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지우고 싶은 이름
물론 톱스타 자리에 올라 이런 불쾌한 일을 겪은 건 오랜만이지만, 도희는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주완의 태도에 마음이 누그러졌다.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해결해 주셨으니 됐습니다.”
“그럼, 촬영 마저 잘 부탁드립니다.”
“네.”
마치 도희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조치를 취한 주완 덕에 도희는 나머지 촬영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쉬는 시간을 방해받지도 않았다. 도희는 촬영이 원활하게 진행될수록 주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그날 저녁, 객실 점검을 마친 주완이 복도 끝 방에서 비서와 함께 나왔다. 새로 리모델링 한 인테리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오래되어 조금 시설이 낙후된 리조트는 주완의 관리 감독 아래 새롭게 탄생하는 중이었다. 그 결과 CH리조트는 제주도에서 가장 고풍스러우면서 세련된 리조트라는 호평이 자자했다. 게다가 서비스까지 나무랄 데 없는 건 직원들을 대할 때 격의 없이 구는 주완의 태도가 한몫했다.
“대체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건데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던 주완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봤다. 주완이 걸어오던 정반대 방향에선 여자 둘이 대치하며 서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낯이 익었다.
“저기, 우리 모델 아닙니까?”
“맞는 것 같습니다.”
정 비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복도엔 카랑카랑한 목소리 하나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무려 ‘한랑물산’ 아들이란다! 한랑물산 알지? 거기 나름 대기업이잖니.”
주완의 시선 끝에 닿아 있는 사람은 분명 배우 백도희였다. 도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늙은 여자를 겨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서요?”
“잡아야지! 요즘 여배우 소문 더러워서 인기도 없는데. 너 좋다잖아.”
“엄마!”
주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여배우 소문이 더럽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도희는 ‘엄마’란다. 엄마라는 사람이, 저럴 수 있는 건가? 곧 엘리베이터가 제 앞에서 갈라지듯 문이 열렸지만, 주완은 도로 문이 닫힐 때까지 두 모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야 스폰서는 찬성인데, 네가 그런데 융통성 있는 애도 아니고. 그럼 남편이라도 잘 잡아야지. 안 그래?”
“하, 융통성이요……?”
“나이가 어릴수록 잘 팔려 가는 거 알지? 한랑물산 아들이 너랑 띠동갑인가 그래. 요즘 세상에 띠동갑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치?”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도 늙은 여자는 자신이 정말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신이 나서 말했다. 힘없는 도희는 점차 대꾸할 기력도 찾지 못하고 얼굴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갔다.
그 얼굴을 본 주완은 뭔가에 홀린 듯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완의 머릿속에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부현의 목소리가 순자의 활기찬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잘 됐다! 주승이가 한눈팔 때, 네가 잘해야 돼. 걘 기특하게 영화감독을 한다고 난리니.’
‘형은 좋겠어요. 하고 싶은 게 있잖아요.’
‘얘는! 네가 그랬다간 이 엄마 뒷목 잡아. 넌 다른 생각 말고 경영 수업이나 열심히 해. 회장님 눈 밖에 나지 말고. 주주들 마음 돌리려면 지금부터 할 게 아주 많다. 알아들어?’
‘저는…… 형과 경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
‘네가 그러고 싶다고 경쟁을 안 해? 이미 태어난 순간부터 너흰 경쟁자였어. 장남과 차남 차이가 보통인 줄 알아?’
‘형도 어머니 자식이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누가 그래! 어릴 때나 애니까 예뻐한 거지. 아직도 세상 물정 파악이 안 돼?’
긴 복도를 걸으면서 주완은 부현의 섬뜩한 말들을 떠올렸다. 주완은 어제 처음 본 여자에게 생전 느껴본 적 없던 동질감을 느꼈다. 돈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처지, 그게 부모라서 어쩌지 못하는 처지가 꼭 자신 같았다.
