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한 달 만의 승리
* * *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곡괭이도 없이 철광석을 캔다던가, 아니면 하룻밤 만에 성벽을 쌓는다던가.
불침번을 서지 않으면 비난과 처벌이 따르지만 혼자서 성벽을 쌓는 건 시키지 않는다. 불가능하니까.
그러니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일도 그런 범주에 속하는 일 아닐까.
"끄악!"
"루크!"
겁에 질린 병사들이 창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한 손으로 사람을 집어 던지고 주먹을 맞은 몸이 터져나가는 건 다른 의미에서 비현실적이었다.
"물러나지 마라! 창을 찔러넣어라!"
괴물은 이미 반나체나 다름없었다. 수많은 날붙이가 오고 간 흔적에 넝마가 된 옷이 펄럭거렸지만, 그 안으로 보이는 단단한 피부는 작은 생채기만이 존재했다.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해.
적어도 창이 박히고 화살이 꽂혀야 싸울 희망이 생기지 않을까. 작은 생채기가 생길 때마다 한목숨이 사라졌다.
"괴, 괴물...!"
"모, 못 죽여..."
그것은 재해나 다름없었다. 대처할 방법도, 피할 방법도 없었다. 갑주를 입은 기사들도 예외는 없었다. 유려한 몸놀림으로 두세 번의 공격을 피해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괴물의 손에 갑주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진다. 뭉개진 갑주 사이로 살점과 피가 터져 나왔다.
그때 맑은 하늘에 또 다른 태양이 뜨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사들을 불태운 죽음의 태양이었다. 서서히 커지기 시작하는 불덩이를 보며 병사들이 주저앉았다.
아르페온 산맥의 초입은 지옥이었다.
"후작님! 후퇴하셔야 합니다!"
후작은 숲을 전장으로 삼았다. 병사들의 사기를 붇돋고 괴물이 활개 치는 모습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작전이었다.
적어도 괴물이 눈앞에 있지 않으면 창은 들었으니까.
허나, 그것도 의미가 없는 듯했다. 우지끈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목이 무너지는 굉음은, 또 다른 공포를 자아냈다.
앞을 바라봐야 하는 병사들이 일제히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끊임없는 괴물의 괴성과 병사들의 비명. 반격의 서막이었던 숲이 죽음의 숲으로 변질되는 중이었다.
"후작님!"
부관의 재촉에 지그하르트 후작이 눈을 감았다. 인 외의 존재였다. 칼날에 상처를 입지 않는 존재는, 결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으니까.
"...후퇴한다. 산맥을 올라간다."
후작의 유일한 위안거리가 있다면, 산은 에어로크의 전장이라는 사실이었다. 괴물이 있는 곳을 제외한 전장은 충분히 제 몫을 해내는 중이었다.
저 괴물만 해결할 수 있으면 다시 반격할 기회는 있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밀리지도 않았겠지."
애초에 괴물이 없었다면 칼리를 빼앗기지도, 이곳 아르페온 산맥까지 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무력 만으로 이렇게 맥 없이 밀릴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둥 둥 둥
북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몸을 돌려 산을 타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간 끊임없이 들었던 후퇴의 북소리였다.
"도망쳐!"
"으아악!"
무력도, 마법도 약세인 에어로크는 파딘 제국군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뛰어난 궁술로 단련된 덕에 마법사를 족족 저격해 칼리를 지켜냈지만,저 괴물은 화살이 통하지 않았다.
직접 날렸던 화살이 괴물의 목을 맞고 튕겨 나오는 모습에 후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눈을 맞추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허나, 미친 듯이 날뛰는 괴물의 눈을 맞추기란 요원했다.
그렇게 에어로크 왕국군은 아르페온 산맥 정상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한 번 더 후퇴하면, 그때부턴 에어로크 영토였다.
"시간은?"
"세 시간이 조금 넘었습니다."
"..."
어두운 표정으로 보고하는 부관의 말을 들은 후작이 다시 눈을 감았다.
왜 점점 늘어나는가.
혹시나 괴물의 활동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계속해서 전투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처음엔 한 시간이었다.
성문이 반파됨과 동시에 나타난 괴물은 약 한 시간 동안 성벽과 성내를 휩쓸었다. 그게 전부였으나, 그 일로 후작은 칼리를 잃었다.
그 날이 괴물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혔던 날이었다.
그 다음은 한 시간 반이었다.
이전과 달리 제국군과 함께 나타난 괴물은 장장 한 시간 동안 주둔지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학살했다.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강해졌다.
게다가 제국군까지 함께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수많은 생채기로 부상이 심해지면 괴물은 주저 없이 적진으로 물러났다.
그 말은 즉 이성이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들어가 쉬게. 고생했네."
