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14화 (14/71)

14화 번호 알려 주세요

세 사람은 방송국 1층에 있는 카페에 둘러앉았다. 도희는 굳이 가겠다는 라일까지 “실력이 안 되면 연습이라도 성실하게 해.”라는 말로 성질을 돋워 제 앞에 앉혔다. 라일은 지섭의 눈치를 보며 못마땅한 기색을 겨우 숨기곤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같이 식사하셔도 좋을 텐데.”

지섭이 내심 아쉽다는 듯 말하자 도희가 선 긋듯 딱 잘라 말했다.

“식단 조절 중이라. 이해 좀 해 줘요. 너도 그렇지?”

라일이 얼마나 철저히 몸매 관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도희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라일은 도희의 말에 퉁명스럽게 “네.”라고 대답했다.

“궁금한 점이 뭐랬죠?”

도희는 곧장 본론부터 물었다. 그러자 지섭이 들고 있던 대본의 접어둔 부분을 펼쳐 도희 앞에 내밀었다.

“이런 질문하는 게 실례인 줄 아는데요.”

“괜찮아요, 말해 봐요.”

지섭이 머뭇거리자 도희가 관대한 어조로 지섭을 채근했다. 그러자 용기를 얻은 지섭이 대본을 좀 더 도희에게 가까이 밀었다.

“리딩 할 때요, 이 부분. 둘이서 술을 마시다가 ‘세상에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한순간만 있는 줄 아니.’ 대사 칠 때 지문이 (울먹이며) 인데, 선배님은 굳이 따지자면 (덤덤하게) 하신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하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도희는 의외의 날카로운 질문에 놀라며 지섭이 짚은 대본을 들여다봤다. 이 부분이라면 김 감독과 작가에게 리딩 전에 의도에 관해 묻고 고친 곳이었다. 설마 지섭이 이 부분을 바로 집어낼 줄은 몰랐는데……. 놀란 도희를 보며 라일은 여전히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지섭의 질문에 흥미가 생긴 듯 펼쳐 놓은 대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극 중 설수향이 고아잖아요. 때밀이 하시는 할머니 밑에서 대학도 못 가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겨우 집 한 채 사서 셰어 하우스를 해요. 그것도 남자랑. 채무 관계로만 따지면 설수향이 지환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잖아요.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많았겠죠. 근데 그걸 이제 막 들인 세입자에게 눈물을 보일 정도로 마음이 약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울먹임보단 다 지나간 고난을 곱씹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그게 지섭 씨가 말한 (덤덤하게) 가 되겠네요.”

꽤 긴 대답을 마치자 지섭의 입이 벌어졌다. 벌써 캐릭터 분석까지 끝냈냐는 듯한 경이로움의 눈빛이었다. 역시나 지섭이 조금 더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제가 이 뒤에 대사를 (안쓰러워서) 보다는 (씁쓸하게) 나 (공감하며) 치는 게 맞겠네요. 리딩 할 때 선배님이 하신 대사에 제 지문까지 덩달아 바뀐 느낌이었거든요.”

“지섭 씨가 그렇게 해 주면 좋죠. 그게 더 자연스러우니까.”

“근데 그거 선배님 마음대로 그렇게 바꿔도 돼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일이 신경질적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지섭의 놀란 눈이 라일을 향하자, 라일은 제 이미지를 생각해 목을 가다듬는 척하며 말투를 조금 더 상냥하게 바꿔 말을 이었다.

“아니, 뭐……선배님이 하시는 거에 토를 다는 건 아니구요. 지문 하나하나가 작가님이 다 의도하신 걸 텐데. 작가님 신인이라고 무시한다는 오해라도 살까 봐, 선배님 걱정돼서 그러죠.”

라일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다만, 도희가 김 감독과 작가에게 미리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도희가 라일에게 사정을 설명하려던 찰나, 지섭이 싸늘한 눈빛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라일 선배님, 혹시 ‘보헤미안 랩소디’ 보셨어요?”

“아니요. 영화예요?”

“네. 거기서 프레디 머큐리가 그래요. 실력 좋은 드럼, 기타, 베이스를 새로 모아 놨는데 자기가 치라는 대로만 친다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일은 지섭의 뜬금없는 질문에 짜증스레 되물었다.

“누구처럼 반대하지도 않고, 누구처럼 더 좋게 수정하지도 않고, 누구처럼 제멋대로 하지 않는다고요.”

“…….”

“전 도희 선배님 방식이 맞다고 생각해요. 틀리면 그때 작가님 말씀대로 고치면 되니까요.”

