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신경전
“백도희 씨, 힘들면 시간 줘요? 쉬었다 할래요?”
이게 지금 무슨 경우인가. 지금까지 NG를 낸 건 누가 봐도 류라일이었다. 명색이 감독이란 사람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도희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질려가는 라일의 창백한 낯빛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라일 역시 김 감독의 엉뚱하게 날아온 화살에 찔린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십 분간 쉬었다가 하…….”
“아니요!”
김 감독의 지시를 도희가 잘랐다. 무명 시절부터 촬영할 때의 신경전이라면 수도 없이 겪어 온 도희였다. 앞으로 남은 촬영이 많은 이 시점에 도희가 물러난다면, 앞으로 이런 일을 계속 겪어야 할지도 몰랐다. 도희는 일부러 김 감독 대신 라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계속하겠습니다.”
라일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NG!”
“다시 하겠습니다.”
“NG!!”
“죄송합니다.”
촬영장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누구 하나도 양보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고작 한 신을 벌써 두 시간 째 찍고 있는 스태프들의 피곤함은 하나둘 도희에 대한 원망으로 터져 나왔다.
“그냥 적당히 져 주지. 김 감독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닌데.”
“드라마 오랜만에 찍어서 감 잃은 거 아니야?”
쉬는 시간, 소곤거리는 건지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도희는 스태프들의 말소리를 듣고도 눈을 부릅뜨고 악에 받쳐 다 해진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나영은 그런 도희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미치겠다, 김 감독 왜 저런다니.”
도희가 대본을 읽고 있는 사이, 나영은 구석진 곳에서 쉬고 있는 라일을 쏘아봤다. 라일은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푹 수그린 채였다. 그때, 촬영 내내 구겨진 인상으로 도희를 나무라던 김 감독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곤 라일에게 다가갔다.
“라일 씨 힘들진 않아? 할 만해?”
“네? 아, 네.”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는 김 감독의 너스레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 대본을 보고 있던 도희도 마찬가지였다. 도희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쟨 또 무슨 말로 김 감독 구워삶은 거야?”
도희의 어깨를 토닥이던 나영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때였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물통 하나를 들고 온 지섭이 도희 앞에 서서 물었다. 의도한 건지 모르겠지만, 천진스러운 지섭의 걱정은 촬영장을 까랑까랑하게 울렸다.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네요?”
그 모습을 목격한 김 감독이 불쾌한 기색을 그대로 내비치며 떠보듯 물었다. 지섭은 감독의 뼈 있는 질문의 의도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럼요. 저희 드라마 투자 많이 받은 것도 도희 선배님 덕분이잖아요.”
“아, 네. 뭐.”
김 감독은 이럴 때 도희의 공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리딩 날부터 지섭 앞에선 꼼짝 못 하는 김 감독이니 순순한 대답이 당연했다. 김 감독은 도희는 건드려도 지섭만큼은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차기작 때문이겠지. 자신의 위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 도희가 아랫입술을 말아 문 그때, 지섭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독님, 근데 저 야외 촬영 언제까지 해요? 피부 탈 것 같은데.”
“네?”
“자꾸 라일 선배님 대사에서 컷 하시는데, 저 그냥 도희 선배님 대사 칠 때 지나가면 안 돼요? 제가 하얀 피부라 좀 잘 타거든요.”
싱글벙글 무해한 미소를 보이는 지섭의 말에 김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눈치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섭의 말의 의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컷 하는 순간이 라일이라는 건, 결국 라일이 NG를 내고 있다는 뜻이고, 김 감독이 애먼 사람을 잡고 있다는 걸 은근슬쩍 지적한 거나 다름없었다. 지섭의 말에 김 감독의 몸에 열이 오르는 듯 그의 목이 새빨개졌다.
“대본대로 해요, 대본대로!”
“이상하네요. 대본대로 안 하는 사람은 딱 한 명인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도희와 나영은 물론이고, 이를 대충 눈치채고 있던 스태프들의 눈도 덩달아 휘둥그레졌다. 지섭은 김 감독에게 선전포고한 것과 다름없었다. 순식간에 촬영장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은지섭 씨.”
