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25화 (25/71)

25화 도희의 약점

도희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주완이 시사회에 찾아온 것도 의아한데, 그가 엄마에게 티켓을 보냈다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확실해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겐 관심조차 쏟지 않던 그였다. 그런 그가 하필 내 시사회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엄마를 초대하기까지 했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도희는 순자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진짜라니까. 안 그랬으면 내가 어떻게 알고 여길 왔겠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긴데. 현재 주완의 이상 행동만으로 충분히 혼란스러운 도희는 순자의 근거 없는 말에 흔들렸다.

“그나저나…… 차 서방이 다른 말은 안 하디? 연락도 없었고?”

순자는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도희를 바라봤다.

“무슨 얘기. 난 그 사람이랑 만난 적도 없어요.”

도희는 문득 얼마 전에 주완이 했던 술주정을 떠올렸지만, 순자의 쓸데없는 기대를 없애기 위해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순자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차 서방을 만났어야 했는데…… 쯧. 참, 너! 그 은가락진가 뭔가 하는 놈 얘기 좀 안 할 수 없어?!”

주완 얘길 꺼낼 땐 잠잠하다가 순간 울화라도 치민 듯 별안간 순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도희는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들썩였다. 도희는 순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차 서방과의 재결합을 원하는 순자 입장에선 지섭이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닐 테니까.

“엄마야말로 차 서방에 대한 기대 접어요. 나 절대 그 사람이랑 다시 안 합쳐.”

“세상에 절대가 어딨어, 절대가!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줄 알아?”

까랑까랑 울리는 순자의 찢어지는 목소리에 도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자 순자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마를 짚고 있던 도희의 손을 퍽 쳐 냈다.

“아!”

“정신 차려! 네 주제에 차 서방이 가당키나 해?! 다시 받아 주겠다고 하면 넙죽 절이라도 해야 될 망정!”

“엄마!”

도희는 억울하다는 듯 자신을 때린 엄마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순자는 신경질적으로 그 손을 쳐 냈다.

“어디서 기생오라비 같은 거랑 연애하기만 해 봐! 알았어?!”

도희는 내쳐진 자신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사회에 나타났을 때부터 순자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희는 내심 기대했다. 그래도 공백기를 이겨 내고 ‘칸의 여인’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된 작품인데. 영화를 보고 작은 감상이라도 주지 않을까. 그래도 엄만데, 딸이 연기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것도 처음일 텐데 칭찬 한마디를 해 주진 않을까. 잘했다, 괜찮다, 세 글자만이라도.

“할 말이…… 그게 다예요?”

“그럼 내가 너한테 할 말이 뭐가 있어?”

순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 옷을 툭툭 털어 내며 말했다.

“‘하루살이’ 영화 봤잖아요.”

“아 그거? 못 봤다. 도통 잠이 와서 말이야. 당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던데 넌 그걸 영화라고 찍었냐?”

기대하면 실망한다는 걸 알면서도 왜 자꾸 가족이란 이름 아래 기대하게 되는 걸까. 도희는 순자와 자신이 천륜이란 거대한 인연으로 엮여 있음을 부정하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연기하는지 궁금해 본 적…… 있긴 해요?”

“여태까지 먹여 주고 키워 줬으면 됐지! 내가 그런 것까지 궁금해해야 돼? 하여튼 너랑 말 만 섞으면 혈압이 올라, 혈압이! 이딴 영화가 뭐가 좋다고 재벌도 마다하는지, 원! 애초에 시집가서 그 어미 장단이나 잘 맞춰 줬으면 좀 좋아? 내가 네년 때문에 속이 다 터져!”

혀를 끌끌 차며 대기실을 나가려는 순자의 뒷모습을 보며 도희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순자는 늘 도희가 벼랑 끝에서 헤어 나오려고 할 때마다 그녀를 더욱 사지로 몰았다. 그런 순자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나날이었다. 도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도희가 연기를 시작할 때도,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그리고 결혼 생활까지. 순자는 늘 도희의 약점이었다. 경제적인 능력이 생기고 도희는 순자와의 천륜을 끊어 내고 싶을 때마다 도희는 차마 잊히지 않는 한 가지, 순자의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

여섯 살 무렵, 도희는 북적거리는 골목 시장에서 길을 잃었다. 도희의 손을 잡고 있던 순자는 어느새 물건을 보다가 정신이 팔려 도희 손을 놓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 틈으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도희는 길 한가운데 멀뚱히 서서 자신보다 한참 더 큰 어른들의 어지러운 두 다리만 지켜봤다. 그 안에 순자의 다리는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도희는 그대로 순자에게 버려졌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순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어린 도희는 자신이 버려졌음을 확신했다.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어린아이가 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순자였기에, 도희는 본능적으로 울음을 참았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울지 않고 의젓하게 순자를 기다렸다. 매일 같이 순자의 눈치를 살피던 어린 도희는 눈치가 빠른 건 물론이고 또래보다 훨씬 성숙했다. 어린아이의 생떼나 투정은 어린 도희에게서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순자는 가끔이나마 도희의 이런 점을 칭찬하곤 했었다.

‘넌 참 불평불만이 없다. 애 같지 않게.’

도희는 순자의 그 말을 칭찬으로 여겼다. 그리고 도희는 더욱 그렇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도희는 자신이 버려졌을지도 모르는 이 순간까지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고사리 같은 손을 꼬옥 말아 쥐곤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고 또 삼켜 냈다.

그렇게 얼마나 낯선 시장 바닥에 서 있었을까.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후줄근한 잠바를 입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도희에게 다가왔다.

“꼬마야. 엄마 잃어버렸니?”

