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익명의 간식 차
쨍쨍한 여름날, 촬영이 시작됐다. 몇 주 전, 주완에게 술주정과 비슷한 전화가 오긴 했지만, 다음 날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로 보아 주완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장담했다. 그와 최대한 말을 섞고 싶지 않은 도희는 주완에게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해 달라는 말도 생략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힘들다……. 괴로워, 도희야.’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 있었다고……. 내가 얼마나,’
갑작스레 애절하게 부른 이름도, 애끓는 그 목소리도 다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와중에도 같이 있던 건,
‘죄송해요, 잘못 걸었네요.’
또 그 여자였으니까.
그렇게 없던 일로 넘긴 술주정은, 정말 없었던 일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희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차라리 잘됐다며 달랬다. 그가 설사 이제 와 사과를 한다고 한들 받아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희의 아픔은 한낱 취중 진담으로 풀어놓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일하자, 일!’
도희는 주완이 괘씸했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촬영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희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예나 지금이나 연기뿐이었다.
첫 촬영은 바로 극 중 수향이 할머니인 진종선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수향은 십 년 동안 해 오던 분식집을 정리하며, 셰어 하우스를 개업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할머니와 마찰해야 했다.
첫 촬영부터 가족과의 마찰 장면이라니. 도희는 종선과의 신이 너무나도 긴장됐다. 아무래도 이전에 싸늘했던 종선의 태도 때문인지 극 중 끈끈해야 하는 할머니와의 신을 망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첫 촬영이라 그런지 촬영장에는 서 작가를 비롯해 촬영 없는 몇몇 배우까지 나와 있었다. 아마 그중엔 도희의 연기를 평가하려는 눈도 많으리라. 그 속엔 라일과 지섭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희는 첫 촬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스캔들 때문에 갑작스레 캐스팅된 도희를 못마땅해하는 배우가 많았다. 많은 배우들, 특히 종선의 눈치가 보였다. 예전이라면 잘 주눅 들지 않는 도희였지만, 긴 공백기와 이혼녀라는 딱지가 도희를 작아지게 했다. 도희는 기죽은 모습을 티 내지 않고 김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여기 이 씬 감정선 격하게 갈까요?”
조용히 묻는다고 물었는데, 도희의 질문 한마디에 촬영장의 분위기가 싸하게 내려앉았다. 김 감독은 이런 걸 왜 묻느냐는 듯 도희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느끼는 대로 해요, 느끼는 대로.”
촬영은 감독님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김 감독은 배우들에게 감정선을 맡기는 쪽에 속하는 듯했다. 도희는 더 자세히 질문할 수 없었다. 대본 리딩이 끝나고 미리 나온 4회차 대본을 닳도록 보고, 밤새 분석한 도희였지만 오랜만에 하는 드라마라 그런지 긴장감이 계속해서 고조됐다. 종선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대본을 뚫어져라 읽는 도희를 조용히 응시했다.
“자, 촬영 시작합니다.”
도희는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수향의 셰어 하우스를 할머니에게 어린아이처럼 소개했다. 종선은 낡고 허름한 차림으로 수향의 셰어 하우스를 천천히 둘러본다. 현관, 거실, 방, 화장실까지 모던한 인테리어로 잘 꾸며진 셰어 하우스를 수향은 자랑스럽게 뽐냈다. 그러나 신이 난 수향에게 할머니는 딱 한 마디 한다.
“너 편하려고 하는 건 아니고?”
“아니라니까 할머니. 요즘 사람들 셰어 하우스 좋아해! 외롭고 힘드니까, 팍팍한 원룸보다는 이런 셰어 하우스를 더 많이 찾는다구.”
“……그래, 분식집이 보통 장사가 아니긴 하지.”
“응, 할머니. 이거 하면 나 할머니 집도 많이 갈 수 있고…….”
“대신 돈을 덜 벌지.”
“아니라니까! 이거 할머니 월세 받는 거야. 건물주랑 똑같은 거라구.”
“사람들이 안 모이면? 인생은 새옹지마야. 네가 고생을 덜 하면 그만큼 더 손해를 보게 되어 있어.”
“할머니, 할머니 내 장사 초 치러 왔어?”
“요즘 것들은 편한 것만 좋아해서 쯔쯧…….”
“할머니!”
철없는 수향은 결국 할머니에게 소리를 치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할머니는 수향을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다.
‘넌 운도 좋다, 얘.’
