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27화 (27/71)

27화 아직 사랑이 남았나 보죠

이 주가 흘렀다. 촬영은 이 주 동안 밤낮없이 계속됐다. 도희가 이 주 동안 집에 들어가서 잠을 잔 건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진 모두 촬영장에서 쪽잠을 자는 게 전부였다. 지섭의 부상으로 촬영 스케줄이 촉박해져서인지 김 감독은 더욱 신경이 날카로워져 배우들에게 깐깐하게 굴었다. 잠이 부족한 배우들도 고된 촬영으로 지치긴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도희는 방긋방긋 웃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도희는 촬영 내내 스태프들의 힘을 북돋우는 건 물론이고, 선후배 배우들을 살뜰히 챙겼다. 도희는 어느새 촬영장의 중심이 되어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축 처져 있는 분위기가 감돌면 도희가 활기찬 목소리로 간식 차를 부르고, 지친 스태프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도희는 처음과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요즘 백도희 배우 좀 달라진 것 같지 않냐?”

“그니까. 도도해 보였는데 아닌가 봐.”

김 감독도 그런 도희에게 더는 트집을 잡지 않았다. 촬영 중 몇 번의 트러블이 더 일어날 뻔한 적도 있었지만, 도희는 이전처럼 김 감독과 대치하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김 감독도 이전의 신경전은 모두 잊은 듯 도희를 다른 배우들과 똑같이 대했다.

“류라일 씨, 밥 먹었어?”

물론 그 안에서 라일을 편애하는 것 또한 바뀌진 않았다.

촬영 팀의 점심시간. 점심 메인 메뉴는 다름 아닌 짜장과 카레였다. 김치와 소고기뭇국, 그리고 오이무침을 기호에 맞게 식판에 받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각자 친한 무리끼리 자리를 펴고 앉았다. 도희는 처음엔 다른 배우들이 어려워 나영과 둘이서만 밥을 먹었다. 그런데 어느새 한두 명씩 도희를 자신들 쪽으로 불러, 도희는 매일매일 다른 무리에 끼어 함께 밥을 먹었다. 도희는 여느 때처럼 식판을 들고 자신을 부르는 무리에게 가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백도희. 이리 와.”

종선이 도희를 불렀다. 도희는 토끼 눈을 하고선 종선을 바라봤다. 그 많은 스태프와 배우가 도희를 불렀지만, 가장 원로 배우인 그녀가 도희를 부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대본 리딩 날 종선에게 들었던 말도 있어, 되도록 종선의 눈에 띄지 않으려던 도희였다. 도희는 종선의 부름에 머뭇거렸다.

“오라니까?”

“네!”

한 번 더 저를 부르는 종선의 명령에 도희는 재빨리 식판을 들고 그녀 앞에 앉았다. 종선 앞에는 이미 다른 중년 배우들, 그리고 라일이 앉아 있었다. 라일 역시 종선과 함께 식사하는 건 처음인지 무척 얌전하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도희를 흘긋 흘겼다. 종선은 그런 라일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잡아먹게?”

“네?”

종선이 라일을 향해 묻자 라일이 화들짝 놀랐다. 라일은 어느새 희끄무레한 얼굴로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악의 없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먹자.”

“맛있게 드세요, 선생님!”

“맛있게 드세요!”

종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의 배우들이 수저를 들었다. 도희 역시 씩씩하게 인사한 뒤 수저를 떴다.

“여기 앉아도 되죠?”

“어, 지섭 씨!”

또 다른 중년 배우가 다가온 지섭을 살갑게 맞이했다. 지섭은 자연스레 식사 대열에 합류했다. 지섭은 친숙한 인사로 다른 중년 배우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도희에게도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선배님.”

도희는 지섭의 인사에 입을 우물거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자리에 별다른 얘기가 오가진 않았다. 아무래도 말실수했다가 종선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조심하기 위해서인지 다들 말을 아꼈다. 그런데 그때, 국을 떠먹던 종선이 말했다.

“요즘 좋은 일 있어?”

“콜록! 저, 저요?”

