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다신 네 앞에 안 나타나
“무슨 일이십니까.”
주완은 결코 달갑지 않은 얼굴로 순자를 맞이했다. 순자는 그런 주완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그에게 살갑게 팔짱을 끼웠다. 물론 주완이 팔을 바로 빼 버리긴 했지만.
“어머, 내가 반가워서 그만!”
주완에게 티켓을 받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순자는 주완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다이어리를 직접 보냈고,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지만 연락을 도통 받지 않는 주완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도희에게 물어봐도 사실대로 말해 줄 것 같지 않고.
그래서 순자는 주완을 직접 마주칠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때마침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도희의 마지막 시사회 표였다. 마지막 시사회라 혹시나 했는데, 암표까지 사며 비싼 값을 지불한 보람이 있었다. 시사회가 막 시작되기 직전에 주완은 가장 앞줄을 차지하고 앉았다. 영화관의 불빛이 막 꺼질 무렵이었는데도 순자는 주완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순자는 시사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영화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인터뷰로 무슨 이야길 주고받는지 그런 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순자는 그곳에서 저보다 두 줄 앞에 있는 주완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마지막엔 깜박 잠이 드는 바람에 주완을 놓쳐 버려서 실망하던 차였는데, 마침 주완이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주완을 발견하자마자 순자는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도희와 주완이 꼭 다시 이루어질 것만 같았고, 신은 자신의 편이란 생각에 벌써부터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이게 다 도희 지 년 잘되라고 하는 거지!’
순자는 조금 전 도희와 대화하며 느꼈던 찝찝함을 훌훌 털어 버렸다. 이러나저러나 순자는 두 사람이 다시 맺어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다이어리는 잘 봤지?”
순자는 주완의 냉랭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순자의 살가운 목소리에 주완이 미간을 찌푸렸다. 순자의 질문은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집 앞까지 배달해 준 다이어리를 보지 않았을 리 없다는 확신. 주완은 순자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차였다.
“어딜 가! 대답해 주고 가야지!”
순자는 멀어지려는 주완을 덥석 잡아챘다. 그 손아귀의 힘이 어찌나 센지 주완도 한 번에 뿌리칠 수가 없었다.
“……봤습니다.”
“어때, 우리 도희 참 순애보지? 애가 말이야, 그 긴 시간 동안 차 서방을 잊지도 못하고…….”
“아닌 것 같은데요.”
순자의 말을 듣고 있기 괴로운 주완이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다이어리를 대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는데, 순자의 말을 끝까지 들을 용기가 없었다. 주완은 술을 마신 그날 이후로 다이어리를 들춰 보지 않았다. 이유는 앞으로도 도희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녀를 멋대로 떠나 놓고 염치없지만, 그래도 힘들게 돌아왔으니까, 적어도 그녀의 얼굴만큼은 계속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죄책감이 더해진다면 그녀 앞에 서는 것조차 힘들 것 같았다. 주완은 그래서 비겁하게도 도희의 아픔을 고스란히 들여다보지 않은 것이다.
“다이어리 안 봤어? 그거 보면…….”
“어머니.”
“오호호, 차 서방한테 어머니 소린 들을 때마다 좋다니까! 응, 왜?”
주완이 시사회에 참석한 건 가히 충동적이었다. 회사에 필요한 서류 때문에 본가에 들른 주완은 거실 탁자에서 우연히 다음 날 날짜가 적힌 시사회 티켓을 발견했다. 영화감독인 주승에겐 시사회 초대권이 꽤 자주 왔는데, ‘하루살이’시사회 티켓도 그중 하나인 듯 했다. 주완은 주승이 오늘 안에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곤 주인 없는 티켓을 챙겼다. 설마 여기서 도희가 아닌 순자를 먼저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주완은 시사회가 끝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희를 직접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도희 더는 괴롭히지 마세요.”
주완은 막무가내로 도희와 자신을 엮으려는 순자에게 경고차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순자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어머나! 내 그럴 줄 알았어! 차 서방, 도희랑 합칠 마음 있는 거지? 응?”
주완의 경고엔 제대로 답을 하지 않고, 순자는 손뼉까지 치며 기뻐서 펄쩍 뛰었다. 주완은 꺼림칙한 기분을 감추며 순자를 향해 설명을 이었다.
“다이어리 보고 더 확실해졌습니다. 전 도희 곁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
“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러라고 다이어리를 차 서방한테 보낸 줄 알아?”
조금 전까지 살갑게 웃던 순자가 살벌하게 되물었다. 순자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주완이 짙은 한숨을 뱉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멀리서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습니다. 어머니가 도희 앞길 방해하시면 그것도 막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주완의 경고에 순자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 지금 나 또 협박하는 거야?”
믿고 있던 기대감이 좌절로 바뀌는 순간, 순자는 눈빛이 표독스럽게 돌변했다. 하지만 순자는 어딘가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이전처럼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주완은 그런 순자를 물끄러미 지켜봤다. 순자는 잠시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차 서방 마음을 알았는데 가만히 있겠어?”
“네?”
주완은 잘못 들었다는 듯 순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잘 막아 봐 그럼. 멀리서 지켜 주는 것보단 도희 옆에서 막아 주는 게 더 나을 듯한데 말이야.”
주완은 어처구니없는 순자의 협박에 기가 찼다. 제 딸을 두고, 지금 줄다리기를 하자는 건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완은 저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그건 자네가 잘 지켜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 호호.”
“그게 무슨……!”
“우리 도희 잘 부탁해.”
