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의 귀환-10화 (10/71)

10화 라이징 스타의 역습

아직 회사를 나가지 않은 주완은 건물을 나가기 직전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도희를 발견했다. 그녀는 아직 내려오지 않은 엘리베이터 층수만 바라보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서 있었다. 다행히도 도희는 주완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 덕에 주완의 시선이 도희에게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녀는 평소엔 온화한 분위기를 뿜어냈지만, 저렇게 상념에 잠겨 있을 때는 섣불리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다. 어쩔 땐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어쩔 땐 냉소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주완은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도희의 옆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그만 가셔야 합니다.”

정 비서는 도희와 또다시 마주치기 전 주완을 끌어내려는 것처럼 말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작은 얼굴에 큰 키를 자랑하는 남자는 멀리서 보기에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게, 한눈에 보기에도 배우 같았다. 도희를 보자마자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도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줄도 모르고, 황당한 표정으로 낯선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본부장님…….”

정 비서가 두 사람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주완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불렀다. 그제야 주완은 불쾌한 듯 눈을 홱 돌리며 말했다.

“가지.”

한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도희는 문이 열리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놀랄 사람 여럿 만나네.’

도희 앞에 떡하니 나타난 낯선 남자는 바로 자신의 스캔들 상대, 은지섭이었다. 놀란 도희와는 다르게 지섭은 백만 불짜리 미소라고 불리는 화사한 미소로 그녀를 반기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일면식조차 없는 그였지만, 열애설이 난 상대라 밤새 검색을 한 덕에 도희는 단번에 지섭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도희는 떨떠름하게 인사를 받았다. 왜 그가 SP엔터테인먼트에 있는지도 의아했지만, 하필 같은 회사에 있는 걸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연애설이 불거질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도희의 머릿속엔 오로지 더는 구설에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이 자리를 빨리 피해야 했다. 그렇게 도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지섭이 도희가 손을 뻗는 쪽으로 가로막듯 섰다.

“앞으로 SP엔터테인먼트에서 한솥밥 먹게 된 은지섭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지섭은 별안간 우렁차게 인사를 건네더니, 다시 한번 폴더처럼 허리를 접어 90도로 인사했다.

“하루빨리 만나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 그리고…… 열애설 때문에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는 다시 한번 열정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도희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지섭의 무례함에 기분이 상할 뻔했지만, 곧장 이어지는 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얼떨떨해져 말했다.

“아 그거야…… 지섭 씨 잘못은 아니죠.”

용서하는 듯한 도희의 누그러진 톤에 지섭이 활기차게 허리를 세웠다. 눈높이가 쑥 올라가자, 도희는 그제야 사진으로만 보던 지섭의 이목구비가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콧대는 높고, 입술이 얇아서 자칫 예뻐 보일 수 있는 인상인데, 골격은 시원스럽게 벌어져서 등을 기대도 좋은 대형견처럼 듬직하고 포근했다. 게다가 동글동글한 눈매가 친근함을 주는데 한몫해서 대중들에게 쉽게 각인될 만한 귀여움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섭은 자신의 이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갑자기 이렇게 뵙게 되어 당황스러운데……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희는 그런 지섭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도희는 그의 상냥한 눈매가 가늘게 휘는 것까지 놓치지 않았다. 아기처럼 생글거리는 미소가 가히 라이징 스타다웠다.

‘확실히 뜰 얼굴이네.’

도희는 직업병처럼 그의 외모를 대중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더니 곧장 정신을 차리고, 기자를 찾아 눈길을 돌렸다.

도희 역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지섭과 열애설이 터지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한 네티즌이 올린 추측 글은 하도 그럴듯해서 글에 올라온 추측처럼 열애설이 날 만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6. ㅇㅈㅅ 소속사 옮긴다고 함.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ㅂㄷㅎ 있는 SP엔터로 가면 게임 끝. ㅇㅈ?]

네티즌의 마지막 추측까지 맞아떨어지니 혹시 지섭이 일부러 열애설의 원인 제공을 한 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도희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에게 선을 긋듯 말했다.

“열애설이 더 불거질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단호한 도희의 말에 지섭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간 멈춰 있었다. 도희는 그런 지섭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가 무명 배우라면 모를까 한창 뜬 배우니만큼 상처받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켜 줄래요?”

“아, 네. 죄송……합니다.”

지섭은 날카로운 도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지섭은 도희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리곤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가 이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제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넘겼다.

“와…… 존나 섹시해.”

지섭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기 위해 제자리를 몇 번이고 빙빙 돈 후에야 건물을 나갈 수 있었다.

* *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도희는 재성에게 어떻게 사과할지 고민했다. 20층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건 다름 아닌 재성과 나영이었다. 재성은 도희를 보자마자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왔니.”

“대표님. 죄송합니다.”

도희는 들어가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먼저 공손한 사과부터 건넸다. 그게 지금 도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재성은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사과하지 마라. 네 잘못도 아닌데. 다행히 기자들 없었고, 본 사람도 몇 명 없어서 무사히 지나갈 것 같아.”

“……엄마가 또 오시면 어떡하죠.”

“그땐 우리가 알아서 막으마. 나영이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널 불러서 실수한 거야. 이번에 혼 좀 냈다.”

“도희야, 미안해…….”

나영이 시무룩해진 얼굴로 도희에게 사과했다. 도희는 나영의 사과를 받으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모든 게 순자 때문이었지만, 이 바닥에선 도희를 지키지 못한 나영이 충분히 질타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걸 알기에 도희 역시 대표 앞에서 나영의 편을 들지 않았고, 그 대신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앞에서 은지섭 배우 봤어요.”