퉁명스레 묻는 종선의 말에 도희가 고개를 바짝 들었다.

“그래, 너. 사람이 기운이 달라졌잖아. 표정이 밝아져서 그런가, 얼굴도 더 하얘진 것 같고. 그치?”

종선이 다른 중년 배우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드라마를 처음 시작할 때와 유일하게 달라진 거라곤 도희의 마음가짐이었다. 도희는 최근 2주 동안,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공백기가 있다고 해서 주눅 들지 말자. 모르는 게 생기면 물어보자.’라는 마음으로 주눅 들지 않고 사람들을 대하자, 도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달라졌다. 처음엔 도희에게 말도 걸지 않았던 배우들이 도희에게 먼저 와 말을 건네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 도희 씨 좀 달라진 것 같아. 요즘 연애해?”

“쿨럭! 쿨럭!”

이번엔 다른 데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지섭이었다.

“진짜 둘이 연애하는 거야?”

종선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할머니의 집요한 눈동자를 하곤 물었다. 도희는 처음엔 적대적이었던 원로 배우가 자신을 칭찬하는 데에 기뻐하며 수줍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럼. 달리 마음의 변화라도 생겼어? 처음 드라마 할 땐 죽상을 하고 오더니.”

그거였구나. 도희는 그제야 종선이 왜 자신을 처음부터 그토록 싫어했는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냥 앞으로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치? 그 전엔 대충 얼결에 주연 돼서 온 거지?”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 보였어. 내가 그래서 얘 처음에 싫어했잖아.”

허심탄회한 종선의 말에 도희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한 중년 배우들이 도희를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괜찮아.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 좋아한단 뜻이야.”

그제야 도희는 안심한 듯 긴장을 풀었다. 라일은 도희를 중심으로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게 못마땅한지 도희 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묵묵히 밥만 먹었다. 얼굴에 ‘이럴 거면 난 왜 부른 거야.’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너는. 김 감독이랑 뭐 있어?”

“켁! 네??”

방심하고 있던 라일이 밥풀을 토해 냈다. 라일은 제가 뱉어 낸 밥풀을 휴지로 닦은 뒤 똘망똘망한 얼굴로 종선을 바라봤다. 종선은 이번엔 장난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냥 묻는 거야, 노인네가 궁금증이 많아서.”

종선은 별 의도는 없다는 듯 털털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라일은 종선의 질문을 결코 가볍게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일은 별안간 자세를 고쳐잡고 여우 같은 눈을 치켜뜨며 특유의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감독님이 왜요? 감독님 원래 다 잘해 주시잖아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을 지은 라일을 보곤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종선은 그런 라일을 무시한 듯 도로 수저를 들고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아닌가……. 선생님, 혹시 뭐 불편한 거 있으셨어요?”

“아니야. 신경 쓰지 마.”

찜찜한 라일이 재차 물어도 종선은 손사래를 치며 밥 먹는 데 집중했다. 종선이 라일을 대놓고 피하자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배우들 역시 하나둘 식판을 비우고 일어났다. 라일은 곧 똥 씹은 얼굴을 겨우 숨기며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식사를 마친 도희는 나영에게 가서 있었던 일을 대충 털어놨다. 나영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돌고래 울음소리 같은 높은 소리를 냈다.

“꺅, 그래! 요즘 너 잘 웃잖아! 너 보고 있으면 내가 다 기분이 좋다니까!”

“그래? 다행이다. 너도 기분 좋아서.”

“이제야 다들 우리 도희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나영의 호들갑에 도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도희는 기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니, 마지막 시사회 날 이후로 딱히 ‘일’이라고 할 만한 사건도 없었다. 주완은 그 뒤로 정말로 연락하지 않았다. 도희 역시 다신 주완과 얽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가 최근 보내왔던 문자와 전화번호도 전부 삭제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주완의 흔적이 한 번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주완은 매일 밤 꿈속에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별을 고하기도 하고, 썸 타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불쑥불쑥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도희는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있는 힘껏 끌어 올렸다.