남자는 잘 먹지도 못한 사람처럼 야윈 모습이었다. 어린 도희는 다 죽어 가는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진 남자에게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안 잃어버렸어요. 엄마가 곧 온다고 여기 있으랬어요.”

도희는 최대한 또렷하고 또박또박한 투로 총명하게 얘기했다. 위협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지어낸 거짓말이었음에도 목소리엔 전혀 떨림이 없었다. 그러자 남자는 도희를 떠보듯 말했다.

“아저씨가 엄마 찾아 줄게. 아저씨랑 가자.”

“다른 데 가면 엄마가 못 찾을 거예요. 여기 있을래요.”

“너도 나 무시하냐?”

지지 않고 대꾸하는 도희의 말에 별안간 남자가 와락 인상을 구기며 어린 도희의 가녀린 손목을 잡아끌었다. 도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상체를 뒤로 젖히며 안간힘을 써 봤지만 어린아이의 힘으로 성인 남자의 힘을 버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도희가 낯선 남자에게 질질 끌려가던 찰나였다.

“이 새끼야!”

퍼억! 뒤에서 순자의 우악스러운 고성과 함께 신발 한 짝이 날아왔다. 힘 있게 날아온 신발은 정확히 남자의 뒤통수에 꽂혔다. 남자는 악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고, 그 덕에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남자와 도희를 중심으로 원을 형성했다.

“너 뭐야?!”

남자는 당장이라도 순자를 때릴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거기서 결코 물러날 순자가 아니었다. 순자는 남자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삿대질까지 하며 외쳤다.

“납치범 잡아라! 납치범이 우리 딸 데려가네! 아이구, 사람 살려! 로아야! 로아야!”

‘납치범’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들은 주변의 상인들은 무슨 일이냐며 발 벗고 나서 남자를 둘러쌌다. 아줌마고 아저씨고 아이를 위한 사람들의 인심이 한데 모아졌다. 사람들이 점점 골목에 가득 차자, 남자는 황급히 도희 손을 놓고 사람들을 헤집으며 달아나려고 했다. 그 때, 우락부락한 상인 하나가 비실비실한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상인은 경찰서에 넘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이를 데려가라고 신신당부했다.

상황이 종료되고도 어린 도희는 쉽게 순자에게 가지 못하고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아가, 엄마한테 가야지.”

주변 상인들이 안쓰러운 마음에 어린 도희에게 얼른 엄마에게 가 보라고 말했지만, 도희는 쉽사리 걸음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간다고 한들 순자가 반기지 않을 것 같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순자가 얼어붙은 도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안 오고 뭐 하고 있어?”

“히끅…… 히끅…… 엄마아아아!”

도희는 그제야 어린아이다운 울음을 터트렸다. 잔뜩 겁을 먹은 뒤라 그런지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상인들이 딱하다며 혀를 차고,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사탕을 우는 도희에게 몇 개 쥐여 주기도 했다. 그래도 도희는 쉽게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순자는 그런 도희를 가만히 서서 내려다볼 뿐이었다. 도희는 순자에게 예쁨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울음을 삼켜 보려고 했으나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멎질 않았다. 점차 사람들이 흩어지고 다시 북새통 속에 순자의 모습이 가려지려던 차였다. 순자는 도희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그녀를 힘껏 들어 올렸다. 순자는 도희를 꼭 안은 채 시장을 빠져나갔다. 도희는 순자의 투박한 품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난 너 안 버려.”

도희를 안은 채 한참을 걷던 순자는 꼭 어린 도희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내가 버림받아 봐서 그 더러운 기분 잘 알거든. 그래서 난 너 안 버려.”

..어린 도희에게 그 일은 큰 위안이 되었다. 하나뿐인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라는 생각을 슬쩍 지울 수도 있었다. 순자가 비록 평소엔 성숙한 어머니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도박과 남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비록 도희가 우선순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모성애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도희의 인지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믿음은 흔들렸다. 순자는 갈수록 도희에게 많은 걸 바랐고, 순자의 욕심은 도희의 발목을 잡았다.

“차라리…… 엄마가 없는 게 낫겠어.”

“뭐, 이년아?”

대기실 문을 열었던 순자가 나가다 말고 뒤를 홱 돌아봤다. 도희는 눈을 부릅뜬 순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없는 게 낫겠다고!”

순자가 도희를 버리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잘 챙겨 준 것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도희의 상품 가치가 높아질수록 그녀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도희는 끝까지 믿으려고 했다. 그래도 엄마니까, 날 버리지 않았으니까.

“하! 참 나.”

순자는 도희의 악독한 말에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연달아 터트렸다. 도희는 죽을힘을 다해 뱉어낸 말인데, 순자는 그런 도희의 말에 조금도 타격을 입지 않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네년 낳은 거 후회해. 빌어먹을 년.”

도희의 마지막 남은 믿음마저 바스러졌다.

쿵! 순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도희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대기실을 나갔다.

복도를 나서며 순자는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도박판에서 온갖 욕설이란 욕설은 다 듣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도희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을 만큼 화가 나기도 했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꼴도 보기 싫기도 했다. 잠시 도희에게 잘못하는 건가 의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순자는 도희에게 하는 행동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당화했다.

‘망할 년. 다 지 잘되라고 하는 거지 내가 괜한 말 하는 줄 알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자는 연신 혀를 차며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기껏 화려하게 치장까지 하고 왔건만 도희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을 흘기질 않나, 주완은 코빼기도 안 보이질 않나.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임스퀘어 정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순자의 보폭이 점차 빨라졌다. 그때, 순자의 시야에 반가운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차 서방!”

횡단보도 쪽에 서 있던 주완이 찬찬히 뒤를 돌았다. 그리곤 뛰다시피 달려오는 순자를 냉랭하게 응시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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