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혼녀의 열애설
오전 9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는 도희와 라일은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점검하며 감독 뒤를 따랐다.
장천희 감독의 유명세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칸’에 초청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칸 진출’이란 주목할만한 이슈에 ‘톱스타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가진 도희가 있기에 기자들이 얼마나 날 선 질문들을 해댈지 나영과 도희 모두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류라일은 감독 옆이라 그런지 조용했다.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해. 알았지?”
나영은 도희가 기자들을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3년 전, 그날 때문이었다.
나영은 도희가 병실에서 깨어난 그 날 이후, 거의 동거하다시피 도희 곁을 지켰다. 먹지 않고, 잠들지 못하는 도희에게 요리해서 먹이고, 책을 읽어 주거나 자연의 소리를 틀어 주는 등 도희를 극진히 돌봤다.
도희가 기자들 앞은커녕 카메라 앞에도 설 수 없다는 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굳세고 당찼던 도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렇게 시들어 가던 어느 날. 나영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도희는 2년 만에 대본을 처음 읽었다. 그게 바로 장천희 감독의 작품이었다. 도희는 장천희 감독의 작품을 만나, 다시금 세상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 이거 할래.’
‘이거 미혼모 역할이야. 복귀작으론 좀 센데……할 수 있겠어? 더군다나 너 어머님 때문에 이런 작품 싫어했잖아.’
‘할래. 하고 싶어.’
장천희 감독의 작품은 늘 자살, 연쇄 살인, 왕따 등 세상의 암울한 면이 담겨 있었다. 원래 도희는 우울한 시나리오를 싫어했다. 자신의 인생을 비롯해 엄마인 순자를 떠올리게 한다며 그런 류의 작품을 기피했지만, 당시의 도희는 달랐다. 도희는 적극적으로 작품에 임했다.
처음 시나리오는 미혼모가 아이를 잃은 뒤 벌이는 복수 스릴러극이었다. 도희는 거기서 2년 만에 첫 주연을 맡으며 소름 끼치는 연기력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두 번째 작품은 가족이 죽고 난 후 유족들의 인생을 담은 잔잔하고 아릿한 다큐 형식의 영화였는데, 이 작품은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무려 ‘부산상’을 받으며 화제가 됐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 ‘하루살이’는 입양된 두 여자가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납치극을 계획하는 내용이었는데, 한국 극장에 개봉하기도 전에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도희 작품은 독립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투자자가 척척 잘 붙었다. 덕분에 넉넉한 예산 아래 어려움 없이 영화가 만들어졌고, 복귀한 지 일 년 만에 충무로에선 ‘백도희만 붙으면 투자는 문제없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처음엔 이혼녀란 타이틀이 여배우 인생의 대부분을 앗아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떤 역할도 척척 소화해 내는 도희의 연기력 앞에서, 배우의 사생활은 대중들에게 그저 무관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 속에서 도희 역시 차차 자신감을 찾았고, 카메라 앞에 서는 정돈 견딜 만했다.
모든 건 잘 풀려 가고 있었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도희의 마음만 제외하곤.
“아니다! 긴장하지 마! 너 끗발 떨어져서 별로 안 유명할 수도 있어. 기자들이 류라일만 찍을 수도 있어!”
“차암 위로가 된다.”
어처구니없는 나영의 말에 도희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도 긴장하지 말란 말에 침울한 저를 보곤 곧장 태세를 바꾸는 나영의 말이 어쩐지 위로가 됐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도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아직 문이 열리지 않은 게이트 앞에서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내 게이트가 열렸다. 이미 라일은 감독의 옆에서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도희도 얼른 그 옆으로 따라붙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수백 번의 플래시가 곳곳에서 동시에 터졌다. 곧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미리 바닥에 테이핑한 곳으로 세 사람을 안내했다. 카트를 밀던 나영과 라일의 매니저는 옆으로 살짝 빠졌다.
쏟아지는 조명에 도희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지만, 그녀는 최대한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등줄기에선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으나 다행히 나영과 한 수차례의 이미지 트레이닝이 도움이 됐는지 적어도 쓰러질 것 같진 않았다. 도희는 상상했던 대로 감독의 옆에 태연하고 바른 자세로 섰다.
“여기 좀 봐 주세요!”
“여기도요!”
세 사람은 왼쪽부터 차례대로 회전하며 손을 들어 포즈를 취했다. 몇 분간 사진 촬영이 끝나자, 한 사내가 직사각형 모양으로 촘촘히 묶어 놓은 마이크를 장천희 감독에게 들이밀었다.
장천희 감독은 거만하지도 자만하지도 않은 무뚝뚝한 얼굴로 마이크를 들었다. 도희와 라일 역시 그런 감독의 장단에 맞추기 위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기자 간담회가 따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짧은 소감과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 답변하기로 한 자리였다. 장천희 감독은 언론에 연연하지 않는 감독답게 털털한 자세로 소감을 이었다.
“심사 위원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화제가 끝나고 심사 위원 분들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는데,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잘 전달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앞으로 한국 영화에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찍겠습니다.”
장천희 감독이 말을 끝내자마자 플래시가 더 크게 터졌다. 그사이 감독 옆에 있던 도희와 라일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마이크를 받기 위해서였다.