무미건조했던 주완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만으로 만족스러웠는지 순자는 악랄한 미소를 띠며 멀어졌다. 주완을 등진 순자는 그대로 횡단보도 앞쪽에 서 있는 택시에 타곤 홀연히 사라졌다. 주완은 그 모습을 황망한 얼굴로 지켜볼 뿐이었다.
한편 조형물 뒤에 몸을 숨기고 서 있던 효주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저녁,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시사회 티켓을 가져가길래 혹시나 싶어 따라와 봤는데, 설마 진짜로 이곳에 주완이 있을 줄 몰랐다. 게다가 전 부인의 장모에게 전 부인을 건들지 말라는 달콤한 협박까지 하다니. 이미 도희와는 다 끝난 줄 알았던 효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3년 동안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부현 곁에 있던 효주였다. 다이어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 내용을 대충만 들어도 순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려는 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이대로 순자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원래 사랑은 장애물이 있을수록 더 깊어지는 법이랬다. 주완과 도희 사이에 순자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또 놓치면 안 되는데.’
효주가 불안한 듯 팔짱을 낀 채 검지를 제 팔뚝 위에서 틱틱거렸다. 둘을 떼어 놓을 방법은 좀처럼 생각나질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동아줄인 부현을 떠올렸다. 이 사실을 모두 알아야 할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효주는 그대로 뒤를 돌아 망설임 없이 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 * *
잠시 혼자 있고 싶었던 도희는 나영을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보내고 1층으로 걸어 나왔다.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인지 보안 직원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갈아입은 도희는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쓴 채 밖으로 나왔다. 잠시 바람이라도 쐐야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았다.
타임스퀘어 옆쪽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벤치가 하나 있었다. 도희는 그곳에 털썩 주저앉듯 앉았다. 여름밤의 스산한 공기가 도희의 뺨을 스쳤다.
‘나도 네년 낳은 거 후회해. 빌어먹을 년.’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짐작했던 일이라 그런지 의외로 태연한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주눅 들지 않겠다고 다짐한 오늘 모든 걸 수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하루가 될 게 뻔했다.
“괜찮아.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뭐.”
그동안 도희는 슬퍼하는 자신이 싫었다. 절망의 늪에서 누구도 자신을 구출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느낌이 끔찍했다. 도희를 구해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걸 깨달은 오늘, 겨우 세운 마음을 다시 쓰러트릴 순 없었다.
“여기 있었네.”
그때, 중저음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도희는 커다란 그림자에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곧 가로등 불빛 아래 드러난 주완의 얼굴이 보였다. 도희는 주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벤치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여길……?”
경계가 또렷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자, 주완은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섰다. 두 사람은 거리를 유치한 채 대치하듯 서로를 어둠 속에서 바라봤다.
“한참 찾았어.”
이제 보니 주완은 숨을 작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역시 시사회는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왔다는 뜻인가? 도희는 문득 주완이 순자를 여기에 끌어들였다는 말을 떠올렸다. 도희는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내리고 주완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을 본 주완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좀 낫다.”
주완의 중얼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은 도희는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채 주완을 향해 공격적으로 물었다.
“여긴 왜 왔는데요?”
“사과하고 싶어서.”
“뭘요?”
주완은 긴 다리로 엉거주춤 서선 우물쭈물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망설임을 기다려 줄 마음이 없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요.”
도희는 주완과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듯 그를 말 없이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주완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도희의 손목이 맥없이 붙들렸다.
“어머니가 전화했다고 들었어. 난 그걸 오늘 알았고.”
주완의 말에 부현과의 통화를 떠올린 도희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요?”
“미안해.”
“제발……! 나한테 신경 좀 꺼 줄래요?”
흔들리는 건 아니다. 흔들리는 게 아닌데, 그가 나타난 이후로 자꾸 그와 처음 만났던 일들이 떠오른다. 운명이라고 믿었던 첫 만남, 무뚝뚝함 속에 깃들어 있던 따스함, 그로 인해 행복했던 나날들. 그래서 주완이 눈앞에 나타날 때마다 동요하는 저 자신이 싫어서 그가 혐오스러웠다.
이제야 딛고 일어서려는데……, 당신이 뭔데!
“동정심이에요? 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잘난 동정심으로 계약 제안했잖아요.”
“도희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아까 시사회 때 들었죠? 난 이제 인정했다고. 당신은 처음부터 날 동정했고, 난 그저 호기심 상대일 뿐이었어요. 그래서 우린 딱 거기까지였던 거예요.”
“…….”
“당신 만난 거 미치도록 후회해요.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당신과 어떤 거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요. 설사 어머님이 나한테 전화를 했어도 당신은 내 앞에 영영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울분이 남았는지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묵혀 뒀던 지독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도희가 흥분할 때면 무슨 말이라도 했던 사람인데, 그 말을 죄인처럼 가만히 듣고 있는 주완을 보고 있자니 잠잠했던 마음이 또다시 엉망으로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든 아무것도 사과하지 마세요. 당신이 백 번, 천 번 사과해도 난 용서할 마음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죄책감 덜기 위해 나 이용하지 말라구요!”
“……알았어.”
쇳소리가 섞인 힘없는 목소리로 주완이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순순한 그의 태도에 도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말을 되물었다.
“알았다고. 이제 다신 네 앞에 안 나타나.”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축축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갈라놓고, 주완은 침묵 속에서 도희를 꽉 잡고 있던 손목을 맥없이 놓았다.
“지금까지 상대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놀리는 거라기엔 주완의 눈빛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말투엔 빈정거림도 묻어나질 않았다. 도희는 주완의 씁쓸한 갈망을 어렴풋이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응원할게. 어디서든.”
그 말을 끝으로, 주완은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