‘이제 다신 네 앞에 안 나타나.’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분명 원하던 거였는데, 막상 주완이 그렇게 말하니 싱숭생숭했다. 그냥 청개구리 심보일 뿐일까.

도희가 촬영장에서 밝았던 건 일종의 자기 최면이었다. 도희는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일에 더 집중했다. 사람들과 일부러 더 많은 이야길 나누고, 보란 듯이 활기차게 웃기도 했다. 이렇게 일에 충실하다 보면 이런 기분도 잊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나영이 다음 촬영을 위해 늦어진 촬영 의상을 가지러 간 사이, 멀뚱히 앉아 주완을 떠올리고 있는 도희에게 지섭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깜짝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지섭의 물음에 주완 얘기를 할 수 없는 도희는 그에게 대충 둘러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멍 때렸어요.”

“고민 있죠.”

하지만 지섭에겐 도희의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간 답답해서일까. 지섭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도희는 돌연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희가 고민하는 사이 지섭은 어느새 자리를 잡고 도희 옆에 앉았다. 무슨 얘기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단 얼굴이었다.

“제 고민은 아니고…… 친구를 좀 생각하고 있었어요.”

“친구가 고민이 있나 봐요. 말해 봐요, 같이 고민해 볼게요.”

지섭의 열띤 태도에 도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 어차피 알아들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도희는 털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얘긴 아니고 친구 얘긴데…… 친구가 예전에 엄청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 말을 꺼내자마자 지섭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도희는 지섭의 표정 변화가 그저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기 위해 진지해졌을 뿐이라고 여겼다.

“연애하다가 여느 커플처럼 헤어졌어요. 남자가 먼저 마음이 변했다나 봐요. 근데 몇 년 지나서 그 남자가 다시 찾아온 거예요. 처음엔 사정이 있다나 뭐라나.”

“사정? 그 말을 믿어요?”

도희의 말을 지섭이 뚝 끊었다. 지섭은 이미 친구의 이야기 속에 푹 빠진 듯 말투가 날카로웠다. 도희는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 지섭의 태도에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안 믿죠. 근데 심란하긴 했대요. 생전 아쉬운 소리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놓고 자꾸 나타나서.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마주치고, 걱정하고…… 그럴 때마다 친구는 괴롭고 힘들었대요. 잊고 살고 싶은데, 그 사람이 그러지 못하게 막는 것 같아서 싫었대요.”

“피하면 되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한테 제발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 달라고 했대요. 만나도 모른 척해 달라고.”

“잘했네요. 그래서요?”

“그 사람은 알았다고, 다신 안 나타나겠다고 했다네요.”

그 말을 뱉는 도희의 눈동자가 씁쓸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자 지섭이 그런 도희의 얼굴을 진지하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다 해결된 거 아니에요?”

“……그쵸. 근데 친구는 마음이 찜찜하대요.”

“왜요?”

지섭의 물음에 도희는 몇 번이고 떠올렸던 주완의 애달픈 얼굴을 생생히 떠올렸다.

‘……사정이 있었어.’

‘어디 아파?’

‘응원할게. 어디서든.’

“막상 다신 안 나타나겠다고 하니까 싱숭생숭하대요. 자꾸 사정이 있었다는 말이 떠오르고, 꿈에도 나오고……. 미련은 아닌데, 그러고 나니까 더 생각나나 봐요.”

말을 다 끝마친 도희는 화를 내듯 물었다.

“이해가 안 가요. 먼저 변한 사람이고,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인데 친구는 왜 자꾸 그 사람을 생각할까요?”

“…….”

도희는 지섭의 현명한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또렷하게 바라봤다. 잠시 말이 없던 지섭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사랑이 남았나 보죠.”

“네?”

지섭의 말에 도희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지섭은 당황한 도희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미련하네요, 그 친구.”

그때, 돌연 나영이 저 멀리서 소리를 치며, 촬영 의상을 들고 달려왔다. 요란한 소리에 두 사람은 자연스레 나영 쪽으로 돌아봤다.

“도희야! 도희야! 이거 봐! 너 지금 완전 떴어!”

나영은 두 사람 앞에 핸드폰을 공격적으로 내밀곤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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