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디 아파?
다음 날 지섭의 입원 소식이 들렸다. 퇴원까지 최소 5일간 안정을 취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에 촬영 스케줄이 연기됐다. 소식을 들은 도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고였고, 도희의 잘못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을 구하려다 크게 다친 지섭이 마음에 걸렸다. 만일 조명 아래 정중앙에 서 있던 도희를 지섭이 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병원에 누워 있는 건 도희가 됐을 것이다. 열애설이고 뭐고, 적어도 병문안은 가야 했다.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한 도희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지섭의 병문안에 가겠다고 하자 나영은 흔쾌히 함께 가겠다며 차를 대기시켰다. 나영은 일부러 밴이 아닌 자신의 차를 끌고 왔다. 행여 기자들에게 발각이 된다면 적당히 둘러댈 핑계도 준비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를 위해서였다.
“지섭 씨는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더라. 보호한 것까진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 팔로 널 치료까지 했냐.”
“……그러게.”
“뼈에 금 살짝 갔댔지?”
“응. 인대도 좀 늘어나고.”
“쓰읍, 진짜 수상하단 말이지.”
운전하는 나영이 혀를 차며 지섭에 대해 말하자 도희는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실은 도희 역시 지섭의 감정을 의심하고 있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당장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도희는 지섭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별안간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어 애써 생각을 접었다.
지섭이 입원해 있는 곳은 잠실 쪽에 있는 S대학 병원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도희는 최대한 튀지 않게 입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너무 편한 차림이 아닌가 싶어 걱정됐다.
“좀 그런가?”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고 격식 차린 옷 위에 모자랑 마스크 쓸 수도 없고. 그게 더 이상해.”
도희와 나영은 지섭의 1인실 병실 앞에 서서 작게 대화했다. 최대한 튀지 않는 회색 면 티셔츠에 짧은 연청색 반바지를 입은 도희는 그 위에 하얀색 야구 모자를 대충 눌러쓴 채였다. 그녀의 야리야리한 발목엔 어제 구급 대원들이 붙여 놓은 거즈 위로 피가 조금 비쳤다.
“갔다 와.”
“응? 너는?”
“병실 앞 감시.”
나영의 말에 도희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알 만하다는 듯 도희는 병실 앞에 서서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서야 나영이 대신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동그란 화형의 연노랑 빛 장미를 주로 넓게 펴져 있는 꽃다발은 도희의 하얀 피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들어오세요.”
도희가 병실을 노크하자마자 안쪽에선 기대에 찬 지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희는 위축된 얼굴로 병실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병실엔 지섭이 매니저 없이 혼자 침대에 앉아 있었다. 지섭은 마치 오랜만에 만난 동창을 보듯 도희를 보곤 환하게 웃었다. 도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그의 밝은 미소가 아니라 깁스였다. 어깨 아래로 단단하게 팔을 고정하고 있는 깁스가 도희의 죄책감을 들쑤셨다. 도희는 깁스를 한참 동안 넋 놓고 보다가 부랴부랴 들고 있던 노란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빨리 나아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섭은 도희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을 기쁘게 받곤 곧장 도희의 차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쑥 훑었다. 면 티셔츠에 연청색 반바지. 누가 봐도 갖춰 입은 차림은 아니었다. 지섭의 집요한 시선에 도희가 머쓱하게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 이게 병문안 올 차림이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안 들키려면 최대한 튀지 않게 입어야 하니까요. 우리가 처음엔 그렇다 쳐도 또 소문이 퍼지거나 하면…….”
“예뻐요.”
“네?”
지섭이 제 발 저리듯 변명하는 도희의 말을 잘랐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다시 그의 말을 되새기려는 찰나였다.
“발목은 괜찮아요?”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지섭의 예쁘단 말은 마치 안부 인사처럼 덤덤해서 도희는 그의 말을 깊게 생각할 여유 없이 다른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네, 괜찮아요.”
“병원 온 김에 확인해 봐요. 피가 더 났나? 어디 더 따갑거나 한 데는 없어요?”
지섭은 거즈에 살짝 묻어 있는 핏자국을 보곤 말했다. 핏자국이라고 해 봐야 동그란 점처럼 찍힌 자국 몇 개뿐이었다. 도희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유난스러운 그의 태도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없어요. 어제 나영이가 계속 확인했어요.”
