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18화 (18/71)

18화 저 때문이에요

촬영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명이 떨어지는 동시에 지섭이 도희를 향해 몸을 날렸고, 흙길에 엎어진 두 사람 위로 조각난 조명 유리가 엉망으로 조각나 있었다.

“119 불러! 빨리!”

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조감독이 떨리는 손으로 다급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촬영장 정중앙에 떨어진 거라 다른 스태프들은 다치지 않았다. 떨어진 조명 위치에 서 있던 두 사람 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렸다.

조명이 떨어지는 순간, 도희 눈에 질색이 된 얼굴로 저를 향해 몸을 날리는 지섭의 표정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섭은 제 위에 엎어져 있었고, 도희는 맨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덕분에 바닥에 등이 쓸려 따가운 곳 말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지섭이 정신을 차리고 팔을 짚고 일어나며 다급하게 물었다.

“등은, 손 봐요.”

지섭은 도희를 부침개 뒤집듯 등과 손을 앞뒤로 번갈아 가며 이리저리 살폈다.

“전 괜찮아요. 지섭 씨는요?”

지섭이 밀어낸 덕분에 조명이 두 사람 머리 위로 떨어진 건 아니지만, 떨어질 때 분명 쿵 소리가 났다.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얼핏 지섭의 어깨를 맞고 튕겨 나간 것 같기도 했다.

“저는 괜찮……읏.”

도희가 지섭의 어깨를 걱정스레 손으로 만지자, 지섭이 돌연 짧은 신음 소릴 냈다. 그 모습을 본 지섭의 매니저가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천천히 지섭을 일으켰다. 도희도 나영의 도움을 받아 유리 조각을 피해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스태프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무장갑과 신문지, 빗자루 등을 이용해 주변에 흩어진 파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앗.”

제대로 발을 딛고 일어서자 도희의 발목 부근이 따가웠다. 아무래도 복숭아뼈 위쪽에 유리 조각 파편들이 박혀 있는 듯했다.

“왜 그래, 아파?”

놀란 나영이 소리치자마자 주변에 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도희에게 쏠렸다. 그 중엔 지섭도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지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섭은 매니저가 말리기도 전에 용수철처럼 튀어와 도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소독약 있으신 분 없어요?”

그는 마치 자신이 구급 대원이라도 된 양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지섭을 본 도희는 당혹감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지섭 씨. 난 괜찮아요.”

지섭은 오른쪽 어깨가 잘 올라가지 않는지 축 늘어진 손으로 도희의 바짓단을 정성스레 걷었다. 때마침 스태프 하나가 구급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지섭은 구급상자가 옆에 놓이자마자 상자 안에 있는 약품을 바닥에 와르르 쏟았다. 쏟아진 약품을 뒤지는 그의 손이 상당히 다급해 보였다.

“진짜 괜찮아요, 구급차도 불렀고…….”

“응급 처치만요.”

지섭은 제 손을 먼저 소독약으로 씻어 내더니 곧 도희의 다리 위로 식염수를 부었다. 그러더니 깨끗한 거즈를 꺼내 도희가 고통을 호소했던 부위에 거즈를 올렸다. 도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유난스럽게 치료하는 지섭의 태도에 어쩔 줄 몰랐다.

“나보단 지섭 씨가 더 아파 보이는데…….”

“전 괜찮아요.”

지섭은 도희의 상처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말투는 딱딱했지만, 상처 위에 올린 거즈를 테이프로 살살 붙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다른 데는요? 안 아파요?”

도희는 단호함과 다정함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지섭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 도희는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앞에서 맨다리를 쭉 뻗고 있자니 그 자세가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어깨는 괜찮나.’

도희 역시 지섭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등을 구부리고 도희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지섭을 보며 어쩐지 도희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119를 부른 지 십여 분만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 대원들은 도희 위에 붙은 거즈를 떼어 내고 다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고, 능숙한 구급 대원들의 손에 다리에 있던 유리 파편을 완전히 제거했다. 구급 대원들이 도희의 다리를 치료하는 동안에도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고,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 됐습니다.”

지섭이 떠민 덕분인지 생각보다 큰 부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지섭의 어깨였다. 당장 인대가 손상됐을지도 모른다는 구급 대원의 판단에 결국 지섭은 어깨를 고정한 채 구급차에 타야만 했다. 도희는 구급차를 타러 가는 지섭을 향해 쭈뼛쭈뼛 걸어갔다. 왠지 그가 크게 다친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도희는 거추장스럽게 어깨를 고정하고 있는 고정대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지섭은 특유의 맑은 미소를 보이며 웃어 보였다.

“선배님 탓 아닌데요. 저 때문이에요.”

“네?”

지섭은 도희 발목에 새롭게 붙은 거즈를 확인하더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활기차게 말했다.

“다행이라구요.”

* * *

구급차에 탄 지섭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진이 다 빠졌는지, 지섭은 구급 대원 옆에 얌전히 앉아 차 벽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젖히고 있었다. 매니저는 그런 지섭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을 꺼냈다.

“너 아까 완전 오버했던 거 알지?”

매니저는 지섭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그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매니저의 말에 지섭이 젖혔던 고개를 느릿하게 바로 했다.

“어? 알아 몰라.”

“…….”

지섭도 자신이 유난스러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심한 부상이 아닌데도 지섭은 과할 정도로 도희의 상처를 주시했다. 제 어깨에 둘려 있는 고정대가 훨씬 더 거추장스러운데 지섭은 마치 도희가 더 큰 부상을 입은 것처럼 그녀가 치료를 받는 내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당시엔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그가 하얀 조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순간 몸이 먼저 튀어 나갔고, 정신 차리고 나니 도희 위에 엎어져 있었다. 어깨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희의 허옇고 마른 다리에 어울리지 않게 흐르는 발목의 피가 더 걱정이었다. 상처가 남진 않을까, 지섭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괜찮겠죠.”

