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 좀 가만히 둬요
“안녕…… 하세요?”
꼬박 3년 만에 듣는 주완의 어머니, 부현의 목소리였다. 부현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상하고 꼿꼿했다. 늘 순자 일로 꼬투리 잡는 부현에게 주눅 들었던 도희는 반사 작용처럼 부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 주완과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도희가 의도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희가 잘못한 게 없었지만, 꼭 부현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 주완이 만났니?
역시. 도희는 자세를 고쳐잡고 앉아 목소리를 가다듬고 간단하게 답했다.
“우연히, 몇 번이요.”
-너는 애가 그렇게 조심성 없이……!
부현은 별안간 화를 겨우 참아 내더니 잠시간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부현이 어처구니없는 도희는 잠자코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피했어야지. 너 때문에 술도 못 마시는 애가 술까지 마시고 말이야.
부현은 아량을 베푼다는 듯 너그러운 투로 말했다. 도희는 그런 부현의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3년 만에, 그것도 전 며느리에게 전화해서 왜 제 아들을 피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거야? 게다가 부현은 그날 술주정을 도희 탓으로 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야, 아직 안 끊겼어? ……죄송해요, 잘못 걸었네요.’
그 술주정이 누구 때문인 줄 알고. 도희는 뻔뻔스러운 부현의 태도에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우리 주완이가 큰일 날 뻔했어. 네가 들쑤시는 일만 없으면 그동안 지내던 것처럼 잘…….
“제가 왜요?”
-뭐?
도희는 처음으로 부현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부현은 도희의 날카로운 되물음에 자못 당황한 듯했다.
“주완 씨가 술을 마셨다면, 그건 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자 때문이겠죠.”
-뭐? 허, 참 나! 우리 주완이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니?
부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도희는 주완을 완벽하게 믿는 부현의 되물음이 거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현에게 도희는 알리고 싶었다. 자신들이 왜 이혼까지 갔는지, 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도희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저희가 왜 이혼했다고 생각하세요?”
-너 설마, 우리 주완이가 바람피워서 이혼했다고 생각해? 그래?
떠보는 듯한 도희의 질문에도 부현의 믿음은 굳건했다. 도희는 치사하지만 일종의 복수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봤어요.”
실제로 목격했다는 도희의 말에 부현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부현은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하더니 곧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뭘 본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널 제대로 봤지. 애초에 그 정도 그릇인 너한테 내가 무슨 소릴 한다니.
“제가 봤다니까요!”
-이래서 내가 너희 둘을 반대한 거야. 끊는다. 앞으론 주완이 봐도 모르는 척 지나가렴. 피차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구나.
허무하게 전화가 끊기고, 도희의 눈동자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부현은 마치 도희의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그녀의 가치를 낮췄다. 억울했다. 결혼 생활 중 그만한 믿음을 저버린 것도 주완이었고, 이혼 후 뻔뻔스럽게 먼저 아는 척을 한 것도 주완이었다. 회사에서도, 촬영장에서도, 병원에서도. 그와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고 싶은 도희를 주완이 가만두지 않았다. 그의 번호도 몰랐던 도희에게 먼저 전화를 건 것도 주완이었는데, 왜 도희가 부현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나타나고부터 모든 게 엉망이었다. 도희는 주완을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주완에게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지워 버리고 싶은 그가 자꾸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려는 탓에 힘든데. 대체 두 모자가 왜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제발, 나 좀 가만히 둬요…… 흑.”
도희는 무릎을 꿇은 채로 등을 구부리며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어둠 속에 고통으로 일그러진 제 얼굴을 숨기며, 도희는 숨을 죽이고 한참을 흐느꼈다.
* * *
사흘 뒤, 촬영장에 나간 도희는 내내 넋을 놓은 채였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대본을 보고 있는 도희를 보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묻는 스텝들이 많았는데, 도희는 그때마다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나영이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나영은 멀찍이 떨어져 도희를 바라봤고, 도희는 그런 나영의 뜨거운 눈빛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스위트 셰어 하우스’ 새로운 입주자 라일과 만나는 장면을 위해 카페로 온 라일과 도희는 카메라 앵글이 잡히지 않는 자리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분량을 완벽히 외워 왔지만, 어쩐지 집중이 자꾸 흐트러지는 탓에 도희가 대본을 억지로 훑고 있을 때였다.
“사색은 집에 가서 하시는 게 어때요, 선배님?”
옆에 있던 라일이 시비를 걸듯 속삭였다. 이전 같았으면 발끈 화를 냈겠지만, 부현의 전화를 받은 이후 넋이 나간 건 사실이었다. 도희는 라일의 지적이 찔리기만 했다.
“나영아, 우리 촬영 언제 시작한대?”
라일의 충고를 간단하게 무시한 덕에 라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한 30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도희는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옆에서 씩씩거리는 라일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카페를 나가자, 그곳에는 추리닝 차림의 지섭이 서 있었다. 극 중 지환의 모습을 한 유순한 모습의 지섭 역시 촬영 대기 중이었다. 라일과 도희가 카페 안에서 대화하고 있으면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신을 찍기 위해서였다. 도희는 퇴원 후 처음 보는 지섭을 보곤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언제 왔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도희가 먼저 알은체를 해 오자 지섭이 눈에 띄게 기뻐했다.
“이제 완전 괜찮……윽.”
그는 무리하게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빙빙 돌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조심해요! 무리하지 말고.”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같은 촬영 팀 식구라면, 게다가 소속사 후배라면 챙기는 게 당연한데. 지섭은 마치 도희의 걱정이 특별한 고백이라도 되는 양 얼굴을 붉혔다. 도희는 이제 그런 지섭의 수줍은 태도를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지섭의 모든 행동이 동경이라고 판단해 버린 도희 머릿속에서 지섭은 그저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 중 한 명이 되었을 뿐이었다.
