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12화 (12/71)

12화 사정이 있었어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주완은 타오르는 눈빛과는 다르게 공손한 투로 말했다. 허 감독은 상황을 얼떨떨해하면서도 그가 재벌이란 사실, 또 도희의 전남편이란 사실에 긴장하며 알았다고 답했다.

두 사람이 촬영장 밖으로 사라지자마자 촬영장은 술렁대는 스태프들의 말소리로 가득 찼다. 그 속에서도 가장 호들갑을 떠는 건 다름 아닌 나영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 나도 모르겠어.”

두 사람이 나간 문만 넋 놓고 응시하던 도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나영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도희와 그들이 나간 자리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그녀에게 가까이 붙었다.

“회사에선 그렇다 치고 여긴 또 어떻게!”

“…… 그러게.”

도희는 분개한 나영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의 없이 중얼거렸다.

“연락 오고 그랬던 거 아니지? 저 자식이 너 다시 찾아오고 그랬던 거 아니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제 와서, 천하의 차주완이 왜?

도희는 잠시 엿들은 말 때문에 주완이 일부러 촬영장에서 감독을 데려갔다는 생각을 지워 냈다.

“어후, 안 그래도 허 감독 너한테 하는 꼴 보고 속이 뒤집어지고 있었는데! 저 인간까지!”

안 그래도 허 감독 때문에 흥분해 있던 나영은 주완의 등장에 더욱 분개하며 소리쳤다.

“괜찮아. 행여나 감독님한테 한 마디하고 그럴 생각하지 마. 알았지?”

도희의 단호한 경고에 나영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책임감 있는 도희의 모습이 좋은 나영이었지만, 톱의 자리에서 밀려나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감내하는 도희를 보고 있자면 무척 속상했다. 도희는 여전히 나사가 빠진 듯한 얼굴로 출구 쪽을 힐긋거렸다.

“너…… 괜찮아?”

도희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한 듯 물은 나영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만일 저 인간이 너한테 도움 주려고 여기 왔다고 해도 달라질 거 없어. 알지?”

“알아.”

나영의 신신당부에 도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답하긴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나영의 귀에 거슬렸다. 나영은 한 번 더 강조하며 말했다.

“정신 차려, 백도희.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뭐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그래.”

“투명 인간 취급해!”

그러려고 했는데……. 쉽게 될 줄 알았는데.

도희는 차마 나영에게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게.”

“바람 쐬고 올게.”

도희의 말에 따라나서는 나영을 도희가 도로 앉혔다.

“쉬고 있어.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멀리 가지 말고! 응?”

나영은 혼자 있고 싶다는 도희의 말에 무력하게 앉아선 걱정스레 말했다. 도희는 그러겠다고 하며 나영을 안심시킨 뒤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 * *

촬영장을 나와 복도를 얼마 걷지 않았을 때, 문이 살짝 열린 회의실 안에서 들려오는 주완의 목소리에 도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희는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드레스를 살포시 말아쥐고 벽 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저한테 투자하신다고요?”

“제가 아는 투자 회사가 있는데, 그쪽에서 감독님 시나리오에 관심이 있는 듯해서요.”

“아니, 어떻게……! 제 시나리오가 어떻게 그쪽에……! 아무도 제 영화 안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럼 그렇지. 역시 일 얘기였구나.

도희가 잠시라도 주완이 제 일에 관여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우곤 그 앞을 지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입니다.”

“네네, 말씀하세요!”

“도희, 잘 부탁드립니다.”

주완의 나직한 한마디에 도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도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온몸에 열이 올랐다. 사랑했던 그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 도희는 분명 그를 잊었는데, 고작 말 한마디에 심장이 반응하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네? 아, 네! 그럼요!”

도희는 대화가 끝나기 전, 얼른 그곳을 지나쳤다.

* * *

비상구 계단에 서서 도희는 벽에 몸을 기댔다. 드레스를 입은 채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갈 수 있는 곳이 비상구뿐이었다. 비로소 혼자 있게 된 도희는 머리론 그의 행동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주완의 말을 자꾸만 되풀이했다.

‘도희, 잘 부탁드립니다.’

왜 그랬을까. 안 그래도 다신 볼 일 없을 것 같은 전남편이 자신의 인생에 불쑥 나타난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운데, 이제 와 ‘이혼녀 백도희’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이라도 지려는 건지 궁금했다.

‘정신 차려, 백도희.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나영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알면서도 주완의 행동들이 자꾸만 도희를 흔들었다. 도희는 다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제 뺨을 툭툭 때렸다.

잘살고 있었고, 앞으로도 잘살 도희였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도희는 이제 더는 주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희는 주완에게 더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 와 자신이 먼저 낯선 여자의 존재를 들킨 것에 대해 손해 배상이라도 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그런 주완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도희는 가슴 한구석에 주완을 좋게 해석하려는 제 마음을 누르고, 그를 나쁘게 해석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노력은 다행히도 효과가 있었다. 오랜 생각 끝에 주완은 도희의 머릿속에서 다시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도희는 깊게 심호흡하며 당차게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비상구에서 나오자마자 도희는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주완을 발견했다. 도희는 이번만큼은 그와의 우연한 만남에 놀라워하지 않고 달려가, 그 앞에 당당히 섰다.

주완은 도희를 보자마자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며 발걸음을 멈췄다. 서로 모른 척하자더니 돌연 주완을 따라잡은 도희의 행동에 놀란 듯했다. 도희는 조금 전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내 일에 신경 꺼요.”

“내 일이었어.”

도희가 감독과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모르는 주완이 말했다. 도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느니, 그런 말 없이도 나 잘살아왔어요.”

