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잘해 주고 싶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도희는 주완과 헤어지며 그에게 전화 올 것을 대비해 번호를 바꿨었다. 전화를 걸지 못하게 만들어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안 받아?”
나영이 재촉하듯 묻자 도희가 홀린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도희가 핸드폰을 천천히 제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도희야.
“……!!”
도희는 뜬금없이 저를 부르는 주완의 애틋한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지섭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듯 도희를 매서운 눈초리로 주시했다.
-힘들다……. 괴로워, 도희야.
주완이 부른 제 이름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메아리쳤다. 말이 늘어지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거로 보아 술을 마신 것 같기도 했다.
“……술주정은 다른 데서 하세요.”
-사정이 있었어. 사정이 있었다고……. 내가 얼마나,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며 주완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동시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뭐야, 아직 안 끊겼어? ……죄송해요, 잘못 걸었네요.
혼잣말인지 통보인지 모를 여자 목소리로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도희는 허망하게 끊어진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도희의 귀에서 당당한 여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아, 손님이 계셨네요?’
3년 만에 듣는 목소리인데.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 도희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미국에 가서도 계속 만나고 있었던 거야?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건가? 사랑싸움이라도 한 거야? 그사이에 날 이용한 거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심장이 다시금 쿵쿵 뛰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3년 만에 술에 취해 전화 한 것도 황당한데, 그 전화를 그때 그 여자가 끊었다는 게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다시 전화를 걸어 당신 누구냐고, 연인이라면 주완 씨 관리나 제대로 하라고 따지…….
아니, 그것도 웃기다. 전남편의 애인에게 그런 우스운 경고라니.
“선배, 얼굴이 빨개요.”
도희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옆에 있던 지섭이 도희 이마에 손을 얹었다. 도희는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툭 쳐 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안색이 변하셔서.”
지섭은 도희의 경계에 손을 얼른 치웠다. 도희는 지섭의 순수한 눈동자를 잠시간 보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미안한데, 나영아 먹고 와.”
“왜, 무슨 일인데!”
나영은 도희의 낯빛을 걱정하며 큰 소리로 다그쳤다. 그러자 도희가 평소와 같은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별일 아니야. 체할 것 같아서 그래.”
체할 것 같다는 한마디에 나영은 발신자가 ‘순자’가 아닐까 지레짐작하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데려다줄게.”
“됐어. 먹고 와. 택시 타고 갈게.”
나영은 거의 반강제로 자리에 앉았다. 도희는 나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꾹 누른 채 지섭과 그의 매니저에게 인사했다.
“미안해요, 다음엔 내가 밥 꼭 살게요.”
“……꼭이요.”
실망한 지섭의 표정이 꼭 풀 죽은 강아지 같아서 마음에 걸렸지만, 고기 냄새를 더 맡기만 해도 체할 것 같은 도희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제정신이야?”
3년이 지나도록 윤선의 생김새는 변함이 없었다. 긴 생머리를 아래로 질끈 묶고, 그나마 바뀐 건 금테 안경을 벗어 던지고 렌즈를 낀 것뿐이랄까.
윤선은 정 비서의 도움으로 주완의 펜트하우스에 들어와 그의 만행을 보고 기가 찼다. 주완이 들고 있던 핸드폰과 연결된 번호를 보자마자 황급히 전화를 끊긴 했으나, 그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뭐라고 했는데. 어?”
넥타이를 엉망으로 늘어트리고 셔츠 단추까지 푼 그는 이미 술독에 빠진 모습이었다. 위스키를 얼마나 마셔댔는지 집안 곳곳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윤선은 씩씩거리며 창문을 모조리 열고 다시 소파에 늘어져 있는 주완 앞에 섰다.
“정 비서가 전화번호 알려 줬어요? 번호 바뀌었다며.”
“그게…… 절대 전화 안 하신다고 해서 일 년 전에 알려 드렸습니다.”
“일 년 전에 등록해 놓은 번호로 이제 전화를 걸었다고.”
윤선은 콧방귀를 뀌며 주완의 다리를 발로 툭 건드렸다.
“내가 너같이 말 안 듣는 놈 주치의나 하려고 의사가 된 줄 알아?”
