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이러면 미친 건데
정장이 아닌 흰색 반팔 티에 베이지색 슬랙스. 앞으로 자연스럽게 내린 머리에 희미했던 왼쪽 보조개가 선명히 보이는 그의 뺨은 이전보다 핼쑥했다. 도희는 주완의 야윈 얼굴을 보다가 잡힌 손목이 욱신거린다는 걸 깨닫고 손을 뿌리치기 위해 힘을 주었다. 하지만 주완의 표정만 와락 구겨질 뿐이었다.
“병원엔 왜 왔어. 어디 아픈데.”
심상찮은 분위기에 접수처에 앉아 있던 직원이 주완과 도희를 번갈아 보며 쳐다봤다. 손목을 잡고 있는 주완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보호자 분, 옆쪽으로 나와 주세요.”
직원은 주차권을 슬쩍 내밀며 말했다. 접수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두 사람이 방해된다는 눈치였다. 도희는 이러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싶어 얼른 주차권을 주머니에 넣고 그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쳤다.
“누구세요?”
표독스러운 도희의 눈동자에 주완은 맥이 풀린 듯 서글픈 얼굴을 했다.
우선 사람들이 없는 곳에 가야겠다고 판단한 도희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구로 들어갔다. 자신을 쫓는 주완의 발소리가 계속되자 도희의 걸음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왜 피해야 하는지, 왜 필사적으로 도망가야 하는지 몰랐지만, 도희는 그저 주완과 마주 보고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주완만 마주치면 온몸의 영혼이 유체이탈을 한 듯 넋을 놓았다가, 이윽고 숨겨 둔 경멸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만날 때마다 하루 이상 그 후유증이 계속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도희에게 주완은 아직 힘든 존재였다. 주완처럼 의연할 수가 없었다. 도희는 그게 자꾸만 화가 났다.
도망가던 도희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우당탕 메아리치듯 따라 내려오던 소리가 도희 등 뒤에서 덩달아 끊어졌다. 도희는 자신의 뒤를 쫓던 주완이 제 뒤에 서 있음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왜 따라와요?”
도희가 뒤를 홱 돌아보자 주완이 천천히 도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도희는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도희는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거즈가 붙은 발목을 물끄러미 보던 주완의 시선이 도희의 이목구비로 옮겨 갔다. 주완의 눈동자는 도희의 얼굴을 느릿하게 배회했다. 대칭을 잘 이루고 있는 눈썹, 순하게 커다란 까만 눈동자, 동그란 콧망울, 얇은 입술을 훑는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도희는 자신을 옭아매는 듯한 오싹한 시선을 끊어 내기 위해 말했다.
“모르는 척하잔 말, 무시해요?”
“아는 척하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력 좋은 주완은 그날, 광고 촬영장 복도에서 만나 나눴던 대화를 그대로 상기시켰다. 발끈해서 선을 긋기 위해 말을 꺼내려는데, 그가 좀 전보단 침착한 투로 물었다.
“다친 건가? 왜 다쳤는데. 여기 말곤 다친 곳 없어?”
“알 거 없잖아요.”
도희의 오연한 답변에 주완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은지만 말해 줘.”
주완은 더 큰 요구는 안 하겠다는 듯 도희에게 말했다. 그 말을 뱉는 주완의 모습이 마치 꼭 애원하는 것 같아 도희의 마음속이 은근하게 울렁였다.
“부탁이야.”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도희는 광막한 그의 눈동자 속에 깃들어 있는 간절함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곤 문득, 그가 왜 하필 여기 있는지 궁금해졌다. 옷 행색을 봐선 일 때문에 온 것 같지는 않고.
“그쪽이 왜 여기 있는지 알려 주면 나도 말할게요.”
“……!”
도희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완의 눈빛이 당혹감으로 빛났다. 뭔진 몰라도 도희는 자신의 질문이 주완을 곤란하게 했다는 데에 뿌듯했다.
“일이 있었어.”
“그러고요?”
도희는 주완의 캐주얼한 차림을 지적하며 말했다. 주완은 무언가 목구멍에 걸린 사람처럼 침을 삼켰다. 잠시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의 목울대가 도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괜찮은 거면 됐어.”
주완은 도희에게 답변 듣는 걸 포기했는지 마음대로 결론을 낸 뒤 뒤를 돌았다. 막상 허무하게 계단을 오르는 주완을 보곤 도희는 하마터면 그의 옷깃을 잡아챌 뻔했다. 도희는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을 거두곤 주먹을 꽉 쥐었다.
“아프지 마.”
철문이 열리는 동시에 날아온 그의 목소리에 도희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주완은 그 말을 뒤로하곤 결연한 걸음걸이로 비상구를 빠져나갔다. 도희는 그가 사라진 문을 한참 동안이나 비통한 얼굴로 응시했다.
주완은 비상구를 나와 찜찜한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진료실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다가 급히 수화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는 윤선이 보였다. 일단 진료실에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주완은 핸드폰을 들어 검색창에 [백도희]를 검색했다.
