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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귀환-8화 (8/71)

8화 왜 열애설이 났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의 130평의 펜트하우스는 청담동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근처에 주완의 본가가 있었지만, 회사와 30분 거리에 있기도 했고 부현의 간섭을 피하고 싶은 주완이 마련한 임시 거처였다.

주완은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뒤 펜트하우스 정원 의자에 앉았다. 펜트하우스 정원은 작은 수목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63빌딩부터 남산 타워까지 훤히 보이는 전망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다. 그는 펜트하우스 정원 아래 펼쳐져 있는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업무 통화를 이었다.

도어 록 카드를 가지고 있던 정 비서는 업무 보고를 위해 펜트하우스로 들어왔다. 각종 대리석과 고급 가전제품으로 꾸며져 있는 거실로 들어선 정 비서는 주완이 집 안에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곧장 펜트하우스 정원으로 올라갔다.

정원에 올라가자마자 주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통화 중이었는데 때마침 주완이 뒤를 돌아, 도로 나가려는 정 비서를 저지했다. 정 비서는 단호한 주완의 손짓 하나에 고개를 끄떡이고 그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주완에게 업무보다 중요한 건 정 비서가 아침마다 들고 오는 도희와 관련된 소식들이었다.

주완이 서둘러 전화를 끊자 정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배우 백도희 씨와 배우 은지섭 씨가 열애설이 났습니다.”

정 비서는 최대한 백도희란 배우를 모르는 사람처럼 감정을 싣지 않고 사무적인 투로 말했다. 주완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를 오랜 시간 봐 온 정 비서는 그의 심기가 뒤틀렸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설핏 긴장한 정 비서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보고를 이었다.

“투자 건은 말씀하신 대로 E엔터테인먼트 투자 회사로 계속 확장하는 중입니다. 신생 회사로 들어간 거라 아무도 CH그룹과 연관 있다고 생각은 안 할 겁니다.”

“사실인가?”

“네?”

주완은 투자 건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물었다. 정 비서는 다시금 ‘열애설’을 묻는 주완의 질문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 있게 대답을 이었다.

“아직 사실무근입니다.”

“그럼 왜 열애설이 났지?”

주완은 애꿎은 정 비서를 다그치듯 물었다. 정 비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블릿PC로 준비해 뒀던 화면 하나를 띄웠다.

“처음엔 일반인들 사이에 찌라시가 돌았답니다. ‘E군과 B양이 E군의 구애 끝에 서로 알아가기 시작했다. 3개월째인데 벌써 커플템만 십여 개가 넘고, 이미 해외여행도 함께 다녀왔다.’ 대충 이런 내용이고요.”

주완은 ‘구애’나 ‘해외여행’이란 단어에서 손가락을 움찔거렸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계속해.”

“찌라시가 퍼지기 전에 이미 한 네티즌이 여러 정황을 캡처해서 분석한 글을 포털 사이트에 올렸는데, 그게 이슈가 됐습니다. 보세요.”

정 비서는 준비해 뒀던 태블릿PC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익명으로 올라온 글 하나가 캡처되어있었는데, 제목은 [아무래도 의심되는 ㅂㄷㅎ랑 ㅇㅈㅅ]이었고, 이를 본 주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음만 써 놓은 이건 뭐지?”

“백도희, 은지섭입니다. 실명 거론하면 아무래도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어서요. 찌라시 돌기 전 올렸던 글인데, 찌라시가 돌고 스캔들까지 나면서 글이 여기저기 떠도니까 불안했는지 현재는 글쓴이가 원본을 삭제한 상태입니다.”

과연 그렇군. 주완은 납득이 가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캡처된 사진 속 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글 속엔 글과 사진이 적절히 어우러져 한눈에 읽기 쉽게 정리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ㅂㄷㅎ, ㅇㅈㅅ한테 악의는 1도 없음. 객관적으로 의심되는 정황들을 심심해서 나열해보려고 함. 둘이 뭔가 있는데, 그게 사귀는 건지 ㅇㅈㅅ 짝사랑인지 그건 애매하긴 함.

1. ㅇㅈㅅ 이상형

ㅇㅈㅅ이 뜨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보통 잘 모르겠지만, ㅇㅈㅅ 연극영화과 다닐 때부터 이상형 ㅂㄷㅎ라고 말하고 다님. 이건 그 학교에서 워낙 유명해서 K대학 나온 애들이면 다 안다고 함.

2. 해외 체류 기간.

ㅂㄷㅎ 2월~3월 중순. 두 번째 작품 끝나고 해외 간다고 했는데, 미국에 있다가 캐나다로 넘어감.

ㅇㅈㅅ 3월~3월 말. 같은 시기, 캐나다에 체류. 엔스타에 캐나다에 화보 촬영 갔다고 함. 어디 화보 촬영인지 아무도 모름. 사진도 안 올라왔으니…….

