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17화 (17/71)

17화 사고

그가 아닌가?

업체까지 같은 걸 보고 확신했는데, 1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그의 답장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뭐래?”

한참 동안 도희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자 나영이 물었다.

“아니라는데.”

“뻥 치시네!”

나영은 주완일 거라 확신하며 코웃음을 쳤다.

“괜히 민망하니까 그러지! 신경 쓰지 마!”

“혹시 모르니까, 대표님한테 물어봐 줄래?”

“뭐하러. 삼촌이었으면 나한테 미리 말했겠지!”

“그래도.”

도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영에게 부탁했다. 나영은 도희의 부탁에 확신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황재성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대표에게 전화하는 나영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나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발 앞코로 애꿎은 맨바닥을 콕콕 찧었다. 도희는 나영의 그 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커피 트럭 보낸 게 ‘진짜’ 그가 아니라는 걸.

“도희야……, 진짜 미안해. 삼촌이 보낸 거래.”

전화를 끊은 나영이 도희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도희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스워 보일 수 있는 건 둘째 치고,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마신 도희의 문자를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 없으니 더 그랬다. 마냥 나영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도희 역시 간식 차를 보낸 ‘익명’의 정체를 주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뭐가?’라고 물은 주완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커피 트럭을 누군가 익명으로 보냈는데, 당연히 당신인 줄 알았다고? 이혼 전에 보내던 업체랑 똑같아서 착각했다고?

[잘못 보냈어요. 미안해요.]

결국 도희는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잘못 보냈다기엔 주완과 연락하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가 믿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었다.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면 이 상황을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진짜 미안, 진짜 미안해!”

“괜찮아. 잘못 보냈다고 했어. 에라, 모르겠다.”

도희는 상황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으, 이 설레발이 문제지!”

나영은 조금 전까지 자기가 했던 말을 후회한다는 듯 제 입을 톡톡 치며 자신을 꾸짖었다. 나영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도희 역시 커피 트럭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 건 마찬가지였다. 도희는 문득 자신에게 이런 추측할 여지를 남겨 둔 대표님을 원망하며 물었다.

“대표님은 왜 그러신 거래?”

“그게…… SP엔터 이름으로 보내면 빤히 아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러셨대. 안 그래도 캐스팅 때문에 좀 그러니까. 대표님도 분위기 얼추 아시는 거지.”

“……그랬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도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완이 한국에 온 뒤로 도희의 무의식이 자꾸 자신을 주완과 엮으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도희는 그게 무엇이든 다신 주완과 엮는 실수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 * *

나영과 전화를 끊은 재성은 곧장 한숨을 돌리며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완이 부탁한 대로 자신이 보낸 거라고 하긴 했는데, 나영과 도희를 속이는 일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재성은 그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을 벌일 건지 궁금했다.

“네, 대표님.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긴 했는데, 이게 참…… 갑자기 이러시는 이유도 궁금하고…….”

-그냥 도희를 돕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겨우 커피 트럭 하난데요. 팬들이 조공으로도 할 수 있는.

“아니, 그래도 이게 좀…….”

-촬영장 분위기는 괜찮았습니까?

“아, 네. 물론입니다.”

-답례로 E엔터 이름이 필요하시거나 투자금 필요하실 때 언제든 말씀하세요.

“물론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저도 도희를 위한 거란 생각에 한 일이라서요. 괜찮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황재성 대표님 안목을 믿는 겁니다. 늘 그랬듯이요.

주완의 강건한 말투에 재성은 내심 어깨가 으쓱했다.

대표가 누군지 모르는 유령 투자 회사 E엔터테인먼트. 이곳은 3년 전부터 영화계에서 널리 알려졌다. 주주 하나 없이 돌연 등장해 독립 영화나 작품성 있는 영화를 위주로 투자하는 이곳의 대표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진짜 대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황재성 대표 하나뿐이었다.

재성은 도희가 이혼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도희를 뒤에서나마 돕고 싶다는 주완의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었다. 연예계에 치명적인 이혼녀 딱지를 붙여 놓고, 이제 와 뒤에서 돕고 싶다니.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들리시겠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이것뿐이고, 앞으로 제가 얼마나 더 도희를 도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절대 도희 앞엔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느 날 주완에게 구구절절한 메일이 한 통 왔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간곡한 메일을 받고 재성은 고민 끝에 하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당시 주완은 미국에 있다고 했는데, 메일 내용을 읽어 보면 한국엔 결코 들어오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 이게 얼마나 가겠나.’

재성은 당시 주완의 죄책감이 오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투자자도 없는 상황에 도희의 재기를 돕는 일이니, 잠깐이라면 하게 둬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무려 3년이나 계속될지 몰랐지만.

-티 나지 않을 정도만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CH그룹의 차남 차주완은 재성이 상상했던 재벌과는 다르게 늘 공손했고 재성을 예우했다. 무슨 사정인진 모르겠지만, 3년간 비즈니스를 하며 지켜봐 온 주완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반드시 있을 것만 같았고 어느새 그의 사정을 내심 응원하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게 바로 도희와 나영을 속이면서까지 주완의 비밀을 지켜 주는 이유였다. 어쩌면 두 사람에겐 비난받을지도 몰랐지만, 재성은 당장 도희가 여기까지 재기하는 데 주완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으로 삼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 * *

촬영이 계속됐다. 지섭과의 첫 대면 신은 야외 촬영이기 때문에 해가 저문 방향으로 조명 세팅을 다시 했다. 간식 차 덕분인지 촬영 팀은 다시 에너지가 넘치는 분위기로 변했다. 지섭도 도희와 연기하는 게 신이 나는지 다른 신을 촬영할 때보다 더 신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지섭 실물 대박이네.”

