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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의 귀환-3화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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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여자의 정체

도희는 여자를 보자마자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긴 생머리를 질끈 묶고, 금테 안경을 써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여자는 도희를 보고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처음 보는 여자의 등장에 당황한 건 도희 쪽이었다.

“누구세요?”

“아, 저는 주완 씨…….”

“도희야.”

어느새 도희 뒤로 다가온 주완이 다급하게 여자의 말을 막았다. 제 뒤에서 저지하듯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주완에게 도희의 시선이 멎었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경고하듯 읊조렸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이만 가.”

“지금……!”

단호한 명령에 도희의 분노가 잠시 차오르다가 멈췄다. 이곳이 주완과 도희, 단둘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덕분이었다. 겨우 진정한 도희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 보는 낯선 여자를 비롯해 본부장실을 지키고 있던 비서 두 명과 정 비서까지. 모두가 도희를 주목하고 있었다.

‘참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억울하지만, 유명 배우란 직업은 그래야만 하는 직업이었다.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배우에게 가십거리는 치명타였다. 배우에게 어떤 일이 진짜건 아니건, 가십거리에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서 도희가 감정을 드러내면 다음 날 어디선가는 백도희의 불화를 떠들 테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두 사람을 쇼윈도 부부로 만들고 말 것이다. 도희는 자신이 짊어진 톱스타의 무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도희는 깊은 한숨을 내뱉곤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알았어요. 집에서 봐요.”

도희는 그대로 가방을 챙겨 본부장실을 나왔다.

* * *

집에 돌아온 도희는 도시락을 만드느라 한껏 어질러진 부엌을 바라보다가 우선 다이닝 테이블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치웠다.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를 분리하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님]

핸드폰에 뜬 세 글자를 보자마자 도희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 제 엄마 순자가 사고를 친 건 아닐까, 자신의 위치가 또 주완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해 버린 건 아닐까 걱정됐다. 도희는 전화벨이 끊기기 전,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님.”

-넌 네 어머니가 뭘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모르니?

역시. 엄마 얘기구나.

도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흘러들어 오는 어머니 부현의 고상하고 뾰족한 목소리에 설핏 긴장했다.

“저희 엄마가 또…….”

-하우스를 운영했다는구나. 기가 차서. 전혀 모르는 일이야?

“……죄송합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도희는 주완 앞에서도, 부현 앞에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저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순자는 도박 중독이었다. 사돈인 부현의 눈치를 봐서인지 도희가 CH그룹과 연을 맺은 뒤로는 한동안 잠잠한 듯했었다. 간혹 도희에게 걸릴 때면 마지막이라며 수습할 돈을 요구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물쩍 넘어간 게 실수였다. 순자는 결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반성을 할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하우스 운영’까지 했다니 도희 역시 기가 찼다. 도박을 하는 것만으로도 수차례 주의를 줬건만 도박장을 손수 운영했다니. 도박 중독인 순자가 이젠 하다 하다 도박으로 사업까지 벌일 셈이었던 것이다.

-정 비서가 가서 해결했다던데. 너나 주완이나 얼굴이 있는데, 어쩜 그렇게 허술해.

부현은 상냥한 듯 날카롭게 그녀를 다그쳤다.

부현은 히스테릭하게 도희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건 품위를 중요시하는 부현의 방식이었다. 이미 부현의 방식을 잘 알고 있는 도희는 그녀가 굳이 이 사태를 뒤늦게 알린다는 것만으로도 이 일을 얼마나 불쾌해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조심하겠습니다.”

도희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꾸했다. 부현에게 다른 변명은 어차피 통하지 않기에 짧고 굵은 반성이 가장 이 일을 조용히 넘어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연예인이랍시고 결혼식 할 때 온갖 유세는 다 떨고는 이게 뭐니? 모양 빠지게.

“죄송합니다.”

부현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몇 번이고 도희를 나무랐다. 부현의 말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도희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죄송합니다’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주눅 든 사과를 끝낸 후에야 도희는 겨우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도희는 언젠가 예능 프로에서 ‘자신을 색깔로 표현하면 무슨 색이냐.’는 질문에 ‘하늘색’이라고 답했던 일을 떠올렸다. 또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잿빛’이라고 대답하리라.

그만큼 모든 게 지쳤다. 변해 가는 듯한 주완의 태도, 끊임없이 도희의 약점이 되는 순자, 그런 도희를 못마땅해하는 부현까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을 의미 없이 걷는 기분이었다.

‘……힘들다.’

도희는 그대로 소파에 가서 포기한 듯 몸을 뉘었다.

* * *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잠들었던 도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신발을 벗고 있는 주완 앞에 가서 환한 얼굴로 섰다.

“왔어요?”

“응.”

도희는 낮의 일을 떠올리면서도 주완을 기쁘게 맞이했다. 얼굴을 붉히지 않고 낮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완은 청량한 미소를 띠고 있는 도희를 매정하게 지나쳐,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주완 씨.”

노력이 무색하게도 도희의 목소리가 경고하듯 딱딱해졌다. 그녀는 주완이 사라진 자리에 서서 제 뺨을 툭툭 두어 번 때렸다. 그러더니 검지로 입꼬리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며 예쁜 미소를 유지했다.

‘웃자, 웃자.’

도희는 스스로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곤 씩씩하게 안방으로 그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우선 순자 일부터 사과하는 게 낫겠지.

도희는 외투를 걸고 있는 주완의 등 뒤에서 몇 초간 망설이다 말을 꺼냈다.

“엄마 얘기 들었어요. 미안해요.”

도희의 사과에 넥타이를 풀던 주완의 손이 멈췄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말해 주지.”

도희는 미안한 기색을 담아 입을 비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주완은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덤덤하게 넥타이를 행거에 걸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마저 풀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정 비서가 잘 해결했으니까.”