"...예."
힘없이 막사를 나가는 부관을 보며 지그하르트 후작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헤르트에서도, 다나크에서도 이렇게 막막하진 않았다. 인간이 해결하지 못할 재해는 없었으니까.
후작은 오랜만에 술이 생각났다
아주 쓰고 독한 술이.
"물러나지 마라!"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었음에도 아르페온 산맥의 정상은 쌀쌀한 날씨였다. 구름이 밑에 걸린, 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 누구도 주위를 둘러보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서면 에어로크의 영토다! 우리에게 물러날 곳은 없다!"
끊임없는 후작의 외침에 용기라도 얻었을까. 고착에 빠졌던 전선이 다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페온 산맥이 한눈에 보이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전선을 바라보던 후작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 곳으로 돌아갔다.
"으악!"
"막아라! 눈이 없는 곳은 나가지 마라!"
전투는 다행히 시종일관 유리한 전황이었다. 메마른 고원과 사막이 주 무대였던 파딘 제국군은 험한 산에서의 전투에 맥을 못 쓰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일한 한 곳, 괴물이 등장한 곳은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넘어졌을 때를 노려라! 눈을 노려!"
맨발이라 그럴까. 미끄러운 만년설을 밟은 괴물이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넘어지고 있었다. 눈이 쌓인 골짜기마다 옹기종기 뭉친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괴물을 찔렀다.
"마, 마법이다! 피해라!"
"어, 어떻게 피...! 으아악!"
괴물을 연신 찔러대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산을 올랐다. 병사들이 똘똘 뭉친 탓에 마법사들의 좋은 표적이 된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마법인지라 정확도가 낮다는 것이 유일한 구원 줄이었다.
그 모습을 본 후작이 활을 들었다. 목표는 화려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었다. 그 태양의 바로 밑, 로브로 몸을 가린 마법사가 연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로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얀 눈밭에서 보랏빛 로브는 숨기려야 숨길 방법이 없었다. 다섯 번째 희생양을 찾은 화살이 이내 활을 떠나갔고,
"컥...!"
빙글빙글 돌던 태양이 흩어졌다. 절망이 깃들었던 병사들의 표정이 안도로 변하는 것을 보며 후작이 입을 열었다.
"대기하던 병력을 전부 보내게. 괴물을 계속해서 붙잡아둬야 해."
"예!"
어쩌면 한 달 만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 듯했다.연신 제국군을 상대하는 병사들의 표정에도, 미끄러진 괴물을 찔러대는 기사들의 표정에도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 산맥을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차후의 문제였다.
10만에 달하던 병사들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도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우선은, 에어로크 코앞까지 쫓아온 제국군과 괴물을 밀어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게 눈이라는 거다! 이 자식들아!"
"니들 눈 밟아본 적 없지! 이 새끼들아!"
에어로크 왕국군에게 산과 눈은 태어남과 동시에 겪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였다. 뜨거운 태양과 미칠 듯한 일교차에 힘을 못쓰던 왕국군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국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동쪽 산맥 끝에서 떠오른 해가 중천에 다다랐을 무렵, 드디어 왕국군이 제국군을 밀어내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달만의 전진이었다.
"전선을 유지해라!"
"제국군을 쫓지 마라!"
지휘관들이 울분이 터진 왕국군을 필사적으로 달래며 진군을 멈췄다. 산을 오르느라 지친 제국군을 상대하기엔 충분했지만, 눈이 없는 곳에선 괴물이 다시 날뛸 게 뻔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피투성이가 된 괴물이 도망침과 함께 제국군이 썰물처럼 산맥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이 개자식들아!!!"
드디어 막았다. 드디어 막은 것이다.
기세등등하게 산을 올랐던 사막 놈들에게 드디어 한 방 먹인 것이다.
한 달 만에 울리는 승전고를 들으며 후작이 숙영지로 몸을 돌렸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기뻤지만, 승전을 축하하기엔 조금 일렀다.
"...겨울을 기다려야 하는가?"
"아르페온 산맥을 벗어나면 다시 사막 지형입니다... 게다가 겨울엔 식량 수레가 아르페온 산맥을 넘지 못할 것까지 생각하면..."
막사 밖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술과 고기를 푼 덕이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모두 막사에 모여있었다. 병사들은 승리를 즐겨도, 지휘관들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럼 결국 전선 유지가 최선인 건가?"
한 달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지형의 이점으로 첫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산맥을 내려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게 됐다.
"...괴물만 처리하면 언제든 진군할 수 있지만..."
그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모 역시 답답함에 꺼낸 말일 뿐 해결 방법을 듣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막사에 침묵이 내려앉기 시작한 그때,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카인?"
막사가 열리며 젊은 청년이 들어왔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채로.