“네, 괜찮으실 겁니다. 아무래도 X-ray를 찍어 봐야 알겠지만,”

“저 말고 백도희요.”

구급 대원의 말이 뚝 끊겼다. 지금 제 어깨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데 ‘백도희’라니. 열애설이 아니라고 기사 난 게 불과 몇 주 전인데, 구급 대원들은 지섭의 질문에 그를 수상하게 바라봤다.

“하하, 지섭이가 워낙 착해서 주변을 잘 챙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지섭의 매니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둘러댔다. 구급 대원들은 의심을 거둔 것처럼 보이진 않았으나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상처가 남진 않겠죠?”

“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경고한 내가 미친놈이지. 지섭의 매니저는 끝까지 대놓고 도희를 걱정하는 지섭의 태도에 자포자기한 듯 지섭에게 속삭였다.

“너 설마…… 진심 아니지?”

매니저의 물음에 지섭은 도로 차 벽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았다. 매니저는 탄식의 한숨을 내뱉었다.

지섭의 머릿속은 심플했다. 도희 몸에 상처가 남지 않으면 그거로 안심이었다. 도희의 상태를 확실하게 확인한 지섭은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철수 준비를 했다. 첫 촬영부터 사고가 났기 때문인지 촬영 팀의 분위기가 초상이었다. 조명 감독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나머지 스태프들도 배우들과 감독의 눈치를 보긴 매한가지였다. 그 많은 스태프들이 산만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어느 곳 하나 소란스럽지 않았다.

해는 어느덧 저물어 반쯤 몸을 가린 채 은은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도희는 조금 쌀쌀해진 저녁 공기에 카디건을 여며 쥐었다. 행여 또 다치기라도 할까 봐 도희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나영은 도희의 안색을 연신 살폈다.

“진짜 괜찮아? 그냥 같이 응급실 갈 걸 그랬나 봐.”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지섭 덕분에 크게 다치지 않은 도희는 굳이 응급실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유리 파편이 깊숙이 박히지도 않았고, 작은 유리 조각들을 제거하니 쓰라림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희는 촬영장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되도록 촬영장을 떠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향력 있는 지섭이 응급실에 실려 간 이상 곧 기사화되는 건 식은 죽 먹긴데 여기에 도희까지 함께 응급실을 가게 된다면 기사가 부풀려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도희는 이만 들어가서 쉬라는 김 감독의 말도 거부했다. 도희는 모두가 철수할 때 웃는 얼굴로 함께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촬영 분위기를 생각해 그럼 그렇게 하라고 했다.

큰일이 없으니 천만다행이었지만, 도희의 마음은 계속해서 불편했다. 지섭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장 해제를 시키는 지섭의 미소를 보며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청년이라고 하지만, 도희의 느낌은 달랐다. 영문 모를 열애설에 얽혀서 편견이라도 씌워져 있었던 걸까. 지섭의 말 한마디 한마디 속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단 느낌이 강했는데. 그렇게 여겼던 지섭이 자신을 감쌌다. 지섭을 만나고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았던 도희였지만, 점차 지섭을 의심하는 자신이 나쁜 것처럼 느껴졌다. 도희는 자신을 걱정하던 지섭의 진득한 눈빛을 떠올렸다.

정말 짝사랑이라도 하는 걸까. 한창 잘나가는 은지섭이, 이혼녀인 나를?

“진짜 뭐 없어요?”

도희는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뾰족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류라일이 어김없이 팔짱을 끼고 비딱하게 서 있었다.

“하, 나 피곤해.”

“아니, 제가 선배님 의심하고 그런 건 아니구요. 지섭 씨 하는 행동이 뭐랄까 좀 유난스럽긴 했잖아요.”

라일은 스태프들이 들리도록 교묘하게 아양을 떨며 말했다. 가뜩이나 가라앉았던 분위기라 그런지 라일의 낭랑한 목소리가 촬영장에 또랑또랑하게 퍼졌다.

“류라일 씨, 지금 도희가 좀 힘들어서요.”

라일의 시비에 평소 잘 나서지 않던 나영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러자 라일이 화들짝 놀라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지섭 씨 눈빛이 좀 애틋했어야죠. 아마 여기 있는 분들 다 그렇게 느꼈을걸요?”

안 그래도 머릿속에 복잡한 와중에 도희는 라일과의 문제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다. 도희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무시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우리 이제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우리한테만 살짝 알려 주시면 안 돼요? 둘이 진짜 뭐 없어요?”

“류라일 씨!”

도희를 대신해 나영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러자 라일은 깜짝 놀랐다는 듯 심장 위에 두 손을 곱게 올렸다.

“어휴, 매니저님이 선배님 닮아서 성격 괄괄하시네요. 아님 말구요. 근데 나중에 진짠 거 밝혀지면 우리 다 속은 기분이 들긴 하겠다, 그쵸?”

라일은 스태프들이나 조연 배우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 코끝을 찡긋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따로 없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그렇게 생각한 도희가 라일을 무시하고 자리를 피하려던 차였다.

“에이, 설마 백도희 씨가 그러겠어?”

카메라를 정리하던 김 감독이 큰 소리로 라일을 거들었다. 얼핏slakpw 듣기엔 능글맞아 보였으나 그 안에 의심을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도희와 나영의 표정이 놀란 듯 굳어졌다. 근방에 있는 스태프들도 김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린 걸 보면 단연 도희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닌 듯했다. 라일은 마치 게임에서 승리라도 한 듯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촬영장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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