주완의 결연한 걸음걸이가 모녀를 앞에 두고 멈췄다. 그 뒤를 쫓은 정 비서는 주완의 돌발 행동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도희는 들키고 싶지 않은 광경을 들킨 사람처럼 마지못해 인사했다. 주완은 도희의 침통하고 어두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자는 ‘이사님’이라고 칭한 그의 호칭에 눈을 번뜩였다. 뒤에 있는 정 비서까지 확인한 순자는 파악이 끝난 듯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혹시 어디 이사……?”
“엄마!”
“CH그룹 이사 차주완입니다.”
“C, CH요? 내가 아는 그 CH? 어머, 그러면 혹시 거기 차남……!”
뒤늦게 기사로 접한 주완의 얼굴을 떠올린 순자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모습에 도희는 당장이라도 땅으로 꺼지고 싶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주완이 말했다.
“백도희 씨, 저랑 저녁 식사 한 끼 하시죠.”
두 사람은 리조트 레스토랑의 외진 구석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처음 주완이 도희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 매니저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가 곧장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었다. 드디어 대표에게 ‘몰래 식사할 상대’가 생긴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주완은 개의치 않고 매니저에게 B코스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린다는 걸 깜박했는데, 제가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그럼 드실 수 있는 것만 드시죠.”
작은 소동을 제외하곤 따로 말조차 섞어 본 적 없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 주변으로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주완의 뜬금없는 식사 제안으로 겨우 순자에게서 벗어났지만, 도희는 마음이 찜찜했다. 도희는 주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를 떠미는 순자의 손길에 소름이 끼쳤다. 어서 데려가라고 떠미는 순자의 손아귀 힘은 마치 공양미 삼백 석에 딸을 어두컴컴한 물속으로 밀어 버리는 만큼이나 셌다. 얼결에 뛰어든 주완의 품속에서 도희는 순자의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딸을 그저 돈으로만 보는 그런 끔찍한 눈동자를.
“좀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던데.”
주완의 물음에 회상에서 깨어난 도희가 주완의 조화로운 얼굴을 마주했다. 당장 주완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순자의 본모습을 들켜 버린 것도 꺼림칙한데, 이제 순자는 한랑물산은 고사하고 CH그룹 차주완에 대해서만 캐물을 게 분명했다. 도희는 주완의 오지랖이 고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오늘 일은 감사하다고만은 못 하겠네요.”
도희는 그에게 쓸데없는 위축감을 느끼며 퉁명스레 말했다.
“제가 곤란하게 했습니까?”
하필 재벌에게, 그것도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수치스러운 가정사를 들키다니. 물론 주완이 그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도희가 만난 재벌 중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재미를 느끼는 사람도 많았기에 불안했다. 혹시 비밀을 파헤치는 걸 즐기면 어쩌지, 누군가 곤란해하는 걸 즐기는 취미라도 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도희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희는 연신 눈동자를 굴리며 주완이 어떻게 나올지 긴장하며 쳐다봤다.
“말 안 합니다.”
주완은 그런 도희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덤덤하게 말했다.
“네?”
“의도치 않게 뭔갈 들었지만, 난 그냥 도희 씨랑 밥이 먹고 싶었습니다.”
“혹시 동정심에 구해 주신 거면…….”
톱스타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순간, 도희가 다른 핑계를 대려던 찰나 그가 말허리를 잘랐다.
“처지가 저랑 비슷한 것 같아서요.”
뜬금없는 주완의 말에 도희는 더 이상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이래 봬도 가정사가 복잡하거든요.”
“기사엔 항상 화목하다고…….”
“백도희 씨도 기사에선 상당한 효녀던데요?”
“…….”
도희는 정곡을 찌른 그의 말에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우린 약점이 같은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저랑 사적인 계약 하나 하시죠.”
“계약이요?”
그 말을 끝으로 주완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당신은 어머니께 떵떵거리고, 나는 어머니 성화를 피할, 아주 좋은 계약이 될 겁니다.”
그게 도희가 보는 주완의 첫 미소였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처음엔 서로를 동정했고, 서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빌미가 되고자 했다. 연애하는 척을 하다가 그 감정이 실제가 되고, 결혼까지 자연의 순리처럼 차곡차곡 흘러갔다.
