했다. 지섭은 아무것도 모른 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도희를 응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 * *
정 비서는 펜트하우스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부현을 보곤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곧 베테랑답게 놀란 기색을 지워 내며 부현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부현은 그런 정 비서의 표정을 보며 효주가 얼마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주완 오빠가 그 언니 시사회에 직접 갔어요! 어머니, 오빠랑 그 언니 끝난 거 아니었어요?’
부현은 우선 흥분한 효주를 진정시켰다. 물론 부현 역시 주완이 뒤에서 그런 허무맹랑한 짓을 하고 다녔다니 기가 찼지만, 그보단 효주를 달래는 게 먼저였다. 사랑은 한순간의 배신감으로 얼마든지 증오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부현은 효주의 3년 동안 공들인 탑이 증오로 변하지 않도록 애썼다.
처음엔 부현도 효주가 며느릿감으로 탐탁지 않았었다. 오래전부터 효주가 주완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부현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J그룹 딸보다 더 근사한 주완의 짝이 나타날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완이 터무니없는 연예인을 집안에 들였을 때 깨달았다. 제 속을 알 수 없는 주완에겐 차라리 오래 알고 지낸 효주가 가능성 있는 짝이란 걸.
부현은 이혼 후에도 주완의 마음이 누구에게 머물러 있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이야 잘살 거라는 주완의 호언장담에 울며 겨자 먹기로 허락했지만, 근본 없는 여자를 또다시 집안에 들일 순 없었다. 그래서 한국 들어올 때부터 효주와 엮어 주려고 부단히 애썼는데,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다녔다니. 제 자식이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또 무작정 화를 내고 소리칠 순 없었다. 그랬다간 주완이 또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다. 이미 한 번의 결혼을 강행했던 주완의 고집을 뼈저리게 느꼈던 부현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웠다.
“들어가 있겠네.”
“네, 본부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완을 다그칠 수 없어서 도희에게 친히 경고까지 했던 것인데. 말실수로 도희와 통화한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던 주완을 떠올리며 부현은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효주랑 결혼해. 사랑이 먼저일 수도 있지만, 네 아빠랑 나 봐라. 결혼하고 사랑이 생길 수도 있는 거야.’
‘저 결혼 생각 없습니다.’
‘왜 없어! 너도 이제 마음잡아야지!’
‘한 번 실패한 거 보셨잖아요.’
‘그러게 왜 그때 말도 없이 이혼……아니, 됐다. 그래, 한 번 실패한 그 애랑 한국 오자마자 만나길 왜 만나? 네가 그러니까 내가 걔한테 경고까지……!’
‘도희, 만나셨어요?’
‘아, 아니. 만난 게 아니라…… 전화 좀 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평소엔 부현에게 결코 화를 내지 않던 주완도 도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켰다. 주완의 냉랭하고 나직한 목소리는 부현을 더욱 화나게 했다.
‘그러게 술을 왜 마셔, 술을! 아직 조심해야 하는 애가! 그게 다 걔 때문이라며! 네가 전화도 했다던데!’
‘하,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건 제 잘못이잖아요. 저 없이도 잘사는 애를 왜 건드리세요.’
‘어머, 내가 건드렸니? 걔가 널 건드렸지!’
‘어머니!!’
‘걘 네가 바람피웠다고 하던데. 넌 그런 애가 아직도 좋아?’
‘……바람이요?’
‘그래! 내가 사람을 잘 봤지, 그 정도 믿음 없는 애랑 뭘 해! 대체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깟 여자애 하나한테 목을 매니? 이제 좀 없는 사람 취급하고 살아!’
‘그게 되면 그렇게 했겠죠. 다음부턴 제발 그러지 마세요. 자꾸…… 찾아가고 싶어지니까요.’
‘너 지금 엄마 협박하니?’
‘도희 찾아갈 구실 주지 말란 말씀입니다. 안 그래도 저 힘들어요.’
정 비서의 안내에 따라 펜트하우스로 들어간 부현은 문이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나 펜트하우스를 배회했다. 혹시 아직까지 도희와 몰래 만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는 마음 때문이었다. 부현은 정 비서가 들어오는지 아닌지 연신 문을 흘긋거리며 주완의 책상 위로 가서 서랍을 순서대로 찬찬히 열었다. 결재 서류, 회사 예산 자료, 보고서 등 책상 위엔 별다른 수상한 점이 보이질 않았다. 하다못해 영화표 한 장이라도 있으면 의심했을 텐데 다행히 데이트 한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블랙박스를 뒤졌어야 했나.”
책상을 뒤져 보던 부현은 물건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고 도로 소파에 가려던 찰나였다. 책상 아래쪽에 떨어져 있는 두툼한 다이어리가 부현의 눈에 들어왔다. 주완이 가지고 있기엔 아기자기한 물건이란 생각에 부현은 무릎을 굽혀 다이어리를 손에 들었다.
“이, 이게 뭐야?”
다이어리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부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열이 올라 머리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부현은 뒷목을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이어리는 대충만 봐도 부현이 차마 끝까지 볼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애가 아닌데. 왜 갑자기 그렇게 술을 마셨는지 모르겠어요. 전 부인한테 전화까지 하고…….’
그제야 부현은 주치의 윤선이 전달한 내용을 떠올렸다. 윤선의 말에 의하면 정 비서가 전달한 서류를 보고 갑자기 그랬다는데. 부현은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무 얌전했지! 이 불여시를 그냥!”
부현은 다이어리를 핸드백에 쑤셔 넣고는 도로 펜트하우스를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완이 도착했다. 야근을 끝내고 돌아온 주완은 펜트하우스 앞을 서성이는 정 비서를 보곤 놀라 물었다.
“왜 아직도 퇴근 안 하고 있어? 서류 놓고 가라고 했잖아.”
“그게…….”
“무슨 일이야?”
정 비서는 갑자기 펜트하우스에 찾아온 부현이 들어왔다가 화가 나서 나갔다고 말을 전했다. 왜 돌아가냐고 묻는 정 비서의 말에 주완에겐 온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한 채 사라졌다고 했다.
“알리지 말라곤 하셨는데, 걱정이 돼서요.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신지…….”
주완과 부현을 모두 오래 봐온 정 비서였다. 정 비서의 말에 주완은 부현이 불같이 화낼 만한 일을 곰곰이 떠올렸다.
그러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주완의 뇌리를 스쳤다. 주완은 황급히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와 제 책상에 있어야 할 다이어리를 찾았다. 주완의 손이 우악스럽게 온갖 곳을 다 뒤졌지만 다이어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신 안 나타나겠다고 약속했는데……!’
주완은 그대로 차 키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