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3년 후, 칸의 여인
3년 후.
[‘하루살이’ 장천희 감독 심사위원 대상! 앞으로의 행보는?]
[백도희 고통 끝에 ‘칸의 여인’이 되다!]
[심사위원 대상 받은 장천희, 백도희, 류라일! 내일 오전 나란히 귀국 예정!]
“한국 참 정보 빨라. 이 정도면 스파이 붙인 거 아닌가 모르겠어.”
프랑스 공항 VIP 라운지의 소파에 앉아 있던 도희가 핸드폰 화면에 띄운 기사를 슥슥 넘기며 말했다. 그러자 나영이 덤덤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한국 가면 표정 관리도 좀 잘하고.”
“맞아요, 선배. 요즘 왜 그렇게 울상으로 다녀요?”
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류라일이 이때다 싶었는지 나영의 말에 곧바로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러자 도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쟤 왜 내 앞에 갖다 놨니?”
혼잣말처럼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나영에게 류라일이 왜 제 앞에 앉아 있는지 물었건만, 라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우처럼 상냥한 투로 말을 이었다.
“선배님, 아직도 3년 전 일로 기자들이 물어뜯을까 봐 겁먹으신 건 아니죠? 에이 설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라일이 말한 건 다름 아닌 이혼 얘기였다. 허점 없는 백도희의 유일한 약점.
세월이 꽤 지났지만, 그 어떤 사람도 도희 앞에서 이혼 얘길 함부로 들먹이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 류라일 빼고.
“내가 이래서 널 싫어해. 연기도 더럽게 못하면서 눈치 없는 척, 그런 식으로 사람 건드리면 재밌니?”
누구보다 이혼 사실이 아픈 도희였지만, 그렇다고 새파랗게 어린 류라일에게 당하고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도희는 류라일의 약점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백도희의 닮은 꼴 그러나 연기는 안 닮은 꼴. 예상대로 라일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뭐 이렇게 쉽게 열 받아, 재미없게.”
도희는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얄궂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영과 라일의 매니저는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듯한 두 사람을 흘깃흘깃 곁눈질할 뿐이었다.
“탑승이나 하러 가야겠다. 넌 감독님 오면 따라올 거지? 감독님 껌딱지니까.”
“……선배.”
라일은 분에 겨운 듯 도희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너 감독님이랑 친해서 이 작품 한 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아. 뭘 놀라고 그래, 새삼스레. 네 연기력으로 캐스팅된 게 아니라는 건 요즘 초등학생들도 알겠다. ……어머, 설마 너 몰랐니?”
“제 연기가 어디가 어ㄸ……!”
“어? 감독님.”
라일의 반격이 듣기 싫었던 도희는 화장실에 간 감독님이 돌아온 척 연기했고, 감쪽같은 연기에 속아 모두의 시선이 라일의 뒤쪽으로 꽂혔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도희는 제 연기에 속아 넘어간 류라일과 그의 매니저를 보며 최대한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내 연기 죽이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라일은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도희를 노려봤다. 그 모습을 본 도희는 일부러 더 얄미운 어투를 골라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잘 좀 따라 해 봐. 너, 내 ‘닮은 꼴 배우’잖아.”
오늘도 도희의 완벽한 승리였다.
도희는 속이 시원했는지 상쾌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는 라일과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라운지를 나오는 내내 도희의 걸음걸이는 그 누구보다 당찼다. 도희의 머릿속엔 그런 자신의 뒷모습까지 우러러볼 라일의 일그러진 표정까지 계산에 있었다. 그렇게 입구를 나와, 코너를 도는 순간이었다.
툭.
“아!”
코너를 돌자마자 도희는 큰 그림자와 툭 부딪쳐 그만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양팔을 단단하게 잡아챘다. 덕분에 도희는 넘어지지 않았고, 그런 도희의 눈에 한 남자의 넓은 가슴이 훅 들어왔다.
‘어? 이 향…….’
얼결에 남자의 품에 안긴 도희는 익숙한 향기에 눈을 반짝였다. 하얀색 셔츠를 입은 낯선 남자의 품에선 무척 그리웠던, 한 남자의 체취가 강렬하게 풍겼다. 도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홱 들었다.