“촬영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연기 열정이 대단하네요.”
“아뇨, 다른 이유 때문에요.”
“네?”
카페 앞에서 툭 던진 지섭의 말에 도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설마 보고 싶었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겠지?
“선배님이랑 정말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동경하는 선배님이랑 같이 연기할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아.”
도희는 그제야 지섭의 커다란 동경심을 다시금 떠올렸다. 하긴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우상 삼아 연기를 시작했다고 하니 지섭의 입장에서 그럴 만도 했다. 도희는 지섭의 반짝이는 눈빛을 응시하다가 미소를 머금고 활기차게 말했다.
“자꾸 그렇게 말해 주니까 콧대가 좀 올라가는데요? 그동안 많이 의기소침해져 있었는데.”
“그러실 분이 아닌데.”
지섭은 도희의 약한 모습을 보기 싫다는 듯 눈썹을 팽팽히 모았다. 마치 나무라는 듯한 엄중한 지섭의 말투에 도희가 피식 웃었다.
“나도 내가 그럴 줄 몰랐는데. 사람이 약해지니까 악플 하나에 멘탈이 흔들리더라구요. 악플이 그렇게 무서운 건 줄 처음 알았어요. 내가 그렇게 악플에 신경 쓰는 사람인지도 처음 알았고.”
도희는 자신을 동경한다는 지섭 앞에서 어쩐지 약점이 술술 파헤쳐지는 느낌이었다. 그 누구보다 수상하게 여겼던 지섭이었는데, 동경을 가장한 응원 때문일까. 도희는 자신이 허물을 한 꺼풀 벗겨 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대한 사람은 없대요. 관대함은 여유에서 나오는데, 인생이 어떻게 늘 탄탄대로겠어요.”
도희의 씁쓸한 모습을 지켜보던 지섭은 가벼운 투로 그녀를 위로했다. 따뜻한 말 때문이었을까. 도희는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탄탄대로는 바라지도 않는데…… 내 인생은 너무 기구하네요.”
도희는 다시금 부현의 얕잡는 듯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슬픔과 원망을 초월한 도희의 목소리에 지섭의 시선이 그녀 입술에 닿았다. 아픔을 참아 내듯 아랫입술을 말아 문 그녀를 한참 바라보던 지섭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 아니요. 일은요.”
누구보다 자존심이 센 도희인데, 저도 모르게 후배 앞에서 한탄을 뱉은 자신에게 뒤늦게 놀라며 뒤를 돌았다.
“먼저 들어갈게요.”
마침 카페에 들어가는 스태프가 카페 문을 열었다. 스태프가 카페 안으로 쏙 들어가고, 스태프를 쫓는 도희가 닫히는 문에 몸을 끼워 넣는 순간이었다.
타앙-!
상당한 무게가 나가는 묵직한 유리문은 도희 코앞에서 멈춰 섰다. 큰 소리에 도희가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그곳엔 힘줄이 가득 선 팔뚝 하나가 무거운 문을 지탱하고 있었다.
“남은 팔도 마저 쓸까요?”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에 좀 더 고개를 들고, 도희는 그제야 자신을 구한 게 지섭의 왼팔임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도희 앞에서 닫혀 버릴 뻔한 문을 지섭이 잡아 준 것이다.
도희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고, 그러자 지섭의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별안간 훅 끼치는 지섭의 체취에 도희는 고맙단 말도 잊은 채 살짝 열려 있는 좁은 문틈을 힘껏 밀어, 그 사이를 황급히 빠져나갔다.
지섭은 그런 도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을 발견하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네.”
고작 ‘스위트 셰어 하우스’ 입주 계약서를 쓰는 장면인데. 라일은 벌써 몇 번째 NG를 내는 중이었다. 도희는 대체 왜 라일이 NG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대본에 따르면 라일은 지환을 짝사랑하는 상대로서 여우처럼 입주 계약서를 써야 하는데, 불안한 사람처럼 연기를 하는 내내 시선이 산만하게 분산됐고, 모스부호 찍듯 검지를 틱틱거리길 반복했다.
“NG!”
“너 왜 그래?”
라일이 밉긴 했지만, 지금은 호흡을 맞춰야 하는 배우였다. 도희는 라일의 불안정한 태도를 지적하되 부드럽게 물었다.
“신경 끄세요.”
라일은 끝까지 자존심을 버릴 마음이 없는지 눈에 힘을 준 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떻게 신경을 끄니. 니가 지금 계속 NG를 내고 있는데.”
부현의 전화 한 통이 도희의 심경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었지만, 카메라 앞에 섰을 때만큼은 그 정도 사생활을 잊을 정도의 프로 정신은 있었다. 도희는 라일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충고했다.
“힘들면 쉬었다 하자고 해. 괜찮으니까.”
“촬영 스케줄 밀린 거 몰라요?”
라일이 신경질적으로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한숨을 쉬던 김 감독이 모니터링을 마치고 헤드셋을 빼더니 모두가 다 들릴만한 큰소리로 외쳤다.
“백도희 씨! 똑바로 안 해요?”
김 감독의 호통에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밖에 있던 지섭까지 토끼 눈을 하곤 김 감독을 쳐다봤다. 김 감독은 철판이라도 깐 얼굴로 도희를 향해 눈을 부릅뜨기까지 했다.
“감정이 안 살잖아, 감정이!”
하루 종일 멍했던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이 들었다. 도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라일을 한 번 보고, 라일 쪽엔 시선조차 주지 않는 김 감독과 시선을 부딪쳤다. 도희와 김 감독, 둘 사이엔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