3. 커플템.

3-1. 하얀색 같은 디자인의 나이스 운동화를 신고 귀국함.

3-2. 둘 다 스티치 폰 케이스 (엔스타에 올라온 거울 셀카 참고)

3-3. 얼마 전 예능에서 ㅇㅈㅅ 끼고 나온 반지, ㅂㄱㅎ 엔스타에서 봄.

4. 버릇

내가 그렇게 보기 시작해서 그런 진 모르겠는데 ㅂㄷㅎ는 말하다가 가끔 곤란할 때 턱을 엄지로 매만지는 버릇 있음. 그걸 ㅇㅈㅅ이 똑같이 함. 연기할 땐 안 그러는데 저번에 인터뷰하는 거 봤더니 그러더라. 연기할 땐 안 그러고 말할 때 그러는 것도 똑같음. 원래 사랑할 때 닮는 거 아니겠음?

5. 하루 이틀 텀으로 중복되는 엔스타 사진.

ㅂㄷㅎ가 다녀온 레스토랑이 다음 날 ㅇㅈㅅ 엔스타에 올라옴. 매번 그러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본 것만 올해 겨울부터 5번은 됨. 썸 탈 때부터라고 생각하면 얼추 기간 맞음.

6. ㅇㅈㅅ 소속사 계약 만료.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ㅂㄷㅎ 있는 SP엔터로 가면 게임 끝. ㅇㅈ?

혹시 이것 말고도 다른 정황들 있으면 또 추가해서 올릴게. 물론 내 뇌피셜이니까 무조건 맞다는 건 아니야! 아직은 정황들이 연애가 아니라 ㅇㅈㅅ 짝사랑 느낌에 가까움. 아니면 ㅇㅈㅅ만 ㅈㄴ 티 내고 싶어 하거나…… 이게 진짜면 ㅂㄷㅎ는 또 세기의 커플이 되겠네. 한창 주가 높은 ㅇㅈㅅ이랑 열애라니, 어째 연애할 때마다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긴 한데. 결론은 둘 다 행쇼해라. ㅋㅋ]

주완은 꽤 긴 글들을 모두 읽은 뒤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좀 있네.”

“아, 이게 해석을 해 드리면…….”

“됐어.”

주완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태블릿PC를 정 비서에게 건넸다. 정 비서는 도희의 열애설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그의 시기 어린 얼굴을 눈치채곤 얼른 다른 보고를 읊었다.

“오늘 오후에 E엔터테인먼트 투자 관련으로 SP엔터 대표님과 미팅이 있으십니다.”

주완은 SP엔터테인먼트란 말에 또다시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그는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희 스케줄은? 확인했고?”

“네, 일정 없습니다.”

“……그래.”

마주칠 일은 없겠군. 주완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정 비서는 그런 주완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 다른 보고를 이었다. 하지만 주완은 생각에 사로잡힌 듯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일이라면 철두철미한 그가 업무에 영 집중하지 못하는 건 늘 단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정 비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주완을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이내 상념에 잠긴 그를 두곤 정원에서 조용히 나왔다.

* * *

도희는 전화벨 소리에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귀국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도희는 이미 정오가 되었음에도 도통 정신이 차려지질 않았다.

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핸드폰을 들고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액정에는 ‘백순자’라는 두려운 이름이 쓰여 있었다. 도희는 제 표정이 절로 굳어지는지도 모른 채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너는 행실을 도대체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도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침착한 투로 설명했다.

“……엄마. 그 기사 사실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건 아니건! 기사가 났다는 게 중요하지! 열애설이라니……! 이래서 차 서방이 너한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하겠어?

또, 또 그 얘기였다. 순자는 전화할 때마다 늘 주완 얘길 했다. 결혼할 당시 그저 재벌이라서 좋아했던 ‘차 서방’. 순자에게 주완은 돈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엄마, 제발! 주완 씨 얘기 좀 그만해요! 나 그 사람이랑 끝난 지 3년이야!”

도희가 질색하며 소리쳤지만, 딸이 그런다고 한들 순순히 물러날 순자가 아니었다.

-남자 하나도 제대로 휘어잡지 못해서! 멍청한 년! 그러니까 한물갔다는 소리나 듣지! 내가 동네 창피해서, 원!

순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을 다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도희는 그녀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순자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수화기를 제 앞에다 던져 놓고 귀를 막았다. 그래도 순자의 폭언은 끊이질 않았고, 제 귀를 막은 손을 뚫고 들어왔다.

제 복을 발로 걷어찼다느니, 아직도 돈의 무서움을 모른다느니, 철이 없다느니, 능력 없고 형편없다느니 하는 말들을 주르르 쏟아 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 내던 순자는 도희가 반응이 없자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 말 듣고 있어? 이젠 애미 말까지 무시하니?!