한참 만에 주완은 도희를 안심시키려는 듯 너그럽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때, 주완이 셔츠를 완전히 벗었다. 셔츠 아래 감춰져 있던 그의 단단한 가슴이 눈에 들어오자 도희의 시선이 그의 조각 같은 상체에 꽂혔다. 주완은 오밀조밀하게 근육으로 잘 다져진 몸을 뽐내듯 자랑하며 셔츠를 높이 걸었다.

그 모습을 본 도희는 그의 맨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다소 부드러워진 어조에 용기가 생긴 탓도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보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했다.

도희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주완의 몸이 얼어붙듯 굳어졌다. 좀처럼 집에 잘 들어오지 않던 그와의 포옹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주완의 손은 어정쩡하게 허공에 멎어 있었다. 도희는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저 오랜만이라 어색해서 주완이 자신을 안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마워요. 신경 안 쓰이게 해 줘서.”

도희의 나직한 고백에 주완의 굳어진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망설이던 그의 뜨거운 손이 그제야 도희의 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그 얘기만 했나? 어머니가 다른 소린 안 했고?”

부현의 성격을 뻔히 알고 있는 주완이 물었다. 도희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의 뜨거운 온기를 느끼는 동안 도희는 낮에 본 여자의 존재를 어떻게 물을까 고민했다. 지금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의심하던 문제가 눈앞에 닥칠까 은근히 두렵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까. 도희는 고민 끝에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낮에 봤던 그 여자……누구예요?”

‘바람만 아니라면 다른 건 되돌릴 수 있다.’

그에게 질문하며 도희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 문제만 아니라면 권태기라 느껴지는 지금 시기를 더욱 현명하게 극복하리라 다짐도 했다.

그때, 안색의 변화가 없던 주완이 놀랄 만큼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었어. 거래처 사장 딸인데, 회의 펑크내고 온 자리라 근처에 있다가 데리러 왔다네.”

‘지금 주완 씨 여기 있으면 안 된다니까요?’

그제야 도희는 우연히 들었던 여자의 말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친해요? 데리러 올 정도면…….”

“얼굴 몇 번 본 게 다야.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어머니한테 괜히 도희 네가 꼬투리 잡힐까 봐 그랬어. 오해하지 마.”

주완의 단호한 설득에 도희는 남은 의심이 서서히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도희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멈칫한 주완 역시 곧 도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런 주완의 손길 하나에 도희는 그를 향한 의심이 모두 녹아내렸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주완은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여전히 말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 * *

어영부영 삼 개월이 더 흘렀다. 주완이 무심하다고 느끼고 꼬박 반년의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 찾아왔다.

도희는 무심한 주완, 가끔 다정한 주완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그가 변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오늘 일찍 와요?”

“안 될 것 같은데.”

재킷을 입으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 주완을 보면서도 도희는 그가 결혼기념일을 잊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몇 시에 올 수 있냐고 물었다.

“회사 가야 알…….”

주완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전화가 왔는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라고 말하며 도희에게 대충 인사를 하며 도망치듯 현관을 나섰다.

쾅. 문이 닫히고, 저절로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홀로 남겨진 도희는 쓸쓸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도희는 얼른 우울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휘젓곤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마저 준비했다.

* * *

광고 촬영장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스태프들은 감독의 지휘 아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바빴고, 여기저기서 성난 고함을 연신 질러댔다.

“3번 조명, 제대로 안 잡을래? 몇 번을 얘기해!”

“의상 관리 어떻게 한 거야! 주름졌잖아! 당장 펴 와!”

전쟁터 같은 촬영장 속에서 도희는 메이크업과 헤어 수정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화장품 CF 촬영이라 기존 일정이라면 바쁘지 않아야 하는데, 조감독의 실수로 인해 장소 대여 시간이 대폭 짧아져, 스태프들은 비상이었다.

긴장감 속에서 A 콘셉트 촬영을 마치고 B 콘셉트로 넘어가는 순간, 촬영 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스태프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보며 매니저 나영은 혀를 끌끌 찼다.

“다들 고생이다, 고생이야. 컨디션은 괜찮고?”

“응.”

눈을 감고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도희가 간단하게 답하자 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영은 메이크업 팀이 멀어질 때를 기다렸다가 막간의 틈을 이용해 나직이 그녀에게 물었다.

“너 무슨 일 있지.”

매니저이자 고등학교 동창인 나영은 SP 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사촌이기도 했다. 외삼촌 대표를 둔 덕에 나영은 일찍이 대학도 가지 않고 매니저의 길로 접어들었다. 나영은 매니저 자격이 주어지자마자 도희를 맡았고, 그 덕에 도희와 나영은 서로 비밀이 없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나중에.”

도희는 애초에 나영에게 주완과의 일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도희에게 나영을 속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때, 촬영장 밖으로 나갔던 조감독이 황급히 들어와 허 감독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무슨 얘긴지 허 감독의 시선이 도희를 향했다. 시선을 느낀 도희와 나영이 허 감독을 바라봤다.

잠시 후 허 감독은 인심 쓰는 얼굴로 조감독에게 무어라 속삭였고, 조감독은 그대로 다시 촬영장을 뛰쳐나갔다. 나영과 도희는 서로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잠시 후, 조감독은 그의 허리까지 솟아 있는 커다란 꽃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그를 보자마자 도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변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 역시 조감독이 가져온 꽃바구니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미 꽃바구니의 정체가 뭔지 짐작한 여자 스태프들은 부러움에 감탄을 내뱉었고, 남자 스태프들은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란 속에서 조감독은 마치 제가 꽃바구니를 준비한 것처럼 싱글벙글한 얼굴로 성큼성큼 도희에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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