“어? 만났어?”

“저희 소속사라던데.”

“응. 계약하기로 했다.”

열애설 난 상대와 계약이라니. 더군다나 이대로라면 네티즌이 예언한 대로 흘러가는 건데.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도희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도희는 말을 아끼는 대신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그를 눈치챈 재성이 설명을 이었다.

“열애설은 같은 소속사 계약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정리했어. 그나저나 이제 사람들 앞에 서는 거…… 괜찮은 거지?”

그녀가 카메라 울렁증을 어렵게 극복했다는 걸 아는 재성이 말했다. 엊그제 귀국하면서 기자들 앞에 섰을 때 멀쩡해 보였던 도희를 보며 재성은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지 몰랐다.

“괜찮아요.”

도희는 재성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직 완치된 게 아니라는 걸 아는 나영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다가 도희가 헛기침을 하자마자 얼른 꺼림칙한 기색을 숨겼다.

“네가 아직 구설에 오르는 걸 꺼린다는 건 알지만, 그 덕에 좋은 기회도 왔다.”

“기회요?”

재성은 조금 들뜬 얼굴로 종이 뭉텅이를 도희 앞에 자신 있게 탁 내려놓았다.

“읽어 봐.”

“이게 뭐예요?”

“드라마. SBC 월화 저녁 10시 편성. 죽이지.”

조금 전 착잡했던 한숨 소리가 무색하리만큼 재성의 얼굴엔 색다른 기대감이 내비쳤다. 도희는 반신반의하며 그에게 물었다.

“저한테 주연 자리가 들어왔어요?”

“응. 하자, 도희야. 이거 무조건 해야 해. 독립 영화 하다가 바로 드라마 하는 거 흔치 않은 기회야.”

“사전 제작이에요?”

“4화까진 어떻게든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많진 않아서.”

사전 제작이 아니란 말에 도희는 망설여졌다. 드라마가 좋은 기회라는 건 알지만, 다 찍고 나서 결과물을 보여 주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실시간으로 반응을 보며 연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도희는 아직까지 자신이 실시간 반응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전히 일은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아직까지 대중들의 질타에서 의연하게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도와줄게.”

나영이 도희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도희는 그간 나영이 제 옆에서 얼마나 함께 고생했는지 알고 있었다. 이혼 후 인지도는 떨어지고, 카메라 울렁증까지 생긴 도희였다. 과거 예능이고 광고고 다 잘린 데다가 겨우 잡은 예능마저 나갔다가 얼어붙는 바람에 방송국에선 완전히 망한 여배우 취급을 받았다. 모두가 도희를 포기했지만, 유일하게 도희를 포기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끌어올려 준 게 바로 나영이었다. 도희는 돕겠다는 나영의 말에 믿음이 갔다.

“작가가 신인이긴 한데 이 대본 작년에 SBC 대상 받은 작품이야. 캐릭터가 시원시원하고 좋아. 좋은 대본에 좋은 캐릭터 만나기 쉽지 않은 거 알지?”

재성은 망설이는 도희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도희는 재성의 감 역시 믿었다. 열여덟의 도희가 SP엔터테인먼트에 처음 들어왔을 때, 회사는 지하층을 포함해 고작 3층짜리 건물일 뿐이었다. 스러져가는 낡은 건물을 보곤 의심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아마 나영의 삼촌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재성은 볼수록 대표다운 면모를 많이 보였다. 작품을 보는 눈도 탁월했고, 연습 또한 효율적으로 진행했다. 그는 가치관도 훌륭했다. 배우 지망생들의 등골을 빼먹으려는 것보단 좋은 배우, 좋은 가수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 덕분에 도희는 열아홉이라는 이른 나이에 데뷔할 수 있었고, 그게 바로 강남 한복판에 SP엔터테인먼트 건물이 세워진 이유였다.

“……잘 모르겠어요.”

믿을 만한 두 사람이 가라는 길인데. 도희 역시 결단력 있게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사마다 달리는 악플이 도희의 선택을 가로막았다.

[위약금으로 잘 먹고 잘살더니 돈 궁해져서 독립 영화 찍었네ㅋㅋ]

[한물간 이혼녀를 왜 ‘칸’까지 데려감? 쓸만한 배우가 그렇게 없나.]

[이제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쉬는 김에 평생 쉬자.]

뭐 때문인진 모르지만, 이혼 후 도희의 악플은 급속도로 늘었다. 안색이 좋아 보이면 돈을 얼마나 들였냐고 비꼬았고, 행색이 초라하면 불쌍해 보이는 척한다며 비꼬았다. 이전엔 악플이 적기도 했지만, 악플 하나까지 관심으로 받아들였는데 현재 도희에겐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좋은 기회인 건 맞아. 너 독립 영화 하면서 드라마 주연 자리 한 번도 안 들어왔잖아.”

나영은 도희가 기분 상해할까 걱정하면서도 그녀에게 팩트를 말해 주기 위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 자리 처음부터 네 거 아니었어. 원래 다른 사람 내정되어 있었다가 얼마 전 실검 때문에 판 바뀐 거야.”

“실검?”

“응. 그게 상대역이…….”

나영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재성의 눈치를 살피며 뜸을 들였다. 그러자 재성이 나영의 말을 가로챘다.

“너만 오케이 하면, 은지섭.”

“네?”

도희는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재성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당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은지섭이 꼭 너랑 찍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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