“어디 갔었어! 전화도 안 받고!”
“미안.”
주완은 간단명료한 사과를 뱉으며 눈으론 도희의 최근 뉴스를 뒤졌다. 윤선은 그런 주완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농도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엔 또 왜 샜는데? 술 마신 것도 그렇고. 자꾸 멋대로 할래?”
“미안.”
주완은 또다시 무미건조한 사과를 했다. 윤선에겐 차마 접수처에 서 있는 도희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도희 때문에 검사를 펑크낼 뻔한 걸 알면 윤선이 이번에야말로 부현에게 무슨 말을 전달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행히 검사 결과,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닌데 조심은 해야 해. 어제처럼 술 안 되고, 밤새는 거 안 돼. 무리하지 말란 소리야.”
“어.”
그렇게 대충 대답한 주완은 전날 올라온 도희의 조명 사고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를 발견한 주완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급성 스트레스받으면 뇌압이 상승할 위험이 있어. 혼수상태 빠지면 특히 넌 깨어나기 힘드니까…… 핸드폰 안 치우냐. 진짜 이 화상!”
대충 읽어 보니 더 크게 다친 건 지섭이고, 지섭이 감싼 덕에 도희는 큰 화는 면했다고 쓰여 있었다. 주완은 그제야 안심하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전생에 원수였을 거야, 넌.”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는 윤선을 보며 주완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 * *
라일은 주연 둘이 없는 촬영장을 발랄하게 누비고 다녔다. 주연들의 스케줄이 뒤로 밀리는 대신 조연들 촬영이 당겨졌다. 촬영이 갑작스레 당겨진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눈에 거슬리는 백도희가 보이지 않으니 라일은 속이 다 시원했다. 사근사근하면서도 털털한 이미지의 호감형인 라일은 도희 앞에서만큼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처음엔 라일은 도희에게도 역시나 연기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희를 처음 본 순간 라일은 그녀를 좋아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너구나? 내 닮은 꼴이.’
백도희 닮은 꼴 류라일. 처음에 그렇게 뜨기 시작해서 그런지 도희는 라일에게 적대적이었다. 의도치 않았는데 라일을 더러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의 말이 기분 나쁘긴 라일도 마찬가지였다. 라일은 순수하게 자신이고 싶었다. 그 누구의 닮은 꼴이 아니라.
“감독님! 더우시죠. 커피 한잔하세요!”
라일은 제 얼굴이 박힌 홀더를 끼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김 감독에게 건넸다. 그러자 짜증스러웠던 김 감독의 표정이 일순간 누그러졌다.
“역시, 류라일 씨 센스 있네. 주연 배우 없이 촬영해서 분위기 축축 처졌는데.”
라일은 일부러 다음 날 곧장 커피 트럭을 불렀다. 물론 친한 배우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커피 트럭은 오늘도 역시 무더위에 환영받았다. 도희만 없으면 라일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이끌었다.
‘백도희만 없으면 세상이 다 평화롭네.’
한동안 백도희가 이혼한 뒤 안 나와서 얼마나 좋았는데. 하필 도희와 ‘하루살이’ 작품에서 만난 이후로 모든 게 꼬였다.
“감독님, 제가 빈자리까지 꽉꽉 채우도록 열심히 할게요!”
“오, 그래요? 기대합니다?”
라일은 ‘백도희 닮은 꼴’이 아닌 ‘배우 류라일’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라일은 그 간극을 특유의 사근사근함으로 메꾸려고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 더 노력했다. 그 노력은 특히 촬영장에서 발휘됐다. 연기만으로 도희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라일 나름대로의 대안책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대로 빨아 마시던 김 감독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마치 무언가를 바란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눈치 빠른 라일은 수선을 피우며 상냥하게 물었다.
“뭐 필요하세요, 감독님?”
“류라일 씨,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김 감독은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부탁을 얘기했다. 부탁을 들은 라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저 멀리서 진종선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집에 돌아온 도희는 소파에 가만히 누워 주완의 행동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어디 아파?’
손목을 잡아채고, 심란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얼굴.
‘다친 건가? 왜 다쳤는데. 여기 말곤 다친 곳 없어?’
도희를 쫓아와 굳이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그 간절한 표정.
‘아프지 마.’
씁쓸하기까지 한 그의 뒷모습까지.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도희는 점점 가슴이 뛰는 게 느껴졌다.
‘왜 이래,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미친 건데. 생각을 떨치려고 해도 떨쳐지지 않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주완이 되레 더 생각이 났다. 잊으려고 생각할수록 그와 함께 나눴던 좋은 기억들이 하나둘 도희의 기억 속에 톡톡 터져 나왔다. 주완이 옆에 없는 동안 다 잊은 기억들이었는데. 도희는 잊고 있던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처음 그를 만나게 된 건 제주도에서였다. 제주도 CH리조트 모델 계약을 완료한 도희는 드라마 촬영 중에 짬 내서 제주도로 내려왔고, 첫 미팅 자리에서 주완을 처음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차주완입니다.”