마이크는 감독의 오른쪽에 있던 도희에게 먼저 넘어왔다. 라일은 제게 먼저 올 줄 알았다는 듯 머쓱히 손을 황급하게 내리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몇몇 기자들은 그 모습을 보곤 먹잇감을 문 듯 눈을 번뜩였다. 도희는 그런 기자들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얼른 소감을 말했다. 류라일을 싫어하긴 했지만, 기자들에게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루살이’가 감독님과 함께한 세 번째 작품인데요. 인간적으로도 존경하지만, 늘 세상에 의문을 던지는 감독님 작품을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도희는 간단한 대답을 끝내고 곧장 라일에게 마이크를 건네려고 했다. 라일도 때마침 여유롭게 손을 올리는데, 다른 기자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백도희 씨, 드라마 복귀는 안 하십니까?”
도희는 일순 굳어지는 라일의 표정을 보곤 재빨리 건너가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류라일 씨 소감부터 들은 뒤 질문받겠습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긴 했지만, 도희는 실제로 라일에게만 질문이 쏟아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목을 받지 않은 지 오래됐기도 했고, ‘이혼녀’ 대신 ‘칸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만으로 이번 작품의 큰 수확이라고 여긴 도희였다. ‘칸의 여인’이라면 라일에게도 통용되는 수식어일 텐데. 어쩐지 기자들은 도희 쪽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카메라도 도희 쪽에 더 몰려 있었고, 질문을 준비하는 기자들의 눈동자도 대부분 도희를 향해 있었다.
역시 이혼녀라 그런가. 도희는 기자들의 과도한 취재 열정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도희는 기자에게 쫓기던 3년 전 일을 문득 떠올렸다. 그러자 영문 모를 불안감에 점점 더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라일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장천희 감독님과의 친분을 은근슬쩍 과시하며 도희와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란 가식적인 소감도 덧붙였다. 그렇게 라일이 소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감독님, 한국에 오시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게 뭐였나요!”
“백도희 씨, 드라마 복귀 검토 중인 게 있나요?”
“감독님, 이번 영화 몇백만 예상하시나요?”
“백도희 씨, 현재 실검 1위이신 건 알고 계신가요?”
“다음 드라마 상대 배역으로 은지섭 씨 어떠세요?”
감독에게 하는 질문들 사이로 도희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다. 도희는 어리둥절했다. ‘칸 수상 후 귀국’이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쓰려고 새벽부터 공항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을 그들이 영화와 관련 없는 질문들을 쏟아 낸다는 게 의아했다. 실검 1위는 뭐고, 은지섭은 또 누구란 말인가.
도희는 얼른 장천희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무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온 감독을 뒤로하고, 도희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건 예의도 아니었고, 도희 입장에서도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저희 영화 ‘하루살이’ 이번 주에 개봉합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도희는 재빨리 영화 쪽으로 이야기를 돌렸으나 장천희 감독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개인적인 질문을 자르자, 기자들 사이에서 잠시간 플래시 소리만 터졌다. 그러자 나영이 나서서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섰다.
“인터뷰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기자 간담회에서 뵙겠습니다.”
세 사람을 둘러싼 기자들이 세 사람의 동선을 따라 흐트러졌다. 도희와 감독, 라일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나란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 * *
각자의 차에 오르기 전, 도희는 장천희 감독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류라일 역시 매서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희는 감독에게 가자마자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선 나영 역시 작게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감독님.”
“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저런 질문을 들으시게 해서, 면목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도희의 진정성 있는 사과에 장천희 감독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설핏 웃었다.
“안 피곤해요?”
“네?”
도희는 뜬금없는 감독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라일도 마찬가지였다.
“내 표정이 안 좋았던 이유는 피곤해서 그런거고. 백도희 씨가 검색어 1위 했다는데 왜 미안합니까? 우리야 영화 홍보되고 좋죠. 안 그래요?”
“네……? 아 네! 맞습니다.”
장천희 감독은 말수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늘 눈치를 보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털털했다.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돌아온 당일, 배우 가십거리에 밀려 그 소감이 묻히다시피 흘러간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앞으로 바빠지겠네요. 나중에 내가 불러도 안 오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감독님이 부르시면 언제든 와야죠. 저 복귀하게 해 주신 분인데.”
도희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을 본 장천희 감독은 또다시 희미하고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올랐다.
“가서 푹 쉬어요. 간담회 때 봅시다.”
차가 출발하고, 도희는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2년 만에 작품을 선택해서 도희가 다시 연기하기까지, 장천희 감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연기를 다시 시작하게 해 준 감독에게 누가 되는 게 싫었는데, 별 탈 없이 넘어가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차 문을 잡고 있던 라일이 두고 보자는 식으로 도희를 째려보며 차에 홱 올랐다.
“쟤도 참 한결같다.”
나영은 그런 라일의 표정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도희는 라일의 그런 태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처음에야 백도희 닮은 꼴로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이혼녀 백도희보다 드라마에 자주 얼굴을 비추는 류라일이 더 인지도가 높았다. 아마 오늘 일은 그녀에게 큰 수치였으리라. 감독과 도희에게 질문이 쏟아지는 가운데, 라일에 대한 질문은 일절 없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도희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도로변에 털썩 쭈그리고 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아, 심장 떨려. 나영아. 나 아직 안 죽었나 봐?”
도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데, 옆에 있던 나영은 웬일인지 그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뾰로통해진 도희는 나영을 흘긋 올려다보며 앙탈하듯 말했다.
“뭐 하는데에.”
“그게 아니네. 아직 안 죽은 게 아니라 너……!”
“응? 왜, 또.”
“너 나 몰래 연애했냐?”
“뭐??”
단숨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도희의 눈앞에 나영이 자신의 핸드폰 액정을 공격적으로 들이밀었다. 나영이 보여 준 화면엔 한 시간 이내로 올라온 기사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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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제목을 천천히 내려보며 도희의 얼굴색이 점차 붉으락푸르락 변해 갔다.
이내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얘가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