“참, 나도 많이 변했다.”
과거를 떠올리던 도희는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당시 도희는 내면이 단단했다. 순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조차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도희는 그저 제 앞길을 살아 내는 데만 몰두했다. 이 모든 게 바뀐 건, 불과 3년 전 이혼 때문이었다. 도희는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고 아랫배를 슬슬 쓸었다.
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완이 나타난 그 날부터 하루에 주완을 떠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증오든 원망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희 인생에 자꾸 주완이 끼어드는 게 싫었다. 고작 아프냐는 말 한마디에, 무너져내릴 것 같은 표정 하나에 심장이 욱신거리는 저 자신이 싫었다. 미련이 아닐 텐데, 자꾸 미련처럼 도희의 가슴을 헤집는 주완이 다시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했다.
이번엔 내가 해외로 사라져 버릴까.
도희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가 지웠다. 복귀하기까지 꼬박 3년이었다. 2년 동안은 아예 카메라 앞에 서지도 못했고, 작품을 시작하면서 운이 좋아 ‘칸의 여인’이라는 칭호까지 거머쥐었다. 아직까지 카메라도, 기자도 두려운 도희였지만, 이제 겨우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차주완이라는 인간 때문에 두 번씩이나 무너질 순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도희는 인터넷에 ‘차주완’이라는 이름 석 자를 검색했다. 이혼 후 힘든 시기를 견뎌낼 때, 이별을 견디는 법에 대해 인터넷에 검색한 적 있었다. 거기서 가장 추천하는 방법이 바로 인정하기였다. 상대가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미우면 미운 대로 ‘아, 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미워하고 있구나.’ 받아들여야 치유가 시작된다고 했다. 3년 전 도희는 그 방법을 실천하지 못했다. TV나 인터넷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주완의 이름 석 자를 듣기만 해도 호흡이 불안정해졌으니 인정하기는 가당치도 않았다. 당시엔 CH그룹 자체를 피하고 싶을 정도였는데, 전국에 CH계열사는 어디든 퍼져 있어서 도희는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니야.”
도희는 인터넷에 뜬 차주완의 얼굴을 또렷하게 노려봤다. 실제로 마주친 것에 비하면 사진 정돈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완의 이름이 뜬 기사들이 우후죽순 나와도 괜찮았다. 그때, 도희의 시선이 검색 바 바로 아래 즈음 멈췄다.
[백도희 차주완]
아직 지워지지 않은 연관 검색어였다. 도희에게 무척이나 지우고 싶은 과거였지만, 도희가 잊는다고 한들 잊히는 과거가 아니었다. 3년이 지나도록 왜 연관 검색어가 지워지지 않는 지 한 번은 사이트 측에 문의한 적도 있었다. 운영자 측에선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현재까지 계속 집계되는 검색어일 경우 내려가지 않습니다.]
끔찍했다. 당사자는 죽을힘을 다해 잊어 가는데, 누군가는 도희의 상처를 호기심으로 들쑤신다. 백도희 이름을 검색할 때, 차주완 이름을 한 번 더 검색하고, 두 사람이 어떻게 이혼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사귀다가 헤어졌는지 정리된 글을 한 번 더 읽고. 그렇게 도희의 상처를 그저 흥미로운 가십거리로 치부하는 세간의 관심에, ‘차주완’이란 이름 석 자마저 마음대로 지울 수 없었다.
도희는 그 뒤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보지 않았다. 악플도 두려웠지만, 더 두려운 건 사건이 생길 때마다 엮이는 차주완 때문이었다.
“이제 좀 떨어져라, 제발.”
은지섭이라는 새로운 연관 검색어도 생겼는데. 도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여배우의 삶이 기구하다곤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보통 삶은 아니었다.
그때, 도희를 깨우는 긴 진동이 울렸다. 시간이 늦은 데다가 딱히 연락 올 데도 없는데. 도희는 의아함에 놓으려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누구지?”
이번엔 주완의 번호도 아닌 또 다른 낯선 번호였다. 도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나다.
위엄 있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도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