분명 병문안 온 건 난데. 질문이 마치 주객전도된 듯했다. 도희의 상태를 확실하게 확인한 지섭은 그제야 자신이 받은 꽃다발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엔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고 있던 지섭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묵이 일 분간 지속되자 도희는 뭐가 이상하냐는 듯 꽃다발을 둘레둘레 살폈다.
“질투, 시기, 우정, 성취, 사랑의 감소…… 아, 이건 아니고.”
“네?”
“이것 중 뭐예요? 다 노랑 장미 꽃말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도희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곤 지섭을 멀거니 바라봤다. 그러자 짐짓 굳어졌던 지섭의 표정이 심술궂게 풀어지며 도희 손목을 잡아끌었다.
“농담이에요, 앉으세요.”
얼결에 지섭의 침대에 걸터앉게 된 도희는 실례란 생각에 얼른 엉덩이를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도로 도희의 팔목을 잡아채는 힘에 도희는 무력하게 침대에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지섭 씨 이 자린 내가 좀 불편…….”
“어제 촬영 팀 분위기 어땠어요?”
도희는 지섭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이전 같았으면 지섭의 무례함에 까탈스럽게 굴었을 도희였는데, 지섭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되레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웠다.
그게 사실이라면 제대로 거절을 하긴 해야 하는데. 병문안까지 와서 할 얘긴 아니란 생각에 도희는 우선 지섭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 주기로 했다.
“초상집이 따로 없었어요. 첫 촬영인데 그런 일이 있어서.”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요. 선배님 팬이 보낸 간식 차도 받고.”
지섭의 말에 도희는 겨우 잊었던 어제의 수치가 떠올랐다. 도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촬영해 보니까 어때요? 대본 리딩 할 때보다 할 만해요?”
“확실히 선배님이랑 캐릭터 얘길 많이 해서 그런지 첫 촬영인데 첫 촬영 같지가 않더라구요.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팔에 깁스를 두른 그가 꾸벅 인사하자 도희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후배 보듯 그를 응시했다. 지섭은 그런 도희의 눈동자를 보곤 눈썹 끝이 씰룩거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표정이었다.
“선배님. 저 선배님 때문에 연기 시작한 거예요.”
“네?”
돌연 지섭이 결연한 목소리로 뜬금없는 주제를 던졌다. 그는 감정을 견주어 보는 사람처럼 도희의 얼굴 근육을 하나하나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세동 고등학교 나오셨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저 선배님 후배예요. 연기 시작하실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지섭의 말에 도희는 경계가 완전히 풀어진 눈으로 그의 팔뚝을 툭 쳤다.
“어머, 진짜?”
도희의 눈이 반짝이며 그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럼 사랑이 아니라 동경 때문이구나……! 도희는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불편했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 에이스로 활동했던 도희기에 그녀를 따르는 후배들이 꽤 많았다. 당시 도희는 남녀 불문하고 전교생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학교의 연예인이나 다름없는 도희에게 감히 따로 고백하는 이도 없을 정도였다. 지원 한 푼 없이 아르바이트 하며 연기를 배우는 게 가끔 힘겹기도 했지만, 자신을 보며 꿈을 키우는 후배들을 보면 쉽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후배들의 동경은 당시 도희에게 큰 원동력이었다.
참으로 오래된 기억이었다. 어느샌가 꺼내 보지 않을 정도로 색 바랜 추억이 된 세동고등학교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도희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도희는 지섭이 자신의 후배였다는 것만으로 동경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복잡했던 심경이 전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한편 도희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제 팔뚝에 지섭의 시선이 머물렀다 떨어졌다. 그는 도희가 가까이 오자 훅 끼치는 향기에 몸을 떨었다. 지섭은 자신도 모르게 여유를 잃고, 도희가 다가온 만큼 몸을 뒤로 뺐다.
“나 때문에 시작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계기가 있었어요?”
본격적인 질문을 하려던 차에 때마침 병실 문이 열렸다. 잠시 무언가를 사러 나간 매니저는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곤 그대로 굳어졌다. 문 열린 틈으로 얼핏 두 사람을 발견한 나영 역시 토끼 눈을 하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섭의 매니저는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싶어 나영을 밀어내곤 재빨리 문을 닫았다.