“가만히 있어도 심쿵인데 왜 저렇게 웃는대? 웃는 게 무기다, 무기.”

“저번에 같이 작업했던 내 친구는 은지섭 싸가지 없다던데, 아닌가 봐. 오늘 대기 시간 동안 짜증 한번 없이 잘 기다리지 않았어?”

“그러게. 오늘 하루 종일 웃기만 하던데.”

메이크업을 먼저 마친 도희가 대본을 보고 있던 때였다. 지섭의 메이크업을 마치고 돌아서는 스태프들의 수군거림이 도희의 귀까지 들려왔다. 도희는 안 그래도 어딘가 꺼림칙한 지섭에 대해 궁금해하던 찰나라 그런지 눈으론 대본을 보고 있지만, 신경이 자꾸만 제 뒤쪽으로 쏠렸다.

“혹시 그 소문 진짜 아닐까?”

“무슨 소문?”

“왜, 있잖아. 열애설.”

작게 말한다고 속닥거리긴 했지만, 거리가 가까운지 도희 귀에 ‘열애설’이란 글자가 똑똑히 꽂혔다.

“에이, 야. 마케팅이라잖아, 마케팅.”

“그래, 요즘 일부러 노리고 열애설 터트리기도 한다더라.”

“아, 아닌데. 은지섭 촬영장에서 저렇게 호락호락한 이미지 아니랬는데.”

의문을 거두지 못한 스태프의 혼잣말이 작게 흩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도희는 대본에서 눈을 떼곤 자신의 맞은편 멀리에서 의상 체크를 하는 지섭을 바라봤다. 지섭은 회색 야구잠바에 맨투맨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까지 극 중 수수한 대학생 이지환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해 있었다.

‘혹시 정말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스태프들의 말에 도희는 묻어 뒀던 의심의 꽃을 다시 피워 냈다. 그녀는 지섭의 얼굴에 풀지 못한 암호가 쓰여 있기라도 한 듯 그의 낯빛을 꼼꼼히 살폈다.

얼마나 지섭을 보고 있었을까. 시선을 느꼈는지 지섭의 시선이 돌연 도희를 향했다. 그는 친근함의 표시를 하듯 도희를 향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도희는 지섭의 미소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홀로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도희가 지섭을 빤히 보고 있자,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는 그의 입매가 의아함으로 내려갔다. 도희는 진지하게 변하는 지섭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곤 뒤늦게 그에게 시선을 뗐다.

“하이, 큐!”

감독의 촬영 지시가 떨어지고, 카메라가 도희와 지섭의 투 샷을 잡았다. 스태프들은 도희와 지섭에게 집중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얼마나 잘 맞느냐에 따라 드라마의 시청률 자릿수가 바뀌니 그럴 만도 했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혀 있는 사이, 세팅을 다시 한 조명 하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태양 대신 높게 치솟은 조명 하나가 나사 하나 툭 빠져 있는 상태로 기다란 거치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으나,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촬영이 시작됐다.

셰어 하우스 앞을 지나가던 지환이 멈춰서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신발 끈을 묶는다. 지환의 바로 옆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정체불명의 쓰레기봉투 하나가 놓여 있다. 때마침 전단지를 돌리고, 집으로 들어가려던 수향은 신발 끈을 묶고 있는 지환과 그 옆에 놓여 있는 쓰레기봉투를 발견하곤 눈을 부라린다.

“저기요!”

지환이 고개를 들면, 그 앞에 수향이 씩씩거리며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지환이 천천히 무릎을 일으킨다.

“쓰레기 여기에 버리는 거 아니거든요?!”

“네?”

“쓰레기! 저거! 엄연히 지정된 공간이 저기! 떡하니 마련돼 있는데, 그 몇 발자국 가기 귀찮아서 여기다 쓰레기를 버려요?”

“네? 아니, 저, 그게 아니라요.”

“신발 끈 묶고 있었다! 잠시 놓아둔 거다! 뭐 그런 핑계 대지 마세요! 내가 여기 몇 주 있어 보니까 상습범인 것 같은데, 아주 딱 걸렸어!”

“아니, 저기요. 저 쓰레기 둔 적 없고요. 여기서 제집은 한참 멀거든요. 제가 왜 여기까지 쓰레기봉투를 들고 옵니까.”

“어머, 어머! 젊은 학생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어, 어??”

도희가 연기를 하는 도중 누군가 하늘을 보며 외쳤다. 촬영이 끊어진 건 물론이고, 좋았던 공기 흐름까지 흐트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누구야?!”

촬영이 끊어지자마자 김 감독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 소리에 놀란 스태프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지자 도희와 지섭의 바로 위에서 삐걱삐걱하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도희와 지섭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해 꽂혔다.

“야야, 저거 뭐야! 치워!”

그렇게 김 감독이 조명 감독을 툭 치는 순간이었다. 조명을 받치고 있던 감독의 팔이 삐끗 엇나가면서 조명을 받치고 있던 거치대가 크게 흔들렸다.

“비켜!!”

쨍그랑-!

조명 감독의 큰 소리와 함께 조명이 바닥을 향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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