“……!”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도희의 말에 주완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앞으로도 당신 없이 잘살 거고. 무엇보다,”

도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주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남이잖아요.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인가.”

매정한 도희의 말에 그의 눈에 힘이 풀렸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는 왠지 모르게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도희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괜한 오지랖 그만 부리라구요.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

주완은 충격을 받은 건지 도희의 가시 돋친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을 다 마친 도희는 속이 시원했다.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주완이 상처받은 얼굴로 멀거니 서 있는 모습이 찜찜하긴 했지만, 그를 동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렇게 주완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잘 지냈어?”

처음으로 들리는 주완의 다정한 물음이 도희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 목소리는 무심한 그가 잠시 달콤했던 신혼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오늘은 어땠어?’

‘나빴지. 당신이 없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럴 수 있으면. 넣고 다닐 거예요? 귀찮을 텐데.’

‘네가 귀찮게 해 줬으면 좋겠어. 매일매일.’

‘풉, 일 안 할 거예요?’

‘안 하고 싶지. 그냥 하지 말까?’

..“……힘들진 않았나?”

주완의 물음에 도희는 성대가 잠긴 듯 뻑뻑해졌다. 힘들었던 지난 세월 동안 다른 누가 아닌 주완에게 무척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괜찮냐고, 힘들진 않냐고. 그 질문을 3년이 지난 지금 들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던 도희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질문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 안 해요?”

“…… 사정이 있었어.”

주완이 이해를 바라는 듯한 말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사정’이란 단어 하나에 도희는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도희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사정은…… 누구나 있어요.”

도희가 떨리는 목소릴 간신히 붙잡고 말했다. 그녀는 잊고 있던 죄책감이 자신을 완전히 덮치기 전,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 * *

효주는 CH그룹 본가에 와 있었다. 효주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널따란 거실 한가운데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진주 장식이 달린 단정한 분홍색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효주는 턱선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단발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부현이 오길 기다렸다. 제 딴엔 얌전하게 기다린답시고 다소곳이 앉아 있긴 했지만, 무릎 위에 곱게 얹어 놓은 톡톡 튀는 검지가 효주의 불안정한 정서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담한 156cm의 키에 아담한 체구를 가진 반면 고양이처럼 확 트인 눈은 그녀를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강한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온몸에 명품을 휘두르고 있어 어딜 가나 주목받았고,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실제로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공주 대접을 받아 온 터라 자기중심적인 그녀는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친근하게 구는 유일한 사람들이 바로 CH그룹 식구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던 J그룹의 딸 장효주는 주완의 본가를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여동생이 없는 주완은 효주를 친동생처럼 챙겼고, 효주는 그런 주완을 무척 잘 따랐다. 주완이 도희를 만나기 전까진 효주가 주완에게 종종 소유욕을 부리기도 했는데, 도희와 결혼하면서 주완은 효주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효주는 도희를 무척이나 증오했다. 이를 부현에게 고자질했을 때 부현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했고, 그 이후 발길을 끊었었다.

‘이번엔 잘할 거야!’

효주는 주완의 이혼 소식을 듣자마자 다시금 부현과 따로 왕래를 시작했다. 처음엔 자신을 며느릿감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부현도 주완이 미국으로 떠나면서부턴 무슨 바람인지 정으로라도 주완의 마음을 잡아 달라고 부탁해 왔다. 효주로선 기쁜 일이었다.

물론 주완은 해외에 있는 동안도, 한국에 들어와서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효주는 여태껏 자신이 갖고 싶은 걸 못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토록 갖고 싶던 주완이 예쁜 언니랑 결혼할 땐 무척 속상했지만, 일 년 만에 이혼한 걸 보면 하늘은 제 편이 틀림없었다. 부현의 말에 따르면 3년 동안 만나는 여자는 없다고 했다. 효주는 이번에야말로 주완의 옆자리는 당연히 제 것이라고 믿었다.

효주는 부현이 오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부현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효주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주완이한테는 인사했고?”

“아뇨, 어머님.”

효주가 귀엽게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부현을 ‘어머님’이라고 부른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효주는 부현을 볼 때마다 그 호칭에 스스로 어색함을 느꼈다.

“그래도 효주한테 금방 전화해 줄 거예요.”

효주는 주완을 굳건히 믿는 듯 수줍게 덧붙였다. 주완이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3주째였다. 효주는 몇 번이고 주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주완은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실망하긴 일렀다. 주완은 언제나 효주에게 친절했으니까. 친절하지 않았던 건 백도희, 그 여자가 나타났을 때뿐이었다.

“그래, 자리는 내가 마련하마.”

부현의 말 한마디에 효주는 든든한 지원군이라도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도톰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수줍게 웃었다.

“정말…… 약혼하게 해 주실 거예요?”

“어디 내가 허투루 말하는 사람이니.”

부현은 효주에게 믿음을 심어 주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효주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본 부현은 고상하게 눈웃음을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이 일은 잘하는데, 여자 보는 눈이 없어서. 이번엔 내가 좀 나서야겠어. 효주 정도면 어디 내놔도 빠지질 않잖니.”

부현은 어렸을 적부터 봐 온 효주를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효주는 부현에게 더 충성하는 듯 눈을 반짝이며 주먹을 쥔 채 말했다.

“열심히 할게요!”

“너무 열심히 하진 말고. 그럼 남자가 도망간다?”

“네, 많이 가르쳐 주세요. 어머님.”

효주는 귀엽게 얼굴을 붉히며 부현에게 아주머니 대신 ‘어머님’이란 호칭을 힘주어 불렀다. 그 모습에 부현의 얼굴엔 만족의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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