“바, 방해한 거 아니죠?”
지섭의 매니저가 지섭의 몸쪽으로 기울어진 도희를 보며 말했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지섭과 가까워져 있었는지 깨달은 도희가 몸을 홱 일으켰다.
“어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고등학교 후배라고 해서요. 반가워서…….”
“아, 그래요?”
“인연이 깊죠.”
떨떠름한 매니저의 대꾸에 지섭이 특유의 능청으로 서먹한 분위기를 풀어냈다.
“무슨 일 있었는지는 다음에 밥 사 주실 때 말씀드릴게요.”
“밥이요? 아.”
도희는 뒤늦게 대치동 갈빗집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섭 씨, 촬영장에서 봐요.”
도희는 매니저의 경계가 또렷한 눈빛을 견뎌 내며 매니저와 지섭에게 인사했다.
“선배님! 가장 중요한 걸 안 들으셨잖아요.”
그렇게 나가려던 차에 문 앞에 선 도희를 지섭이 다시금 불러 세웠다. 도희가 뒤를 돌아보자 지섭이 치아를 드러내며 환한 미소를 짓고, 깁스를 한 오른팔을 위로 흔들어 보였다.
“저 멀쩡해요. 걱정 마세요.”
도희가 바깥에 나오자마자 나영은 그녀에게 모자와 마스크를 도로 건넸다. 병실 안에서 바짝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본 나영의 경계가 좀 더 야단스러워진 느낌이었다. 나영은 복도를 걸어가며 도희에게 귓속말로 나직이 물었다.
“뭔데. 둘이 진짜 뭐 있어? 나는 알아야지!”
“고등학교 후배래. 신기하지?”
“뭐?”
“반가워서 말 몇 마디 물었다. 오버하지 마.”
도희의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에 호들갑스럽던 나영이 도로 침착해졌다. 도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영은 더는 의심하지 않았다. 나영은 도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마치 오라버니라도 된 양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나는 우리 도희 연애하는 거 좋다? 나한테 말만 해 줘. 대표님한테 내가…….”
“아니래도.”
도희의 단호한 철벽에 나영은 꼬리를 내렸다.
“아님 말고. 혹시나 해서 말이야. 지섭 씨 눈빛이 영 수상하긴 하단 말이지.”
“…….”
도희는 나오기 직전,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지섭의 말을 떠올렸다.
‘저 멀쩡해요. 걱정 마세요.’
지섭은 동경하는 선배를 배려할 줄 아는 후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깔끔히 정리됐다. 도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라면 조심할 필욘 있을 것 같다. 열애설 두 번 나면 답도 없어. 우스워지기 싫으면 그땐 진짜로 사귀는 수밖엔 없다. 알지?”
“알았어.”
도희는 신신당부하는 나영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차피 두 번 열애설 날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선후배일 뿐이니까.
“그럼 나 화장실 좀! 엄청 참았다.”
도희의 대답을 듣고서야 겨우 안심했다는 듯 한숨 쉬는 나영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우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주차권 받아 올게.”
“1층인데 괜찮겠어?”
“괜찮지, 암.”
도희는 걱정하는 나영을 보며 모자와 마스크로 제 얼굴을 단단히 가렸다. 그제야 나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나 급해! 다녀와, 그럼!”
1층으로 내려간 도희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픈 사람들은 다행히 남에겐 관심이 없었고, 마른 다리에 거즈를 붙이고 있는 도희를 보며 그저 병원의 환자 중 한 명으로 취급하는 듯했다.
도희는 자신만만하게 접수처로 가서 주차권을 요구했다. 간호사 역시도 마스크를 내리지 않는 도희에게 딱히 신분증을 요구하진 않았다. 그저 얼굴을 반 이상 가리고 있는 도희를 수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주차권을 받기 위해 접수처에 기대어 서 있을 때였다.
휘익, 누군가 도희의 손목을 잡아 돌려세웠다.
“……!”
도희는 자신의 손목을 굳게 잡고 있는 그 뜨거운 손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동요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고, 붙잡혀 있는 손목 부근엔 뜨끈한 열이 올랐다.
“어디 아파?”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로 제 앞에 선 그는, 다름 아닌 차주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