“백도희예요.”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올려 드러낸 반듯한 이마, 정리된 그의 진한 눈썹. 매혹적인 속쌍꺼풀을 가진 눈매와 깊고 검은 눈동자에 살짝 도톰한 입술은 도희와 나란히 모델로 서 있어도 손색없을 외모였다. 우월한 외모에 재력, 그리고 기사에서 늘 보여 주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까지. 도희는 날 자리를 잘 타고난 그를 처음 보자마자 강렬한 질투심을 느꼈다.
도희는 회의 내내 주완을 힐끗힐끗 바라봤다. 주완은 뛰어난 외모를 갖고도 그 방면으로 무심한 듯 굴었고, 그만큼 남의 외모에도 무관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주완은 톱스타인 도희를 앞에 두고도 좀처럼 그녀에게 시선을 두는 일이 없었다.
한창 몸값이 뛰고 있던 도희는 어딜 가나 주목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특히 첫 미팅 자리에선 그녀의 실물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카메라보다 훨씬 더 예쁘다느니, 연기도 잘하는데 모델로 손색이 없다느니 하는 말들이 늘 오갔다.
하지만 CH그룹 이사와의 미팅, 주완과의 미팅은 달랐다. 주완은 그녀를 그저 ‘비즈니스 상대’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지 않았다. 계약 만료일부터 원하는 콘셉트, 원하는 리조트 이미지를 도희에게 충분히 설명한 주완은 식사 권유는커녕 도희에게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자리를 피했다.
“저 이사 말이야.”
“누구? 차주완?”
회의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도희는 나영에게 주완에 관해 물었다.
“응. 재벌이라 그런가…… 나 보고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당시 도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여배우였다. 도희가 가는 곳마다 탄성이 터져 나오는 건 물론이고 어딜 가나 시선이 따라붙는 건 당연했다. 특히 직업이든 재력이든 뭔가 가졌다고 하는 남자들이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한 번씩 도희와 식사를 함께하길 원했다. 아무한테나 들이대는 남자들의 태도도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주완의 무심한 태도에 도희는 어쩐지 불쾌해졌다.
“풉! 아서라! 우리 도희 잘난 건 알지만, 저 인간이야말로 대한민국 0.1% 인물들은 다 봤을 텐데. 너 뜨기 전 톱스타들도 줄줄이 다 봤을걸?”
“아 뭐, 그치! 그렇겠지!”
나영의 팩트 폭력에 도희가 입을 비죽거렸다.
“뭔가 재수 없다.”
“원래 있는 것들은 다 재수 없는 거야.”
CH그룹 차남 차주완. 그때까지만 해도 도희의 머릿속엔 그는 결코 닿지 않을 남이었다.
다음 날, 도희는 리조트 옥상 수영장에서 광고 촬영이 있었다. 계약이 성사되자마자 촬영을 하는 건 SP엔터테인먼트의 요구였다. 제주도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도희는 그 정도로 촬영 스케줄이 빡빡했다.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촬영을 하던 도희는 비키니 차림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기 위한 투숙객들이 주변을 자꾸 맴돌았다. 수영장 개장 시간이 아니었기에 투숙객들이 수영장을 올 리가 없는데, 누군가 ‘톱스타 백도희가 수영장 촬영 중이다.’라고 말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을 한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몰렸다.
그런 시선들에 익숙한 도희였지만, 썩 내키는 광경은 아니었다. 촬영할 때야 카메라에 집중하느라 시선을 신경 쓸 새가 없지만, 쉬는 시간이 되니 따라다니는 시선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도희가 걸어갈 때마다 엉덩이와 가슴 쪽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보통은 저런 사람들을 쫓아내기 마련인데, CH리조트 측에선 별다른 대책을 세워 주지 않았다. 직접 사람들을 내쫓을 수 없는 도희는 애써 그 시선들을 외면했다.
‘나중에 회사에 말하든지 해야지.’
그렇게 커다란 비치 타월을 몸에 두르는 순간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낮은 목소리가 어디선가 날아왔다. 큼직한 타월을 덮고 의자에 앉으려던 도희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책임자 누굽니까. 보안 유지 안 해요? 우리 모델 관리는요.”
정장 차림의 주완은 회의를 하러 가기 위해 지나가던 길인 모양이었다. 종이 여러 장이 든 파일을 파일첩에 끼운 채 꼿꼿하게 선 주완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사람들을 뒤에 세운 채 큰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총책임자는 황급히 어디선가 튀어나와 주완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촬영 내내 곁에 없던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그렇지. 관리가 안 된 거구나. 도희는 CH리조트와 연장 계약은 안 하리라 다짐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상황이 마무리되고, 불편한 투숙객들을 어느 정도 쫓아냈을 때 즈음 주완이 도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관리 소홀입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