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럴 거면 이혼해요
“결혼 일주년이시라면서요. 비서분이 그러던데.”
“정 비서가 직접 왔어요?”
그제야 어두웠던 도희의 낯빛이 환해졌다. 도희는 꽃바구니를 보자마자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벌떡 일어나 허 감독에게 90도로 인사했다. 바쁜 스케줄 와중에 꽃바구니를 촬영장까지 들여 준 데에 대한 인사였다. 허 감독은 인사를 받자마자 도희의 정중한 인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껄껄 웃어댔다.
“톱스타랑 재벌은 역시 스케일도 커? 꽃바구니가 아주! 자, 다시 촬영 준비!”
나영은 그런 도희의 표정을 보자마자 그녀가 우울했던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못 말린다. 결혼하고도 그렇게 좋아?”
도희는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형형색색의 장미 꽃다발이 무더기로 꽂혀 있는 꽃바구니 정 가운데엔 주완이 보냈을 거로 보이는 카드가 한 장 꽂혀 있었다. 도희는 재빨리 카드를 집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결혼기념일에 이것밖에 못해 줘서 미안. 오늘 늦을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잊어버린 게 아니구나.’
도희는 카드 한 장에 아침의 설움이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녀는 오늘 밤 그가 몇 시에 오던지 반드시 기다리겠노라 다짐하며 힘차게 일어서,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이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새벽 두 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던 도희가 얼른 뛰어나갔다. 그녀는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모양새로 그를 맞이했다. 주완을 바라보는 도희의 눈은 동그란 언덕 모양으로 예쁘게 휘어 있었다.
“왔어요?”
“아직 안 잤어?”
평소보다 유난히 들뜬 모습이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한 주완은 그런 도희를 본 척 만 척 지나쳤다. 여느 때처럼 안방으로 곧장 들어가는 주완을 보고도 도희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띤 채 그를 쫓았다.
“주완 씨 올 때까지 기다렸죠.”
도희는 재킷을 벗으려는 주완의 팔에 매달리듯 팔짱을 끼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주완은 돌연 심각해진 얼굴로 팔을 빼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네?”
요란한 꽃다발과 카드까지 손수 써서 보낸 사람치고는 너무 천연덕스러운 반응이었다. 도희는 허탈감에 잠시간 영문을 알 수 없는 주완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고마워서요.”
도희는 한참을 망설이다 흘리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주완의 표정이 더욱 알 수 없이 일그러졌다.
“뭐가?”
때마침 주완의 핸드폰에 문자가 온 듯 진동이 짧게 울렸다. 주완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는 곤란한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하아, 정 비서.”
주완이 작은 소리로 탄식하듯 읊조리자마자 도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제야 도희는 외면했던 현실이 제대로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변해 버린 주완의 태도, 끊임없는 도희의 노력도 모른 척하던 그의 무심함. 그리고 끝내는 결혼기념일 선물까지 비서의 손에 맡기는 무성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의 마음이 멀어져 있음을 뜻했다.
진작 손을 떠나 버린 일이었는데. 그의 작은 친절과 다정함 하나에 희망을 가졌던 건 도희 자신이었다.
자각을 마친 도희의 눈빛엔 조금 전과 달리 반짝이던 총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하, 요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당신한테 내가 짐짝이에요?”
“뭐?”
도희는 변명을 들을 마음이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막았다.
주완이 이런 말을 고스란히 받아 줄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을 뱉었다. 만에 하나라도 도희가 오해한 거라면 그게 어떤 오해든 그가 바로 잡아 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느껴져서요.”
정말 끝이겠지만.
“……너한테 그 정도로 보였다면 그런 거겠지.”
“차주완 씨!”
설움이 북받쳐 오른 도희는 결국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힘든 건 나였는데. 포기하게 만든 건 본인이면서.
주완은 꼭 상처를 받은 사람의 얼굴로 교묘하게 도희의 탓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엔 도희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내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정말 몰라요?”
“대충 알 것 같아.”
“근데 왜……!”
“그만하자.”
주완은 힘들다는 듯 도희의 말을 막고는 그대로 안방을 나가 버렸다. 흥분한 도희는 그의 뒤를 쫓았다. 그는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성난 보폭으로 주완을 따라잡은 도희는 우악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 세웠다. 주완은 도희의 손이 닿자마자 힘껏 뿌리쳤다.