윤선은 주완의 지독한 사랑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윤선은 주완의 유난스러운 사랑이 미련스럽게만 보였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자신만 생각하기도 바쁜데 늘 도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게 꼴사나웠고,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던 그를 꼴사납게 만든 도희가 싫어졌다. 치료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윤선은 설마 도희에게 돌아가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난 건 기쁜 일이지만, 애초에 병을 몰랐던 도희가 이혼 후 돌아온 그를 반길 리 없었다. 다시 돌아가길 원한다면 그 또한 평탄한 길은 아닐 게 눈에 훤했다. 그 사실을 주완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겨우 죽을 고비를 넘겨 살아나 놓고, 또다시 그런 미련한 선택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건들지 마.”
그런데, 제 몸은 생각지 않고 술을 마시고 퍼진 주완을 보자 윤선은 속에서 불이 났다. 목숨이 달린 수술을 미룬 것도, 결코 마시면 안 될 술을 입에 댄 것도. 예나 지금이나 모두 도희 때문이었다. 윤선은 차라리 주완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길 바랐다. 예전엔 시간이 약일 줄 알았는데……. 윤선은 미간을 찌푸리고 주완을 바라보다가 화가 나는지 그가 누워 있는 소파를 발로 툭 차며 버럭 소리쳤다.
“너나 나 부르지 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화가 난 윤선을 달래는 건 정 비서였다.
“죄송합니다. 그게, 저도 들어왔더니 이미 술을 드시고 계셔서 미처 말리지 못했습니다.”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윤선은 쩌렁쩌렁한 목청으로 소리쳤지만, 주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마 위에 팔을 얹은 뒤 모든 게 다 귀찮은 듯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채였다.
주완은 윤선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안 그래도 형에, 어머니에 효주까지. 갑갑한 일투성인데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에 주완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다름 아닌 순자에게서였다.
[전화를 안 받아서 문자 남긴다. 차 서방 경비실에 서류 봉투 하나 맡겨 뒀으니까 봐. 도희 얘기야.]
주완은 도희 이름이 거론된 이상 서류 봉투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경비실에 맡기고 간 서류 봉투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주완은 혹시 도희에게 협박하려고 또 자신을 이용하는 건 아닌가 불안했지만,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서류 봉투에서 두꺼운 다이어리가 하나 나왔다. 주완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이어리를 펼쳤다.
[2016년 4월 16일 토요일
우리의 결혼식. 제주도에서 처음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빨리 부부가 될 줄이야. 우리의 시간이 그대로 흘러 버리는 게 싫어서, 이곳에 작게나마 틈틈이 담아 보려 한다. 결혼식은 피곤했지만 성대했고, 떨렸고, 기대했던 것만큼 벅찼다. 버려진 자식이나 다름없던 나의 손을 잡아 준 그 사람에게 평생 잘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그에게 많은 걸 배운 나는 은혜를 입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첫 장을 보자마자 주완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음 걸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완의 손이 계속해서 뒷장으로 향했다.
[2016년 6월 20일 월요일
바다 보고 싶단 말에 바로 다음 날 동해를 보여 주는 남자라……. 깜짝 이벤트도 할 줄 아는 사람인 줄 몰랐네. 실제로도 기뻐하긴 했지만, 내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이 감동했다는 걸 알까. 내 최대의 행운은 바로 차주완이다. 그만 곁에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이보다 더 든든한 남자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앞부분은 전부 다 도희의 행복뿐이었다. 주완은 죄책감에 앞부분을 더는 보지 않고 종이를 뭉텅이째 넘겼다. 그러자 11월 다이어리가 나왔다.
[2016년 11월 05일 토요일
이제 주완 씨를 보기 힘들어졌다. 다이어리엔 넋두리가 늘었다. 가끔 이전 장들을 뒤져 보면 이전에 다정했던 주완 씨를 불러오고 싶을 정도다. 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지다니. 일이 바쁘니 이해해야지 생각하면서도 서운한 마음이 은연중에 튀어나온다. ……아니야, 마음 넓은 아내가 돼야지. 주완 씨는 내 곁에서 늘 편안했으면 좋겠으니까.]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결혼하면 원래 다 이런 걸까. 멀어진다, 그가. 영원할 것 같던 그의 사랑도 식는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 그럴 리 없다. 우린, 부부인걸.]