도희는 그제야 핸드폰을 제대로 귀에 대고 맥없이 말했다.

“돈 필요해요?”

-돈은 있고? 돈도 안 되는 독립 영화 찍는다고 몸값은 몸값대로 낮춰 놓고 말이야! 어?

“설마 또 도박했어요?”

도희는 2차로 시작되려는 순자의 비난에 매섭게 반응했다. 그러자 순자는 잠시간 말이 없다가 애써 당당한 척 변명했다.

-이, 이번엔 내 차례가 올 게 분명 했는데 그 썩을 양반들이 날 두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요?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요?”

-이게 먹여 주고 키워 줬더니 바락바락 덤비는 것 좀 봐! 네가 돈을 줬으면 얼마나 줬다고! 차 서방은 네가 평생 준 거에 두 배는 더 줬어, 이년아!

“엄마!!”

도희는 순자가 주완에 관해 얘기할 때마다 심장이 저몄다. 결혼했을 당시 주완은 물론이고 주완의 어머니 부현까지 순자에게 ‘품위 유지비’란 명목 하에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 그랬다간 돈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순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특히 부현은 주완 이름 앞에 돈으로 얽힌 지저분한 소문이 따라붙는 걸 원치 않았고,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그깟 돈 몇 푼 줄 순 있다만, 네 어머니는 정도를 모르는구나.’

주완의 집에서 도희는 늘 멸시를 당했다.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다방 여자 출신에 노름까지 즐기는 여자가 어머니란 이유로. 주완의 집안에 비하면 제 배경이 탐탁지 않을 테니 그럴 만하다고 이해를 하면서도 때때로 서럽긴 했었다. 그때마다 저를 따뜻하게 위로해준 건 바로 주완이었다.

‘미안해. 이런 얘기 안 듣게 하고 싶은데.’

‘괜찮아요. 틀린 말씀 하신 거 아니잖아요. 내가 훨씬 부족하고…….’

‘누가 그래? 오히려 그 반대야.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부족해.’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넌 모든 게 완벽했어. 주눅 들지 마. 그게 설사 우리 어머니라 하더라도.’

그래서 괜찮았다. 갖은 모욕을 당해도 집으로 돌아와 안아 주는 주완만 있다면, 언제까지고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지쳤던 걸까. 그래서, 다른 여자와…….

도희는 주완과 낯선 여자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생각하지 말자.’

도희는 씩씩하게 심호흡을 하며 강건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차 서방, 아니, 주완 씨만큼 못 줘요. 안 줄 거고.”

-뭐, 이년아?

“맡겨 놓은 거 아니잖아. 돈 주면 또 도박할 거면서! 엄마도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도희의 단호한 거절에 이어, 마치 버튼을 누르듯 순자의 기계적인 한탄이 이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술집에서 서빙이나 시키는 건데! 이년이 주제도 모르고 연예인 한답시고 콧대만 높아져서는!

“그 술집, 내가 차려 준 건 기억해요?”

뚝. 도희는 전화를 그대로 끊어 버렸다.

도저히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가족이라곤 유일하게 어머니인 순자 하나 있는데, 순자는 가족이 아니라 족쇄였다. 도희가 어렸을 때부터 순자는 도박과 남자를 좋아했고, 도희가 연기한다고 했을 때도 지원 한번 해 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도희는 열여섯부터 나이를 속여 아르바이트를 감행했고, 그 돈으로 간신히 연기 학원을 다녔다. 나이를 속였다고 아르바이트비를 받지 못한 적도 있었고, 가게가 망해 사장이 도망간 적도 있었다. 함께 일하던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성희롱 당하기도 했고, 어머니가 다방 여자라는 이유로 따돌림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3년을 이 악물고 견뎌 데뷔한 도희였다.

어떻게 얻어서,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도희는 진심으로 연기가 즐거웠다. 시궁창 같은 자신의 처지를 잊게 해 주는 연기가 좋았다. 일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배우’란 직업은 목숨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자는 그런 자신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순자에게 도희는 자랑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뭘 바라겠어.’

도희는 핸드폰을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도로 이불을 덮었다. 순자에게 기력 소모를 한 탓인지 피곤이 다시 몰려왔다.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이제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또 한 번의 벨 소리가 울렸다. 불과 몇 시간 만이었다.

“응, 나영아.”

-도희야, 미안한데…… 회사로 좀 와야겠다.

전화를 받자마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영이 말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던 그때, 마침 수화기 너머로 찢어지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백도희 이년, 나오라고 해! 감히 내 전화를 끊어?

도희는 그 쇳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희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온몸이 굳어진 채 나직이 물었다.

“……나영아, 설마.”

-어머니가…… 너희 집 알려 달라는 거, 버티곤 있는데, 네가 와야 해결될 것 같다.

역시.

소속사를 찾아간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어머니 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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