“아!”
쨍그랑! 주완에게 밀려난 도희는 TV 테이블 위에 얹혀 있던 도자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도자기 파편들이 도희의 마음처럼 바닥에 조각조각 널브러졌다.
놀란 두 사람은 거실 한 가운데 서서 떨어진 조각을 망연히 바라봤다. 곧 도희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있어. 내가 치울게.”
짜증을 억누르며 화장실로 가려던 주완을 도희가 도로 잡아챘다.
“뭐 하는 거야!”
주완은 도자기 조각으로 어질러진 바닥을 맨발로 걸어 제게 다가온 도희의 발을 황급히 살폈다.
“앉아 봐. 빨리.”
바닥에 떨어진 유리가 도희의 발바닥 사이를 파고드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거! 이런 거에 내가 기대했어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뭐가 문젠데요!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면 되잖아요! 우리, 부부가 맞긴 해요?”
도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외쳤다. 그런 도희를 바라보던 주완은 끝내 미간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해결…… 해결할 수 없어. 그래서 할 말도 없고. 네가 서운하다고 한들 미안하지만 내가 변하진 않을 거니까. 일단 치료부터 하자.”
이제 주완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운하다고 한들 어쩔 수 없다.’는 뻔뻔스러운 말을 뱉어 놓고 도희를 걱정하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도희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나더러…이런 당신을 받아들이고 살라는 거예요?”
“그래 주면 좋고.”
그 말 한마디로 애써 부여잡고 있던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고작 일 년. 일 년 사이에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 게 분명했다.
“이혼해요.”
도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향해 있던 주완의 고개가 반대로 돌아갔다. 도희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었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아니 도희를 짓눌렀다. 거실 벽면 정중앙에 크게 걸려 있는 두 사람의 행복한 웨딩 사진이 불과 일 년 만에 끝나 버린 결혼 생활을 비웃는 듯 보였다.
“이럴 거면 이혼해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도희는 ‘끝’을 반복했다. 도희는 울지 않으려고 부릅뜬 눈으로 주완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낱낱이 살폈다. 잠시 멈춰 있던 주완이 뒤돌아섰다. 그는 곧 덤덤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도희는 그 마지막 말을 꺼내는 순간까지 그가 잡아줄 거란 희망을 가슴 한 켠에 숨겨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기 어려웠는데. 고마워.”
잠깐의 침묵을 두고 떨어진 건 그의 짧은 감사 인사였다. 도희의 심장이 쿵, 곤두박질쳤다. 그간 미루고 미뤄 왔던 남편의 변해 버린 진심을 들어 버린 순간이었다. 참아 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 그렇게 이혼하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끝까지 착한 척하고 싶었나?”
“그럴 리가. 이미 못된 놈인데.”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는 주완은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처량해 보였다. 도희는 그런 주완의 ‘척’에 질려 버렸다. 다정한 척, 위하는 척, 속내를 꼭꼭 숨기고 드러내지 않더니. 이혼을 말하는 이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저 희망 고문에 여태 속았지. 도희는 더 이상 그의 연기에 속아줄 마음이 없었다.
“다신…, 다신 내 인생에 나타나지 말아요.”
도희는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슬픔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이혼을 말한 건 도희였지만, 마치 이혼을 당한 기분이었다.
주완은 낮게 한숨을 뱉었다. 슬픔에 일그러진 도희를 응시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침착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숨쉬기조차 버거운 그녀와 달리 여유가 엿보이는 그의 태도가 도희에게 더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최대한 빨리 서류 정리할게.”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나를 갉아먹어도 좋을 만큼 사랑했는데.
도희의 깊숙한 사랑의 끝은 ‘이혼’이었다.
“치료 잘해.”
주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현관으로 미련 없이 걸어 나갔다.
* * *
[세기의 부부, 백도희, 차주완 부부 협의 이혼!]
[백도희, CH그룹 차남 차주완과 협의 이혼, 왜?]
[백도희, CH그룹 차남 차주완과 이혼 심경은?]
한 달 후, 서류가 완전히 정리되기도 전에 두 사람의 이혼 기사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주완과는 그날 이후로 별거 하고 있는 상태였고, 기자들을 피할 겸 그와 함께 살던 공간을 피하고 싶었던 도희는 나영의 집에 한 달째 얹혀살던 중이었다.