언짢은 김 감독은 지섭에게 할 말을 열심히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지섭의 영향력도 중요했지만, 촬영장에서 감독의 위엄도 배우의 인지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마침내 결심한 김 감독이 지섭에게 쓴 충고를 하려던 차였다.
“아,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 눈엔 그래 보여서요! 저보단 아무래도 감독님이 훨씬 더 잘 보시겠죠.”
경계심을 살짝 드러내고 있던 지섭의 표정이 단번에 말랑말랑하게 풀어졌다. 지섭은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김 감독을 달랬다. 꼬리를 내린 지섭에게 김 감독은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심 쓴소리 없이 마무리된 상황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김 감독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촬영을 재개하자며 애매한 분위기를 뒤집었다.
다시 촬영을 시작한 지 십여 분, 마침내 신이 넘어갔다.
* * *
촬영 스케줄을 모두 마친 도희는 영화 ‘하루살이’ 마지막 시사회를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덕분인지, 도희의 유명세 덕분인지 ‘하루살이’ 의 관객 수는 한 달이 조금 넘은 새에 어느새 관객 수 600만을 돌파했다. 원래는 몇 주 안에 끝날 시사회였지만, 성원에 힘입은 ‘하루살이’ 는 제작사의 요청에 따라 시사회 스케줄이 몇 개 더 늘어나 드라마 촬영 스케줄과 겹쳤다.
시사회는 영등포 타임스퀘어에 있는 CGV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해서 저녁 늦은 시간 스케줄을 잡은 터라 촬영 스케줄이 딜레이 됐어도 그럭저럭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도희는 시사회에 가기 전, 숍에 들러 시사회에 어울리는 단장을 했다. 살짝 웨이브 진 머리를 말아 올리고, 진한 와인색 정장을 입은 도희는 단정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컬러풀한 색상이 그녀와 썩 잘 어울렸다.
도희는 창틀에 머리를 기대고 도로를 쌩쌩 달리는 제 옆의 차들을 바라봤다. 여간해선 촬영으로 지치지 않는데 오늘은 김 감독과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였기 때문인지 기력이 없었다.
“뭐 좀 먹을래? 옆자리에 샌드위치 있어.”
“됐어, 체할 것 같아.”
운전하는 나영이 백미러로 도희에게 샌드위치를 권했지만, 도희는 힘없이 거절했다. 그 모습에 나영이 분하다는 듯 운전대를 탁 치며 말했다.
“대체 김 감독 갑자기 왜 저래? 언제부터 류라일이랑 붙어먹은 거야? 장천희 감독도 류라일 챙기긴 했어도 저렇게 대놓고 싸고돌진 않았는데!”
평소엔 나영이 오버스럽게 씩씩대면 그를 침착하게 말리던 도희였는데, 도희는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여러모로 지친듯한 얼굴이었다. 나영은 짙은 한숨을 푹 쉬더니 착잡하게 말했다.
“그래도 은지섭 씨가 거기서 할 말 해줘서 얼마나 속 시원했는지 몰라. 은지섭이 파워가 좀 있으니까 김 감독도 찍소리 못 하는 것 봐.”
나영은 도희를 위로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겠지만, 도희가 우울한 이유엔 지섭도 포함이었다. 도희는 지섭이 나섰을 때 패배감을 느꼈다. 자신을 동경한다고 한 후배 앞에서 대놓고 무시당한 거로도 모자라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감정을 드러낸 채 대놓고 김 감독과 신경전을 벌인 자신보다 지섭은 훨씬 더 현명하게 상황을 모면했다. 도희는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감독의 위상을 꺾지 않으면서 살얼음판 같은 촬영장의 분위기를 누그러트린 지섭의 감탄스러운 술책에 더 수치심이 들었다.
‘드라마 오랜만에 찍어서 감 잃은 거 아니야?’
경력으론 훨씬 더 선배인데. 공백기가 이토록 사람을 무디게 만드나. 스태프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도희는 감을 잃은 게 맞았다. 마음에 들 때까지 찍을 수 있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시간과 싸우는 고된 작업이었다. 꼭 라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감독의 꼬장은 언제든 있을 수 있고, 배우들과의 트러블도 마찬가지였다.