덤덤하게. 분명 덤덤하게 봐야 하는데, 종선의 눈빛은 도희 눈에 그렇지 않아 보였다. 도희는 모든 걸 다 통달한 사람처럼 수향을 노려보는 종선에게 환멸감이 들었다. 리딩이 끝나고 종선이 했던 한마디를 다시금 듣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아? 내가?
“편하지 않아, 편하지 않다구! 나 힘들 만큼 힘들어 봤어. 부모도 없이 열심히 돈 모아서 새로 시작하려는 것뿐이잖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여기까지 다시 왔는데.
“남들보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냥 좀 응원해 주면 안 돼, 할머니?”
말을 할수록 도희는 수향이 자신과 같이 느껴졌다. 가진 것 없이 소속사에 들어와 일 년간 아득바득 배워 열아홉에 겨우 데뷔. 정상까지 올랐다가 이혼으로 모든 걸 잃고, 이혼 후 촬영장에서 겪었던 멸시와 달라진 대우 그리고 카메라 공포증까지. 제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치자 눈물이 절로 그렁그렁 맺혔다. 누군가에게 응원받고 싶은 마음, 어차피 세상은 혼자고 응원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수향의 대사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도희의 얼굴에도 종선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부모가 없구나, 부모가 없어.”
할머니의 말에 수향은 허탈한 얼굴로 눈물 한 방울을 톡 떨어트렸다.
그러자 촬영장 곳곳에선 숨죽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드라마는 화면 각도 때문에 여러 번 끊어 가기 마련인데, 김 감독 역시 한 번도 컷을 외치지 않고 있었다.
도희는 촬영을 이어 갔다. 다음 장면은 눈물을 씩씩하게 닦아 내고 돌아서는 할머니에게 다짐하듯 소리치는 수향의 대사였다.
“보여 줄게! 내가 얼마나 잘사는지 보여 준다고! 할머니 때밀이 일도 내가 그만두게 할 거야!”
수향의 외침에 종선이 뒤를 돌아보고, 그제야 감독의 손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컷!”
드디어 첫 신이 끝났다. 컷 소리가 촬영장에 울려 퍼지자마자 도희는 억눌렀던 울음을 토해 내며 훌쩍거렸다. 종선은 그런 도희를 흘겨보듯 보곤 모니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영은 도희에게 달려와 휴지를 건넸다. 나영의 등 뒤에는 지섭이 서 있었다.
“잘했어! 다들 백도희 NG 없다더니 그 소문 진짜냐고 그러더라!”
나영의 호들갑에도 도희는 침착하게 감정을 정돈했다. 자기 연민에 빠진 도희는 그 안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선배, 괜찮으세요?”
지섭은 무언가를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도희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도희는 자신이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다시’ 잘 해낼 거예요.”
“뭐?”
의미심장한 지섭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도희가 지섭에게 되물으려던 순간, 모니터링을 하던 김 감독이 도희를 불렀다.
“바스트만 따고 넘어갑시다!”
아침에 시작한 촬영은 오후 6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정오가 넘어가면서 땅에선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셰어 하우스를 비롯해 그 주변 상가들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통에 스태프들은 이미 반팔 티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야외 촬영과 실내 촬영을 번갈아 가며 하긴 했지만, 연달아 진행되는 드라마 촬영은 누구에게나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가장 촬영 분량이 많은 도희 역시 더위에 지쳐 갔다. 신마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는 게 여간 진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도희는 다음 촬영을 위해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 이번에 찍을 신은 지섭과의 첫 대면 신이었다. 지섭과 셰어 하우스 앞에서 만나는 장면을 준비하던 그때, 조감독이 황급히 도희 쪽으로 달려왔다.
“백도희 씨, 간식 차 왔는데요!”
“네?”
“누가 보냈는데요?”
팬클럽에서 보냈다면 사전에 나영에게 통보가 왔어야 했다. 이번엔 나영이 들은 게 없다는 듯 조감독에게 되물었다. 조감독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와 보라는 말만 했다. 도희와 나영은 조감독을 따라 촬영장 테두리 밖으로 나갔다.
촬영장과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엔 청량한 푸른빛을 띤 꾸며진 커피 트럭이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 트럭 상단엔 도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그려져 있었고, 커피 트럭 옆까지 도희 얼굴이 그려진 입간판 위에 ‘백도희 첫 촬영 화이팅 -익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익명?”
“누구야 대체?”
도희와 나영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앞에 섰다. 커피 트럭 메뉴는 무척 다양했다. 커피와 각종 음료는 물론이고 팥빙수와 과일 빙수, 망고 빙수, 멜론 빙수에 간식으로 와플까지 겸비되어 있었다. 점심을 김밥으로 간단하게 때운 촬영 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간식 먹고 합시다!”