얼굴에 팩을 붙인 도희는 나영의 집이 마치 제집인 양 소파에 벌러덩 누워 핸드폰으로 기사를 쑥쑥 훑었다.
“협의 이혼한 사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혼 심경에 대해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녀는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기사 제목 중 자극적인 기사들을 터치해, 가장 마지막에 나와 있는 문장들만 꼽아 띄엄띄엄 소리 내 읽었는데 모든 기사의 결말이 일관성 있게 허무했다. 도희가 덤덤하게 기사들을 줄줄이 읽어 내자, 식탁에 앉아 있던 나영이 참다못해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만 읽어라, 좀.”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꼭 무슨 말을 한 것처럼 제목을 쓰네? 그래 놓고 기사 맨 끝엔 밝혀지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거면 기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불러야지. 차라리 무슨 말을 해야겠어! 안 그래, 나영아?”
“응, 안 그래. 그냥 가만히 있어, 조용히. SNS 닫았지?”
“벌써 닫았지.”
도희는 막 이혼한 대한민국 톱 여배우 답지 않게 털털한 투로 구시렁거렸다.
반면 나영의 표정은 심각했다. 도희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구는 걸 모르지 않기에 그 모습이 더 안타까운 나영은 깊은 한숨을 내뱉곤 종이 뭉텅이 몇 개를 도희 곁에 툭 던졌다.
“심심하면 이거나 읽던가.”
도희는 던져진 종이가 새로 들어온 대본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도희는 엎드리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더니 팩을 홱 떼어 내고 말했다.
“나 일해?”
그녀의 눈은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네가 음주운전을 했니, 도박을 했니 마약을 했니. 이혼한 걸 가지고 뭣 하러 쉬어. 너 일하는 거 좋아하잖아. 일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이 기분으로 방콕하기 끔찍했는데.”
여전히 발랄한 기색이 돋보이는 말투였지만, 도희 표정엔 쓸쓸함이 묻어났다. 도희는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나영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일부러 발랄하게 대본을 집어 들었다.
나영은 SP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제 삼촌이 한 말을 되새겼다.
‘도희 걔, 지금 일 안 하면 죽어. 차라리 일하라고 해.’
17살 때부터 봐 왔던 도희였다. 19살에 연예계에 데뷔한 이래로 도희는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 없었다. 도희는 결혼한 날까지 신혼여행을 포기하고 촬영을 선택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순전히 본인의 선택이었다.
‘그랬던 도희니까, 이게 도희를 위한 일이겠지.’
이혼한 지 고작 한 달 좀 넘은 이 순간에 대본을 내미는 나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그녀는 이게 바로 도희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널 누가 말려.”
도희는 어느새 무서운 속도로 대본을 읽고 있었다. 잠시 침울해 보였던 그녀의 눈동자엔 어느새 일에 대한 열정으로 생기가 가득 넘치는 듯했다.
나영은 내심 안도하며 그런 도희를 찬찬히 살폈다. 가뜩이나 쇄골이 두드러지는 마른 몸이었는데, 며칠 새 훨씬 더 마른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뚱이는 물론이거니와 대본을 넘기는 손가락조차 뼈가 두드러질 만큼 가냘파 보였다.
나영은 그런 도희를 그림처럼 바라봤다. 그녀는 비쩍 마른 몸을 가지고도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아니, 오히려 가냘픔에 청순하기까지 했다.
도희는 학교 다닐 때부터 튀지 않으면서 튀는 외모였다. 그녀 주변엔 언제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고급스러운 아우라가 따라붙었다. 맑은 피부에 동그란 눈,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대와 앙증맞은 입술이 묘하게 조화롭기 때문일까. 보자마자 강렬한 인상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편안함을 주면서도 수수한 아름다움을 갖춘 도희는 사람들의 이목을 손쉽게 집중시켰다.
과하게 꾸미지 않고도 남자들의 주목을 받는 도희는 당시 여학생들의 질투를 한몸에 샀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도희는 이런저런 험담에 휘말리면서도 무성한 소문 속에서 기죽지 않았다. 나영은 그런 도희가 늘 신기했고, 한편으로 존경스러웠다.
“천천히 봐. 또 밤새워서 읽지 말고.”
“알았어.”
도희는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영의 눈엔 도희가 열정적으로 대본을 훑는 것 같았지만, 사실 도희는 눈은 활자를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