도희는 서글서글하게만 보였던 지섭의 단호함에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세 사람 사이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라일은 지섭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짓이기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지섭이 후배였지만, 라일은 지섭을 섣불리 대할 수 없었다. 지섭을 김 감독이 무척 어렵사리 캐스팅했다는 소문이 이미 자자했다. ‘아는 누나’가 흥행하고 나서 드라마는 물론이고 멜로 영화까지 시나리오가 책상에 산처럼 쌓였다는 지섭이 선택한 드라마. 김 감독은 ‘은지섭을 잡았다.’라는 것만으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그를 방송국에 한동안 무척 자랑하고 다녔다고 했다.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지섭은 악의가 없어 보이는 맑은 미소를 일부러 꾸며냈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식의 사과는 그 누구보다 라일이 잘 알고 있었다. 제가 하던 짓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라일은 지섭의 가식적인 사과를 받고 분했는지 어색하게 시계 보는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케줄 있는 걸 깜박했네. 먼저 가 볼게요.”

라일이 황급히 인사를 하고 멀어지자, 지섭은 놀란 도희를 바라보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끼어들어서.”

“난 괜찮은데, 지섭 씬 괜찮아요? 밉보일 것 같은데.”

도희에겐 라일이 그저 얄미운 후배였지만, 지섭에게 라일은 선배였다. 게다가 데뷔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지섭이 드라마 시작 전부터 선배를 가르치려고 들었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앞으로 행동을 더욱 신경 써야 할 게 뻔했다. 이 바닥의 소문을 지겹도록 경험해 본 도희가 진심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방금 보셨다시피 저 그렇게 무르지 않아요.”

지섭은 전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해사한 미소를 보였다. 전혀 기죽지 않은 지섭의 모습에 도희 역시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성공하겠네.’

“앞으로 잘해 봐요, 우리.”

“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앞으로도 종종 부탁드립니다.”

그제야 도희는 의심을 조금 거둬들였다.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지섭이 도희를 여자로 보는 것 같진 않았다. 도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동경 그 자체였다.

“그래요.”

물론 아직 확신할 순 없지만 말이다.

* * *

집에서 TV를 보고 있던 순자가 돌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녀는 대뜸 핸드폰에서 ‘차 서방’으로 등록된 번호를 찾았다.

“전화할 때가 됐는데.”

순자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길게 신호음이 갔지만, 주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성 안내 멘트가 나오자마자 순자는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순자는 주완이 도희에게 미련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젊었을 적부터 남자들을 수없이 겪어 본 순자의 직감이었다. 순자는 아련한 주완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골똘히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들쑤신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서랍에 놔두었던 다이어리를 하나 꺼내 들었다. 잘 보관된 다이어리는 예전에 쓸모가 있을까 싶어 도희 집에서 가져온 물건이었다. 순자는 다이어리를 펼쳐서 스르륵 넘기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지.”

순자는 다이어리를 옆구리에 곱게 끼곤 곧바로 집을 나섰다.

* * *

도희는 차에 타자마자 녹초가 되어 늘어졌다. 라일이 가고도 어찌나 질문이 많은지 지섭의 물음에 모두 대답한 도희는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대본 리딩이 끝나고 지섭과 대화까지 모두 마치고 나니 어느덧 밤 10시였다. 도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진동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나영이 말했다.

“밥 먹으러 갈래?”

“식단 조절해야 되는데.”

“촬영까지 시간 좀 있잖아. 먹자, 고생했는데.”

“……그럴까?”

도희는 결국 나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나영이 밴을 몰고 간 곳은 대치동의 한 갈빗집이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이곳은 주로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는데, 도희가 아주 잘 아는 곳이었다.

“너 여기 몰랐지. 여기 맛집이다?”

“…….”

도희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나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곳에 얽힌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구워 먹는 고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 정 비서가 알려준 곳인데, 연예인들 단골집이라네.’

‘와, 여기 안 그래도 오고 싶었는데!’

‘그래?’

‘응, 고마워요.’

하지만 감동은 거기까지였다. 처음 고깃집에 와 본 주완은 고기 굽는 방법을 몰랐다. 주완은 어설프게 고깃덩어리를 들곤 고기가 다 익기도 전에 고기를 잘랐고, 심지어 그 크기도 아주 컸다. 하는 수 없이 도희는 주완이 들고 있던 집게와 가위를 뺏었다.

‘됐어요, 내가 할게요.’

연예계 막내 시절부터 고기란 고기를 다 구워 본 도희는 능숙하게 고기를 굽고 잘랐다. 그 모습에 주완은 반한 듯 도희를 바라봤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모르는 당신이 바보거든요.’

‘고기 굽는 것도 섹시하네.’

‘누가 들어요!’

‘뭐 어때? 결혼한 사이에.’

..이혼하기 직전엔 그가 마음을 헷갈리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주완이 도희를 진짜 사랑할 때는 헷갈리게 한 적이 없었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늘 노력으로 보여 줬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도희가 헷갈렸던 그 순간엔, 주완이 도희를 사랑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땐 왜 그걸 몰랐을까.

“여기 갈비 3인분이요.”

나영의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가 고기를 가지러 가려던 찰나였다. 아주머니가 돌연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오랜만이네? 신랑은 안 왔어?”