‘넌 운도 좋다, 얘.’
처음엔 자신의 사정을 모르는 배우들이 괜한 텃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도희가 누군가에게 뇌물을 준 것도 아니고, 인맥으로 캐스팅이 된 것도 아니었지만, 지섭의 한 마디에 그녀가 운 좋게 캐스팅된 것도 맞았다. 드라마를 쉽게 본 건 도희였다.
“걱정 마, 나 안 져.”
“어?”
“나 백도희야.”
오랜만에 뱉어 보는 말이었다.
과거에 당당했던 백도희를 되찾자. 그런 백도희를 되찾기 위해선 우선 자격을 갖추는 게 먼저였다.
“그래! 우리 도희! 앞으로 잘할 거야, 암!”
나영은 오랜만에 듣는 도희의 자신만만한 다짐에 감격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 * *
대기실엔 숍을 먼저 다녀온 라일이 준비를 마치고 앉아 있었다. 사전에 콘셉트를 논한 것도 아닌데, 마침 라일은 진한 파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도희와 대조되는 색감이었다. 라일은 생머리였던 머리에 웨이브를 넣어 자연스럽게 풀어헤쳤다. 도희는 하루 종일 촬영장에서 함께 있던 라일에게 굳이 인사하지 않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시사회까지는 고작 15분이 남은 시간이었다.
거울 앞에 나란히 앉아, 도희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도희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흘긋흘긋 눈치를 보던 라일은 뭔가 찔리는 게 있어 보였다. 도희는 라일의 태도를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김 감독을 구워삶았든, 앞으로 김 감독과의 관계는 순전히 도희 몫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연신 도희 눈치를 보던 라일이 성급한 변명을 뱉었다. 라일의 말에 도희가 눈을 떴다. 거울을 통해 시선이 부딪친 라일이 섬칫 놀랐다.
“누가 뭐라니?”
지극히 온후한 도희의 목소리에 라일의 표정이 구겨졌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대기실엔 오랜만에 보는 장천희 감독이 얼굴을 빼꼼 드러냈다.
“상영 종료까지 십 분 남았답니다. 미리 가 있죠?”
“네, 감독님!”
찜찜한 라일과 달리 새롭게 다짐한 도희는 오늘 일을 다 잊은 듯 명랑하게 대답했다. 장천희 감독은 도희와 라일을 번갈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마지막 시사회 티켓 경쟁은 치열했다고 들었다. 공식적인 암표는 금지하고 있지만, 마지막 티켓은 십만 원에 팔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일까. 영화 상영이 종료되자마자 관객석이 기대감으로 술렁였다.
“마지막까지, 수고합시다.”
장천희 감독의 말에 도희와 라일이 알겠다는 뜻으로 묵례했다. 드디어 사회자가 세 사람을 무대 위로 불렀다.
“자 그럼 나와 주시죠!”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문이 열렸다. 도희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무대로 찬찬히 걸어갔다.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불편했지만, 이제 얼마든지 안정된 걸음걸이로 걸을 수 있는 도희는 환한 미소를 유지한 채 관객석을 또렷하게 바라봤다.
몇 분간 플래시 세례가 터졌다. 초대받은 관객도 있지만, 마지막 시사회니만큼 일반인이 더 많았기에 장천희 감독과 도희, 그리고 라일은 오른쪽과 왼쪽, 그리고 정면을 향해 차례대로 손을 흔들었다. 포토 타임이 끝나고, 세 사람은 사회자가 이끄는 대로 스탠딩 의자에 착석했다.
그 순간, 도희는 하마터면 다리를 헛디딜 뻔했다. 도희는 잘못 봤나 싶어 두 눈을 마구 비볐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맨 앞자리, 그것도 정 가운데서 다리를 꼬고 고고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차주완이었다. 설상가상 바로 두 줄 뒤엔 단발머리에 뽕을 한껏 띄운 순자가 과하게 분칠한 얼굴을 하곤 조커처럼 입을 히죽히죽 찢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