“Faites attention.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매너 있게 그녀를 향해 향긋하게 웃어 보이곤 갈 길을 재촉했다.
‘맞다, 여기 프랑스였지.’
도희는 건장한 프랑스인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제가 얼마나 우스운 착각을 했는지 깨닫곤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남자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도희는 제자리에서 한동안 멀거니 서 있었다.
그가 여기 있을 리 없는데. 결코 그일 리가 없는데.
그였다고 한들, 반갑게 인사할 사이도 아닌데. 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친 거지, 백도희.”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데.
도희는 버릇처럼 제 아랫배를 손바닥으로 쓸며 그곳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 * *
은지섭의 매니저는 밴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곧 촬영 시작이라며 조감독에게서 전화가 몇 통씩 오는데 정작 당사자인 지섭은 여유만만이었다.
참다못한 그의 매니저는 다시금 차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회색 머리를 눈썹까지 늘어트리고, 크고 동글동글한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지섭이 보였다. 안 그래도 큰데 동공까지 큰 탓인지 그의 옅은 갈색 눈동자 색이 유난히 튀었다.
“지섭아, 촬영 시작한대!”
매니저는 턱을 괸 채 태평하게 SNS를 하고 있는 지섭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네에.”
30분째 같은 대답이었다. 지섭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매니저는 그의 눈치를 보며 최대한 지섭을 달래듯 말했다.
“이젠 진짜 시간 없어. 일어나자.”
“형, 이거 좀 봐요.”
지섭은 자신을 일으키려는 매니저 눈앞에 조금 전 찍은 셀카 한 장을 내밀었다. 셀카는 고개를 30도 정도 기울이고 검지로 이마를 짚은 채 미간을 살짝 찡그린 모습을 담고 있었다. 별달리 특별한 점이 보이는 사진은 아니었다.
감상평을 해 달라는 건가?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멋있네. 회색 머리 잘 어울리는데, 다음 드라마 촬영 땐 다시 염색해야 한다.”
매니저는 기회를 빌려 지섭에게 경고하곤 그가 내민 핸드폰을 살짝 밀었다. 대화가 끝났으니 어서 촬영장에 가잔 뜻이었다. 그런데 지섭의 화제는 또다시 엉뚱한 쪽으로 튀었다.
“반지 예쁘죠?”
“반지?”
그러고 보니 사진 속 이마를 짚고 있는 지섭의 검지엔 본 적 없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는 중간 정도의 두께에 시곗줄을 연상케 하는 체인 줄이었는데, 중앙에는 체스판 무늬가 들어간 네모 모양의 액세서리가 박혀 있어 한 눈에도 무척 특이해 보였다.
“협찬? 디자인이 특이하네.”
“그쵸? 역시, 이게 딱이었어. 이제 가죠!”
매니저는 지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보단 당장 지섭을 촬영장에 데려가는 게 먼저였다. 매니저는 서둘러 지섭을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 * *
“요즘 정말 핫한 배우시잖아요? 은지섭 배우님과 솔희 배우님! 지난번 드라마에서 어마어마한 케미를 보여 주셨죠.”
TBS 스튜디오에서는 ‘인생 술 한 잔’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케이블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5%를 늘 넘기는 ‘인생 술 한 잔’은 게스트 두세 명을 초대해 실제로 술과 안주를 먹으며 대화를 하는 토크쇼였다.
“은지섭 배우님, 그 여자 친구 분과는 아직도…….”
“네? 저 여자 친구 있어요?”
“와, 신인인데 안 넘어가네.”
“공부 좀 하고 왔습니다.”
지섭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곤 짓궂은 MC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 미소구나. 저 진짜 반할 뻔.”
지섭의 미소에 남자 MC는 심장에 손을 얹고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돈을 주고 사서 볼 정도의 미소’라고 부를 정도로 지섭의 미소는 가히 남자들도 반할 만한 미소였다.
그는 SBC 드라마 ‘아는 누나’에서 상큼한 연하남으로 급부상한 라이징 스타였다. 이전까진 깔끔한 이미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비중의 조연만 맡았기에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아는 누나’에서 주연을 맡으며 완전히 몸값을 올렸다.