3년 만에 온 곳이라 설마 했는데. 아주머니는 도희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나영은 울상이 되었다. 주완과의 추억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억울한 표정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감지했는지 아주머니는 대답 없는 도희를 두곤 주방으로 홱 들어가 버렸다.

“괜찮아. 아주머니가 TV를 잘 안 보시나 보네.”

도희와 주완의 결혼이 떠들썩했던 만큼 두 사람의 이혼도 당시엔 큰 이슈였다. 오히려 남편이 어딨느냐고 묻기보단 왜 이혼했냐고 묻는 무례한 아주머니들도 많았다. 도희는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며 주완과의 추억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치지직- 먹음직스럽게 고기가 익어 갈 때쯤 별안간 문에 달린 종소리가 울렸다.

“어? 선배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지섭이었다. 고기를 올리던 도희의 손이 그를 발견하곤 그대로 공중에 멎었다.

“어, 어…….”

집게로 고기를 집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전투적이었다. 하필 식단 조절을 핑계로 식사 제안을 거절했던 지섭을 고깃집에서 만나다니. 도희의 뺨이 당혹감에 붉게 물들었다.

“아, 어 그게…… 내가 식단 조절을 하려고 했는데, 대본 리딩 한 게 피곤했는지 허기도 좀 지고…….”

……말을 할수록 변명 같네. 도희는 곤란함에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지섭이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합석해도 돼요?”

“어? 어, 그럴래요?”

1초 만에 허락이 떨어지자 나영이 화들짝 놀라 도희를 쳐다봤다. 열애설 때문이라도 거절할 것 같았는데, 이슈에 민감한 도희가 흔쾌히 대답한 게 의외였기 때문이다. 반면 지섭은 도희가 허락할 줄 알았는지 준비했다는 듯 잽싸게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괜찮을까요?”

나영이 걱정스레 지섭의 매니저에게 속삭였다. 그러자 지섭의 매니저가 지섭의 눈치를 살피다가 말했다.

“저희가 같이 있으니 괜찮겠죠. 여기 고기 3인분만 더 주세요.”

도희는 제 옆으로 와서 앉은 지섭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식사 제안을 거절해 놓고 고기 먹는 모습을 현장에서 딱 걸렸으니 거절하긴 더 민망했다.

“선배님, 열애설 걱정되시면 아예 공개할까요?”

“뭘요?”

“SNS에. 원래 대놓고 공개하는 게 더 의심을 안 사는 법이잖아요.”

지섭은 제안하며 나영과 제 매니저에게도 허락을 구하듯이 눈빛을 보냈다. 도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억지 같기도 했지만, 일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드라마 홍보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요? 형, 저희 둘 찍어 주실래요?”

지섭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실천하려는 듯 자신의 핸드폰을 매니저에게 내밀었다.

“이래도 되나…….”

지섭의 매니저는 긴가민가한 얼굴로 핸드폰을 받아들였다. 도희도 얼결에 카메라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지섭이 의자를 당겨 도희 옆으로 바짝 붙었다. 샤워 코롱 같은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도희를 스쳤다. 지섭은 어느새 도희 뺨 바로 옆에서 닿을 듯 말 듯 얼굴을 대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찰칵 소리가 나자마자 지섭이 재빨리 사진을 확인했다. 도희 역시 제 사진을 힐끔 확인하려는데 지섭이 사진을 화면에서 지우곤, 다이얼 숫자 화면을 띄웠다.

“번호 알려 주세요. 사진 보내 드릴게요.”

“아? 네. 그래요.”

어쩐지 급속도로 다가오는 지섭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함께 일할 파트너의 번호를 모른다는 게 더 이상했다. 도희는 지섭의 사교성에 놀라며 떨떠름하게 번호를 찍었다. 정작 지섭은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 없어 보였다. 도희가 사진을 확인하자마자 지섭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도희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올립니다.”

신이 난 듯 지섭이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섭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희의 눈앞에 자신의 엔스타를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여러분들 덕분에 친해졌어요.]

짧고 간결한 문장이었으나 그 의미가 대단했다. 열애설을 다시금 부정하면서도 앞으론 친한 모습을 보더라도 의심하지 말란 내용이었다. 도희는 순진한 것 같지만 은근히 여론을 다룰 줄 아는 그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때, 지섭이 제 옆에 놓인 핸드폰을 빤히 들여다봤다.

“선배님, 전화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놓인 핸드폰을 보자 등록되지 않은 번호가 눈에 띄었다. 그 번호를 확인한 순간, 도희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누군데.”

나영은 흔들리는 도희 눈동자를 보곤 불안해져선 물었다. 굳어 있는 도희에게 모두의 시선이 꽂혔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도희는 낯설지만 익숙한 그 번호가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왜…….”

바뀐 게 아니라면 이 번호는, 바로 전남편 차주완의 번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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