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24화 (24/71)

24화 아직도 아파요

단 한 번도 도희의 행사에 관심 갖지 않던 순자였다. 순자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돈 또는 도박이었다. 그랬던 순자가 여기에 와 있다는 건, 분명 주완을 노리고서다.

하지만 주완이 이 시사회에 올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몰랐던 사실을? 도희는 마치 자신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한 주완의 태도도, 뭐가 그리 기쁜지 헤죽거리는 순자의 표정도 모두 신경이 쓰였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백도희 씨는요?”

때마침 사회자가 도희의 이름을 부르는 덕에 겨우 주완에게서 눈을 뗐다. 사회자는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착실한 얼굴로 도희를 응시했다. 무슨 질문이었지? 당황한 도희가 말을 잇지 못한 채 괜스레 자세를 고쳐잡을 때였다.

“마지막 시사회 소감.”

라일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화들짝 놀라 그녀의 얼굴을 보니, 라일은 복화술로 힌트를 준 건지 관객을 향해 미소를 유지한 채였다. 도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루살이’ 가 어느새 600만 관객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끝까지 관심 가져 주셔서 너무 감사 드리구요. 여러분 질문에 성심껏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유연하게 답변을 마쳤다고 생각한 도희가 마이크를 넘기려고 할 때였다. 사회자의 표정이 묘하게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제야 도희는 옆에 있는 라일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는 고소하다는 듯 입가에 조소를 띠고 있었다.

‘쟤 말을 믿은 내 잘못이지.’

도희는 다시 침착하게 사회자를 향해 마이크를 대고 말했다.

“죄송해요, 마지막 시사회라 그런지 너무 긴장해서 질문을 잘못 들었나 봐요. 뭐라고 하셨죠?”

“네, 이해합니다. 저는 칭찬이 너무 민망해서 말 돌리신 줄 알았어요. 까다롭기로 유명한 장천희 감독님께서 항상 백도희 씨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NG도 거의 내지 않는 데다가 캐릭터 파악이 빨라서 대사 하나에 열 가지가 넘는 감정을 담으신다구요? 따로 비결이 있나요?”

사회자는 능숙하게 도희의 솔직한 변명에 말을 덧붙이며 새롭게 질문했다.

“비결이라고 하긴 민망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내 캐릭터에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대본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면서 상황과 인물에 몰입하는 거죠.”

“칸에 진출하신 소감도 안 여쭤볼 수가 없죠.”

“너무 감사하고, 또 영광이구요. 더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 같아요. ‘칸의 여인’이란 칭호는 무척 감사하지만 그만큼 무게가 있는 수식어잖아요.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되고 또 그 한계를 깨야 하니까요. 부담도 되지만, 그만큼 더 열심히 연기에 매진하려고 합니다.”

사회자의 형식적인 질문이 끝난 뒤엔 관객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다가왔다. 관객들은 배우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질문을 하는 내내 황홀한 얼굴이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도희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이는 있었다. 앞머리를 내리고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한 여학생은 핸드폰 배경 화면에 지섭의 얼굴을 띄워 놓고, 시기 어린 눈초리로 도희를 멀리서 노려보고 있었다. 도희는 주완과 순자에게 신경이 쏠려 있어, 적개심이 담긴 눈빛을 차마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희는 관객석을 바라볼 때마다 저를 아이 보듯 부드러운 눈동자로 바라보는 주완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주완은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자꾸 도희의 시선을 끌었다. 가끔 말을 하다 보면 주변에 앉아 있는 관객들이 도희가 아닌 주완을 힐끔힐끔 훔쳐보기도 했다. 그는 물론 순자도 마찬가지였다. 시사회 내내 도희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헤맸다.

“두 분 다 드라마 복귀하신다고 들었는데, 드라마랑 영화 중 어떤 작업이 더 잘 맞으시나요?”

한 관객이 물었다. 라일은 영화와 드라마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는 형식적인 답변을 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관객이 번쩍 손을 들었다. 반짝이는 눈망울로 손을 든 건 순박해 보이는 한 여학생이었다. 사회자는 호의적으로 교복 입은 여학생의 질문을 받았다.

“백도희 씨 이혼한 아픔의 상처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들떠 있던 관객석 공기 역시 싸늘하게 식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은 건 도희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도희의 얼굴을 본 학생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학생은 대단한 복수라도 열사처럼 사명감에 넘치는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학생은 지섭의 얼굴을 감싸 쥐듯 자신의 핸드폰을 한 손에 꼭 쥐었다.

여학생은 계획된 순진한 얼굴을 하고 대답을 기다리듯 도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린 학생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도희에게 꽂혔다. 도희는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제 앞에 앉아 있는 주완과 눈을 맞췄다. 도희는 그대로 물속에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해졌다.