커피 트럭을 발견한 김 감독이 외쳤다.
“도희 씨 고마워요!”
사전에 협의된 간식 차가 아니었음에도 김 감독 역시 허기가 졌는지 간식 차의 등장이 썩 기쁜 듯했다. 무더위에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신이 난 촬영 팀이 하나둘 커피 트럭 앞으로 가 줄을 섰다. 도희는 그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스태프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스태프들 뒤로 다른 배우들 역시 줄을 섰다. 고된 촬영에 지친 배우들도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는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도희와 한 번도 말을 섞은 적 없는 조연 배우들조차 도희의 얼굴이 박힌 홀더를 손에 쥔 채 도희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선배님,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역시, 백도희 선배님이네요.”
조연 배우들이 지나가고,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라일이 도희 앞에 서서 얄밉게 한마디 했다.
“선배님 어딜 가나 튀는 건 여전하네요.”
비아냥거린 게 확실했지만, 도희는 질투하는 라일을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대체 누구지? 도희는 한 번도 간식 차를 익명으로 받아 본 적 없었을뿐더러 주변엔 익명으로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없었다. 팬클럽도 아니고, 대표님도 아니라면 대체 누가…….
그때, 도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불가항력으로 떠올랐다. 늘 도희가 촬영할 때마다 밥 차니, 커피 트럭이니 보내오던 한 사람. 바로 차주완이었다.
‘설마…….’
도희는 주완을 떠올리면서도 그 생각을 스스로 부정했다.
“선배님, 인기 많으시네요.”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도희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지섭이 빙수 하나를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선배님은 안 드세요?”
지섭은 함께 먹자는 듯 수저 하나를 도희에게 내밀었다.
“아, 저는 커피만.”
도희는 지섭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커피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들면서도 도희는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었다. 홀더에 박힌 제 사진을 보면서도 여전히 얼떨떨했다. 그때, 망고 빙수를 한 손에 든 나영이 도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설마, 그 사람은 아니지?”
나영의 질문에 도희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뜨끔했다. 그러자 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야? 진짜 그 자식이야?”
“나도 몰라.”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도희의 머릿속에도 나영과 같은 추측이 끈질기게 떠나질 않았다. 나영은 생각에 잠긴 도희를 보며 노발대발했다.
“이런 거 확실히 해야지! 지가 뭔데 이제 와서 너한테 이런 걸 보내? 무슨 낯짝으로!”
“망고 빙수 손에 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도희가 흥분한 나영에게 말하자 민망해졌는지 망고 빙수를 든 손을 뒤로하며 말했다.
“이, 이건 이거고! 어쨌든! 사전에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이거 분명 그 사람 같은데? 예전에 보내던 업체랑 똑같잖아!”
나영의 말에 도희는 그제야 커피 트럭 업체를 확인했다. ‘더 우먼 푸드트럭’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아하니, 익명의 정체가 주완이란 추측에 근거가 더해졌다.
“보내지 말라고 해! 이런 거 하나도 안 달가우니까 신경 끄라고! 대체 무슨 생각이야? 미친 거 아니야?”
말과는 다르게 목이 말랐는지 나영이 망고 빙수를 크게 떠먹으며 말했다. 도희는 그 모습이 귀여워 그만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웃을 때가 아니야. 앞으로 너한테 계속 이렇게 보내면 어떡할 건데! 익명이 대체 누구냐고 하면 뭐라고 할래.”
“……그러게.”
“한 번이야 그렇다 치고, 앞으로 계속 이러면 나도 곤란해. 확실하게 선 그어. 네가 좀 그러면 내가 할까?”
도희는 또다시 그와 연락하는 게 꺼림칙해서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지만, 나영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익명으로 오는 게 이번 한 번뿐이라면 다행이지만, 자주 반복되면 분명 이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날 게 뻔했다. 도희는 쓸데없는 소문은 질색이었다.
“내가 할게.”
“번호 알아?”
“응.”
단출한 대답에 나영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도희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얼마 전에 연락 온 연락처를 뒤져 보면 있겠지. 도희는 몇 주 전 걸려 왔던 낯선 번호를 통화 목록에서 찾아내, 메시지 보내기를 눌렀다.
[이런 거 보내지 마세요.]
참 간결한 경고였다. 도희는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도로 넣으려던 순간이었다.
[뭐가?]
1분도 안 되어, 그에게 답장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