다이어리를 쓰는 기한은 점차 늘어났고, 중간중간 찢은 부분도 있었다.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는 부분도 있었고, 주완의 손을 다시 멈추게 한 건 다름 아닌 이혼 후 쓰인 다이어리였다.
[2017년 5월 19일 금요일
우리가 사랑하는 시간 동안 그는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만만해 보였을까. 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날이 갈수록 외로웠고, 시들어가는 내가 싫어서 끝을 냈는데 내 삶은 더 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보다 더 끔찍한 악몽이 있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그와 사랑하기 훨씬 전으로 돌아가서, 그와 마주쳤던 모든 우연을 끊어 내고 싶다. 이젠 차주완의 모든 것이 내겐 악몽이다.]
[2017년 6월 5일 월요일
살아 있을 이유가 있나? 배우 백도희도, 아내 백도희도, 엄마 백도희로도 서 있을 자리가 없는데……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굳이 이 고통을 견뎌야만 할까. 다 그만두고 싶다.]
주완의 눈에 실핏줄이 섰다. 주완은 눈을 꼭 감고 다이어리를 덮었다. 차마 그 뒤를 다 읽을 수가 없었다. 다 읽기엔 도희의 아픔이 주완에게 너무 컸다. 주완은 그간 외면하고 있던 도희를 떠나온 시간들을 생각했다. 주완은 미처 ‘엄마 백도희’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그저 도희가 자신과 헤어지고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그 충격을 가늠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동시에 주완을 짓눌렀다. 손대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주완은 찬장에 보관해 두었던 위스키를 꺼내 들어 연달아 3잔을 원 샷 했다. 그 역시도 힘겨운 시간 들을 견뎌 냈지만, 모든 건 다 자신 때문이었다. 아무 잘못 없는 도희에게 주완은 마지막까지 힘겨운 짐만 짊어 준 것 같아 지난 시간들이 새삼 괴로워졌다.
독한 술이라 그런지 식도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3년 동안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순간 머리가 핑 돌기도 했다. 그는 소파로 가 몸을 뉘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모든 건 다 엉망진창이었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했어.”
주완은 문득 도희가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버릇처럼 도희의 엔스타를 들어갔는데 사진 한 장이 태그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여러분들 덕분에 친해졌어요.]
사진 속 지섭과 도희는 나란히 얼굴을 붙인 다정한 모습이었다. 사진을 보고 있자니 주완의 머리에 피가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시간을 보니 불과 1분 전에 올린 게시글이었다.
지금 같이 있다는 건가? 내겐 이런 다이어리를 보내 놓고? 순자라면 이 다이어리를 몰래 보내고도 남았을 거란 추측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완은 점차 이성의 끈을 놓고 있었다. 생각은 점차 과장되어, 열애설 상대인 지섭과 도희가 함께 드라마를 찍으며 눈이 맞는 모습까지 단번에 떠올랐다. 열애설이 사실이 되고, 그렇게 몇 년 만난 두 사람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취기는 이성적인 주완을 감정적으로 몰아붙였다. 자격도 없는 줄 알지만,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주완은 남아 있는 위스키를 모두 마신 뒤 충동적으로 도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그러나, 도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완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겐 도희를 원망할 어떤 자격도 없다는 걸.
“힘들다……. 괴로워, 도희야.”
..“야, 차주완! 술 얼마나 마셨냐니까! 설마 이거 다 마셨어?”
윤선의 쩌렁쩌렁한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 주완은 지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미쳐. 일단 너 술 깨고 내일 당장 나한테 와. 알았어?”
윤선은 대답 없는 주완을 뒤로하고 정 비서에게 다시금 신신당부했다. 끝까지 잔소리하던 윤선은 결국 성질을 내며 문을 쾅 세게 닫고 나갔다. 정 비서는 주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혹시 열애설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안 되겠다.”
“……?”
빨개진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창백해진 주완이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주완이 혹여 쓰러질까 걱정하며 정 비서가 그를 부축하려던 찰나였다.
“잘해 주고 싶어.”
“네?”
“잘해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