“어…… 그 질문은 시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질문 같은데요.”

사회자는 당황하며 여학생에게서 마이크를 빼앗으란 눈짓을 보냈다. 직원이 여학생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잡았다.

“제가 힘들 때 참고하려고 해요! 언니, 부탁드려요! 말씀해 주세요!”

여고생이 이혼의 아픔은 알아서 뭐 하려고. 도희는 필사적으로 대답을 듣고자 하는 어린 학생을 쳐다봤다. 사회자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도희 눈치를 연신 살폈다. 한숨을 쉬며 어떤 현명한 대답으로 직설적인 대답을 피해갈까 고민하던 와중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주완의 얼굴에 시선이 멎었다. 도희는 어딘가에 홀린 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손에 쥐고 있던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댔다.

“아직도 아파요. 시간이 지난다고 이미 남은 흉터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별안간 주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관객석은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보다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근데 무뎌지긴 하더라구요. 시간이 지날수록 차차 인정하고 받아들여졌어요. 아, 사랑이 식었구나. 우리 사랑이 특별하지 않았구나.”

덤덤하게 읊조리는 도희의 착잡한 목소리에 주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들 사랑할 땐 그러잖아요. 내 사랑이 영원할 것 같고, 다신 변하지 않을 것 같고. 그렇죠?”

도희는 동의를 구하듯 관객들을 두루 바라봤다.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그 어떤 것보다 무거웠을 도희의 아픈 시간에 관객들은 애도를 보내듯 숙연했다.

“전 제 사랑이 평생 한결같을 줄 알았거든요.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나니까 조금 편해졌어요.”

도희가 다시 주완을 또렷이 바라봤다. 언젠가 그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토록 특별할 줄 알았던 우리도 여느 연인처럼 끝났지만, 누구나 그렇듯 이별의 아픔을 이겨 냈다고. 힘들었지만, 당신 없이 이제 잘살 수 있다고.

“대답이 됐나요?”

하고 싶은 말을 해서일까. 도희는 불현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주완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진 않아도 흔들리는 모습은 보일 줄 알았는데.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던 주완은 어느덧 평정심을 유지한 표정이었다.

도희의 태연한 답변에 돌연 불쾌해진 여학생의 순진했던 표정이 공격적으로 변했다. 도희가 곤란해하지 않을뿐더러 이전의 상처가 아물었다는 식의 답변은 학생에게 또 다른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은 아직 넘겨주지 않은 마이크를 꼭 손에 쥔 채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럼 새로운 사랑도 하실 수 있나요? 백도희 씨는 은지섭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백도희 씨도 은지섭 씨가 이상형인가요?”

여학생이 또 다른 곤란한 질문을 하자, 직원이 마이크를 빼앗았다. 그러자 여학생은 발을 동동 구르고, “한 번만요!”라고 소리치며 마이크를 달라고 재차 생떼를 부렸다. 도희는 마지막 행사니만큼 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형이라고 묻는데 그 질문을 굳이 피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판단했다.

“은지섭 씨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촬영 내내 참 다정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도희는 특유의 눈웃음으로 답변을 마무리했다. 어린 여학생은 그녀의 애매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분한 듯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도희는 그런 학생의 자세한 표정까진 살피지 못했다.

도희는 뜨거운 시선을 보내는 주완을 흘긋 살폈다. 주완은 눈에서 레이저라도 뿜을 기세로 도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묵묵했던 주완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드라마 촬영 중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나요?”

드디어 사회자가 예정된 질문을 했을 때, 도희는 어쩐지 그런 표정을 짓는 주완을 더 자극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하고 있어요. 특히 상대역 지섭 씨가 많이 챙겨 주시는 것 같아요.”

또다시 언급된 ‘지섭’의 이름에 주완의 눈썹이 팽팽히 모아졌다.

“한 번은 촬영 때 작은 사고가 나서 지섭 씨랑 저랑 부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요. 저보다 크게 다치셨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부터 챙기시는 모습 보면서 감동했어요. 왜 요즘 대세가 은지섭 씨인지 알겠더라구요.”

“어……? 지금 그 말 열애설 재기될 수 있겠는데요? 괜찮으신가요?”

사회자는 도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일부러 ‘열애설’ 사건을 꺼냈다. 그러자 도희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날 저희 대본 리딩 포함해서 세 번째 만났나, 그랬어요. 첫 촬영이었거든요. 얼마나 착하신 분인 줄 알겠죠?”

“어머, 정말요?”