“질문 하나만 할게요.”
“네, 하세요.”
“은지섭 씨 이상형이 누구예요?”
MC들은 사전에 예고된 질문을 건넸다. 지섭은 마치 그 질문을 처음 듣는 듯 생각하는 척 말을 더듬었다.
“이상형이요? 어, 착하고…….”
“에이! 그런 진부한 거 말고. ‘나 이 배우랑 꼭 드라마 찍고 싶다!’ 하는 배우 있어요? 딱 한 명만.”
“한 명…… 으아, 어렵네요.”
지섭은 곤란한 듯 이마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머리를 긁을 때, 왼손 검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카메라에 예쁘게 잡혔다. 지섭은 빨간불이 들어와 있는 카메라의 각도를 슬쩍 확인하곤 아무도 모르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없어요? 갑자기 확 꽂히는 배우!”
“아, 네. 물론 있죠. 딱 한 명 있었어요.”
“누군데요?”
MC들은 눈을 반짝이며 지섭에게 물었다. 지섭은 잠시 고민하는 듯 곤란한 얼굴을 내비쳤다.
“아, 이거 말해도 되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백도희 선배님이요.”
촬영장은 순식간에 침묵이 흘렀다. 예정되어 있던 대답은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솔희여야 했다. 지섭이 솔희와 한 번 더 드라마를 찍고 싶다고 얘기하면 MC들은 이를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게 대본에 적혀 있었다.
솔희의 표정이 굳어지고, 감독 역시 모니터를 통해 촬영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빼내어 지섭의 낯빛을 살폈다. 대본을 모르는 스태프들이 조용해진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가 굳이 ‘이혼녀’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지섭의 발언이 실수라고 믿었다.
“자, 잠시만요.”
생각지 못한 대답을 들은 매니저는 촬영을 중단시키고 그에게 뛰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지섭은 촬영장으로 난입하려는 매니저를 막으려는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전부터 존경하던 선배님이라, 꼭 한번 같이 연기해 보고 싶어요. 다음 로코물 상대역 해 주시면 영광일 것 같아요.”
이유를 줄줄이 나열하는 지섭 덕에 감독은 계속해서 촬영을 진행하라는 손짓을 했고, 매니저는 발을 멈췄다. 그 손짓을 본 MC는 잠시간 편집 점 간격을 둔 뒤 능글맞게 지섭의 대답을 받아쳤다.
“어떤 면에 그렇게 반하셨어요?”
“하하, 반한 건가. 예전에 선배님이 하신 로코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거든요. 이 정도 배우면 상대역 했을 때 빠져서 연기하겠다 싶었습니다.”
“빠.져.서 했다? 점점 더 사랑 고백 같은데요?”
점점 더 대본과는 다르게 대화 내용이 산으로 향했지만, 감독은 컷을 외치지 않았다. 덕분에 짓궂기로 유명한 MC들은 신나게 지섭을 물고 늘어졌다. 지섭은 시종 여유로운 눈웃음을 유지하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저에겐 과분하신 분이죠! 이미지 굳어질까 봐 이제 연하남 캐릭터는 피하고 싶긴 한데, 선배님만 괜찮으시면 전 준비되어 있습니다! 연락 주세요!”
활기찬 목소리로 응원인지 고백인지 모를 말을 마치자, 주변에선 유난스러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정도면 고의 아니야?”
“대놓고 나 백도희 좋아한다고 선언하는 것 같은데.”
스태프들은 점차 과감해지는 지섭의 행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덕분에 매니저는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다 끝내 회사에 전화를 걸었고, 그 모습을 본 감독은 시청률 생각에 눈을 번뜩였다.
MC들은 백도희 선배가 이상형이냐,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냐 하는 질문을 쏟아 냈고, 어쩐 일인지 질문지에 없던 답변은 안 하겠다던 지섭도 도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술술 꺼냈다.
그로부터 2주 후, ‘인생 술 한 잔’ 방영 다음 날. 그러니까 도희가 한국에 상륙하는 몇 시간 전.
실시간 검색어에는 ‘은지섭’, ‘백도희’가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