사회자는 지섭의 됨됨이에 크게 놀라는 리액션을 보여 주었고, ‘세 번째 만남’이란 말에 관객석 역시 술렁였다. 지섭의 이야기에 가라앉았던 시사회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지만, 그 얘기를 반기지 않는 유일한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희는 그 뒤로 주완과 순자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 * *

늦은 시각, 시사회가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온 세 사람은 다음에 시간 내서 술 한잔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모두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천희 감독은 별다른 말 없이 두 배우보다 먼저 나갔고, 라일은 도희가 오늘 겪은 수모를 가엾게 여겼는지 웬일로 시비를 걸지 않고 대기실을 나섰다.

텅 빈 대기실에 앉아, 도희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폭풍 같은 시사회를 잘 마친 사람치고 의연한 모습이었다. 도희는 처음으로 그런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도희는 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영에게 활기차게 물었다.

“나 잘했어?”

“어?”

“오늘 대답. 잘했냐구.”

“그러엄, 훌륭했지. 너무 훌륭해서 오금이 다 저렸다!”

나영이 허둥지둥 답하자, 도희는 피식 잇새로 웃음을 흘렸다.

“괜찮은 거야?”

나영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도희를 걱정했다. 엄마인 순자보다도 도희는 그런 나영이 더 가족같이 느껴졌다. 힘든 시기를 모두 지켜본 나영은 항상 자신의 상처를 함께 끌어안고 있는 듯했다. 도희는 그런 나영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도희는 자신이 빠져나왔듯 나영을 그런 불안감 속에서 꺼내고 싶었다. 잠시 진중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도희가 입을 뗐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맨날 괜찮냐고 묻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거.”

“도희야…….”

“아직 덜 괜찮아. 언제 다 괜찮아질지 모르겠어. 근데 언제까지 상처 때문에 웅크리고 있을 순 없잖아.”

나영이 감격스러운 듯 눈물을 글썽였다. 나영은 도희에게 터벅터벅 다가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왜 이래, 징그럽게.”

도희는 오글거리는 건 질색이라는 듯 자신을 끌어안은 나영의 손을 장난스레 찰싹 때렸다.

“이럴 줄 알았어! 우리 도희 잘 해낼 줄 알았어! 너 병원에서 죽고 싶다고 했을 때 난 정말…….”

“그만. 나 아직 덜 괜찮다고 했다. 그 얘긴 하지 말자.”

만감이 교차하는 나영이 3년 전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도희가 황급히 협박하듯 말을 잘랐다. 그러자 나영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도희의 어깨를 쓸고 또 쓸었다.

“그래, 그래. 우리 도희 장하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대기실 안까지 날아들었다. 도희와 나영이 동시에 문 쪽을 바라봤다. 문 바로 앞에선 소동이 일어난 것처럼 시끄러웠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길 막는 거야! 나 백도희 엄마라니까?”

감동적인 분위기를 깬 건 순자였다.

어쩐지, 그냥 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순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진 몰라도 도희는 주완이 아닌 순자가 온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영은 더 큰 소란이 일기 전에 얼른 가서 문을 열었다.

“어, 그래! 너 매니저!”

순자는 양복 입은 두 사내들에게 가로막혀 있던 채로 나영을 발견하곤 손가락질했다. 나영은 마지못해 직원들에게 물러나라는 눈짓을 했고, 순자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사내들을 지나치며 핸드백으로 그들의 가슴팍을 툭툭 쳤다.

“그러게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며 대기실을 들어오는 순자의 걸음걸이가 유난스러웠다. 또각또각. 순자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도희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순자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화장만 진한 게 아니었다. 반짝이가 들어간 검정 시스루 블라우스에 하얀 정장 치마는 순자가 그간 입던 스타일의 옷이 아니었다. 게다가 순자의 목에는 기다란 진주 목걸이가 겹겹이 걸려 있었고, 붕 띄운 머리 사이론 샹들리에 같은 화려한 귀걸이까지 보였다. 도희는 나영이 또 걱정하는 게 싫어, 나영더러 나가 있어도 좋다고 했다.

“괜찮겠…… 아. 그래.”

괜찮겠냐고 물으려던 나영은 조금 전 대화를 떠올리며 말을 삼켰다. 도희는 나영이 안심할 수 있도록 온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하는 수 없이 대기실 문을 닫았다.

달칵.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도희의 표정이 냉랭하게 변했다. 도희는 순자를 향해 앉아 있던 의자를 돌리고 표독스럽게 물었다.

“그 차림은 뭐예요?”

“어때, 좀 고급스럽냐? 우리 차 서방 만날 거라 내가 신경 좀 썼지.”

“대체…… 주완 씨가 여기 올 건 어떻게 알구요.”

“차 서방이 아무 말도 안 해?”

순자의 얼굴에 야비한 조소가 떠올랐다.

“차 서방이 보냈잖아, 네 시사회 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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